제6화. Bye 지연 그리고 줄리
2018.02.21.
지연은 오랜만에 깊고 달콤한 잠을 취했다.
햇살을 대담하게 받아내는 커다란 창의 2층 방.
남의 집, 남의 방이었지만 지연에겐 5년 동안 살았던 뉴욕의 방만큼 친숙했다.
‘도대체 이 방에 얼마만이지?’
이 집은 지연이 유학 가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집에 있는 세 개의 방 중 1층은 서재처럼 쓰는 방이었고 2층에 있는 두 개의 방 중 지금 이곳이 부모님이 쓰시던 방이다.
엄마가 돌아가시며 아빠 혼자 쓰게 됐지만.
어쨌든 부모님이 쓰시던 방에서 하루를 보내니 엄마의 품처럼 포근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줄리도 잘 잤을까?
그런데 옆에서 자석처럼 붙어 자던 그녀가 없다!
‘어디 갔지?’
안 올라가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일어나려는데 아래층에서 청량한 소리가 올라왔다.
까르르, 까르르.
마치 트라이앵글을 연주하듯 맑고 행복한 웃음소리.
혼자 저렇게 웃을 리는 없고 아마 그 사람이랑 같이 있나 보다.
아빠의 정이 부족한 줄리가 삼촌 같은 아저씨와 재밌게 놀고 있을 상상을 하니 지긋한 미소가 올라왔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고마운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힘들 때마다 나타나 구제해주었다.
미국에서도 부랑자가 될 뻔한 걸 구해줬고 어제도 갈 데 없는 자신과 줄리를 이곳으로 데려와주었다.
가장 고마웠던 건 벽난로 앞에서.
아빠 생각에 눈물은 쏟아지는데 줄리를 안고 있어 손으로 눈물을 훔치지도, 무릎에 얼굴을 묻지도 못하고 있었다.
줄리의 얼굴 위로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데 그가 슬그머니 어깨를 내주었다.
그 넓고 든든한 어깨에 기대어 얼마나 울었는지.
심지어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친절을 베풀면서 태평양 같은 오지랖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애 아빠는 어디 갔는지, 왜 집을 나온 건지, 미국에선 왜 왔는지…….
친절을 받는 사람은 마치 의무처럼 대답해야 하는 것처럼.
수현이 이런 대답하기 싫은 질문들을 해댔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냥 일어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 하나만의 일이면 모르겠지만 줄리까지 얽혀 있는 사연들을 남들에게 쉽게 오픈하고 싶진 않다.
다행히 그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고 비교적 편한 환경에서 심장에 박힌 슬픔 한 조각을 털어낼 수 있었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지?’
또 미역국을 끓여줘?
질 좋은 구스다운 침구의 포근함을 만끽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줄리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귀에 울렸다.
까르르 까르르,
‘진짜로 뭐가 저렇게 재밌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지연이었다.
궁금한 그녀가 살포시 침대에서 내려왔다.
.
.
.
줄리의 웃음소리를 따라 1층으로 내려오며 지연이 그린 그림은 이랬다.
친절하고 유쾌한 아저씨 수현이 줄리에게 장난을 치고 줄리는 그의 장난이 재밌어 자지러지고.
서로 쳐다보며 하하 호호 재미있어 죽는 뭐 이런 거?
수현이 간지럼 잘 타는 줄리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뭐 이런 거?
두 사람의 익살스런 분위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살짝 구경만 하려 살금살금 발꿈치를 올렸다. 그런데,
헉!
“이 아저씨 바보야 바보. 크크크크.”
웃음소리의 불편한 진실을 목격하고 말았다.
하하 호호 서로 즐겁기는커녕 줄리는 수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동네 바보 놀리듯 놀리고 있었고,
졸지에 바보가 된 수현은 눈썹이 움찔움찔, 입술은 실룩실룩, 광대는 울긋불긋 폭발 직전!
지연은 깜짝 놀라며 줄리가 뻗은 손가락을 잡았다.
“무슨 말버릇이야 아저씨한테?”
하지만 줄리는 더 큰 소리로 웃어댔다.
“배고프다고 계란 프라이 해달라 그랬거든. 다 익혀달라니까 계란을 못 뒤집어. 무슨 어른이 이래?”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 접시엔 실패한 계란 프라이가 터져 있었다. 그것도 다섯 개씩이나.
줄리는 지연을 보며 자랑스럽게 외쳤다.
“엄마, 저건 나도 하지, 그치? 난 스크램블도 하잖아.”
남들 보면 한두 번 엄마 도와 만든 것을 자신이 한 걸로 아는 깜찍한 여섯 살 아이의 착각이라 하겠지만 불행히도 줄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계란 프라이도, 스크램블도, 심지어 계란 볶음밥도 할 줄 안다.
지연이 없으면 줄리의 아빠 태규가 딸에게 밥도 잘 안 챙겨준다는 걸 알고는 그녀가 줄리에게 가르쳐준 것.
‘줄리, 내가 없을 땐 이렇게 해서라도 밥을 챙겨 먹어.’
알고 보면 슬픈 이야긴데 줄리 입장에선 여섯 살인 자기가 할 줄 아는 걸 한참 어른인 수현이 못하니 이해가 안 갈 수밖에.
지연은 그냥 두었다간 더 크게 웃을 것 같은 줄리의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애가 버릇없이 굴었네요.”
그녀가 사과했지만 뒤집개를 든 채 정말로 바보처럼 서 있던 수현의 표정은 전혀 풀어지지 않았다.
눈동자엔 피곤한 듯 핏대가 서 있었고 이마엔 화가 났지만 꾹 참고 있다는 걸 누구라도 알 정도로 선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녀는 한 번 더 사과하며 수현의 손에 있는 뒤집개를 뺏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할게요.”
무안하고 어색한 김에 빠르고 익숙한 손으로 계란을 휙 휙 뒤집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줄리가 또 한 소리를 했다.
“이봐, 엄마도 잘하잖아. 아저씨만 못해. 크크크크크크.”
줄리의 비웃음으로 지연의 시선이 다시 수현에게 향했다.
역시나 그의 눈매는 깊게 구겨지며 불쾌감을 드러냈고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듯 지연에게 형식적인 목 인사를 하고 성큼성큼 부엌을 나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그의 발소리가 북소리처럼 집 안을 울렸다.
순간 지연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 하나,
‘나가야겠다, 미움 받기 전에.’
*
방으로 들어온 수현은 엉망이 된 침대를 정리도 못한 채 그냥 뻗었다.
생각 같아선 아직도 허공에 날리고 있는 베개 속 깃털까지 싹 다 청소하고 싶었지만 손가락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강철체력 진수현이라도 이틀 연속 잠을 못 이루니 온몸의 근육이 제각각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사실 수현은 오늘 아침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수현 인생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침을 맞이했다.
지연이 본 수현과 줄리가 함께 있는 모습은 조금 전 부엌에서의 한 장면이었지만 수현은 오늘 아침 정확히 5시부터 줄리와 함께였다.
그는 2층에 있는 두 개의 방 중 큰 방을 지연과 줄리에게 주고 작은 방을 썼다.
아래층에도 방이 하나 있지만 그건 서재용이었으니까.
시차 적응도 안 되고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을 설치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웬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작고 음침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옆방에서 들리나 했는데 알고 보니 발밑에서 올라오는 소리!
온몸을 타고 담쟁이줄기가 올라오듯 느껴지는 소름에 머리카락까지 바짝 섰다.
너무 황당해 확인도 못하고 있는데 소리의 정체가 이불 안에서 꼼지락꼼지락거린다.
그러더니 조금 뒤 이불 위로 뭐가 불쑥!
“으악!”
비명을 지르며 침대 끝으로 도망갔다.
스르르 이불을 내리며 올라온 작은 정체는?
“너…… 줄리?”
그런데 정체를 확인한 후에도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빨간 립스틱을 인중까지 칠해 마치 피를 먹은 듯 끔찍했고 심지어 그 입으로 방긋 웃으며 립스틱 잔뜩 묻은 이를 드러냈다.
“아저씨 방 좋다, 헤헤.”
깜깜한 새벽 작은 조명 하나에 비춘 그녀의 사탄 인형 같은 모습에 수현의 기습당한 심장은 우렁차게 뛰고 머리는 쭈뼛쭈뼛 번개 맞은 나뭇가지가 되었다.
생각 같아선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거친 숨을 정리했다.
그리고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입술은 왜 그러니?”
줄리는 익살스럽게 눈빛을 빛냈다.
“엄마 몰래 발랐어요, 헤헤.”
“…….”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아이를 번쩍 안아 욕실로 가 닦였다.
새로 깐 하얀 시트에 빨간 립스틱이 묻길 바라지 않으니까.
다시 방으로 가 자라고 했더니 그녀는 탁구공처럼 톡 튀어 다시 침대로 올라왔다.
“베개싸움 해요, 우리.”
너랑 이 시간에 말 섞는 것도 싫은데 무슨 베개싸움을 해.
“줄리야, 아직 새벽이니까 다시 엄마한테 가서…….”
하는데 퍽!
“앗싸, 내가 선방!”
“…….”
얘는 저런 말을 어디서 배웠을까?
치미는 짜증을 꾹 참고 베개에 맞아 한쪽으로 쏠린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다시 한 번 타일렀다.
“줄리야, 아저씬 정말 이런 거…….”
퍽! 퍽!
“!”
순간 그의 손엔 저도 모르게 베개가 들려 있었고 어금니엔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너 이리로 와.”
그렇게 한 시간을 싸워주었다. 아니, 맞아주었다.
한 시간을 일방적으로 맞다 보면 여섯 살 아이도 K1 챔피언처럼 위험한 존재로 보인다.
힘 조절에 실패해 꾹 쥐고 있던 힘의 고삐를 아주 살짝 풀었는데 그만 수현의 베개가 줄리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으악!”
줄리가 비명을 지르며 침대 아래로 나자빠졌다.
놀라서 그녀에게 달려가 일으켜줬으나 그녀는 두 팔과 두 다리를 자유롭게 벌린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수현의 머리가 흐리멍덩해졌다.
‘아이는 어떻게 달래지? 울음은 어떻게 해야 그치지?’
유치원 졸업 후 요렇게 조그만 아이와 몇 번 마주친 적도 없는데 우는 걸 달래는 봤겠어?
수현이 어떤 액션도 없이 빤히 보고만 있자 줄리는 스스로 눈물을 그치며 삐죽거렸다.
“미안하면 밥 해주면 안 돼요? 나 배고픈데. 헤헤.”
그녀는 달래주지도 않는 사람 앞에서 우느니 뭔가를 요구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
수현은 눈물을 품은 그녀의 요구에 0.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어, 안 돼.”
솔직히 아무리 아이지만 백 대 맞고 나니 한 대 때린 게 그다지 미안하지 않았고 요리는 하지를 못하니 해줄 수가 없었고.
그의 단호한 거절을 들은 줄리는 이번엔 사탄의 인형처럼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미국에선 애 때리면 경찰이 잡아가는데. 한국은 어때요?”
협박은 또 어디서 배웠을까?
하지만 협박에 절대 굴하지 않는 남자가 또 수현이었다.
사소한 협박에 굴했다면 입사 2년 만에 브랜드 인수 사냥꾼이란 소릴 듣지 못했을 것.
그는 줄리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한국은 112인가? 신고해보던지.”
미간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며 만만치 않은 어른임을 알려줬다.
줄리도 무모한 아이는 아니었다.
요구가 관철이 안 될 땐 바로 포기할 줄 아는 지혜가 있었다.
금방 눈꼬리를 내리며 이번엔 비 맞은 새끼 고양이 눈동자로 그를 보았다.
“실은 배가 너무 고파서 그래요. 이상하게 배에서 소리도 나요. 어지럽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처럼 머리를 휘청대는 가련한 유기묘의 메소드 연기까지!
그녀의 그 애절한 표정에 잔뜩 힘을 주었던 수현의 굵은 어깨가 축 내려갔다.
“할 수 없지, 뭐라도 해볼게.”
공갈도 협박도 안 무서운데 저 길고 풍성한 눈썹 아래로 눈물을 툭 하고 떨어뜨리면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부엌에 서 있게 된 수현이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계란 프라이라도 해주려 그 큰 덩치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성의는 모르고 그런 바보 취급을 받다니.
‘그것도 애 엄마 앞에서!’
그런데 이상하게 자신을 놀리던 줄리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가 더 신경을 잡아끌었다.
아이에게 프라이 하나 못 해주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줄리가 바보라고 놀릴 때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이의 버릇없는 말투에 미안해하는 얼굴이긴 했지만 속으론 이런 걸 왜 못 해, 라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심지어 쌩한 얼굴을 하고 부엌을 빠져나오기까지 했으니 아마 그녀에겐 아이가 놀려서 화가 난 속 좁은 남자로 보였을 듯.
그게 아닌데.
줄리에게 요리를 해주는 것이 아주 싫은 건 아니었는데.
다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다 남에게 들켰을 때의 어색함? 무안함?
그는 여섯 살 이후 사람들과 이렇게 복작거리고 서로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가깝게 지내며 산 적이 없었다. 비록 식구일지라도.
집 안에서도 인터폰을 통해 서로 소통을 할 만큼 독립성이 보장된 삶을 살다 보니 누군가 예고도 없이 자기 방에 들어오고 함께 장난을 치고 함께 부엌에서 북적북적거리며 요리를 한다는 거 자체가 낯설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기 힘들었던 것뿐인데.
‘설마 나를 진짜로 바보로 아는 건 아니겠지?’
심지어 아까는 세수도 못 한 초췌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 서 있는 것도 싫었다.
막 일어나서 대충 걸치고 나온 그녀의 피부는 햇살처럼 빛났는데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내가 왜 이 여자를 자꾸 신경 쓰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동생이 잘못을 저지른 여자라지만 내가 당사자도 아닌데 너무 의식하는 거 아닐까?
이유가 뭘까?
내가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아마 한국에 오자마자 만나게 된 여자라 그럴 거야.’
스스로 이렇게 결론을 내려버리니 마음 속 깊이 평화로운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단지 그 이유일 뿐이야.
그러니까 어서 이 모녀와 헤어져야겠다.
이들과 계속 함께 있다간 내가 그리고 있는 내 인생의 목표, 그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고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겠다는 야망 가득한 내 머리와 가슴이 복잡한 감정으로 얽힐 듯.
나 이렇게 누군가를 신경 쓰는 사람 아니잖아?
수현은 휴대폰을 꺼내 로버트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제 와?
전송 즉시 답장이 왔다.
-곧 한국으로 출발합니다. 애런도 오기로 했습니다.
예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고 천장을 향해 올렸다.
오늘 밤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 말은 내일부턴 원래의 나, 어떤 불도 녹일 수 없는 냉정한 심장을 가진 진수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씀.
구겨졌던 미간이 다시 매끈하게 펴지며 저도 모를 미소가 피어났다.
Bye 지연 그리고 줄리.
*
지연은 줄리와 함께 방으로 들어와 펼쳐놓았던 옷가지를 정리해 다시 가방 속에 넣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빨리 이 집을 나가기 위해서.
지연은 분명 보았다.
아까 부엌에서 수현이 되바라진 줄리의 행동에 지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애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남의 눈치를 살피는 버릇이 생긴다.
특히나 줄리처럼 나이에 비해 좋게 말하면 똘똘하게, 나쁘게 말하면 맹랑하게 말하는 아이를 둔 엄마들은 더욱 그렇다.
줄리가 이렇게 말을 되바라지게 하는 이유를 조금만 알아주면 되는데.
어릴 때부터 너무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맡겨지다 보니 또래 아이들보다 빨리 성숙해버렸다.
그런데 어른처럼 말을 하면, 심지어 그게 되바라진 말일지라도 사람들이 재밌어하며 한 번 더 말을 시키니까 그런 관심이 좋아서 더 그렇게 말을 하는 경향이 생겼다.
어찌 보면 가슴 아픈 이야긴데 그런 사정을 구구절절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진 않다.
줄리를 불쌍한 아이로 보는 건 내가 용납이 안 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릇없는 말투는 줄리의 고쳐야 할 나쁜 점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줄리를 밉게 보거나 눈치를 주는 건 또 싫고.
내 새끼 내가 때려도 밖에서 맞고 오면 싫은 것처럼.
아무리 급했어도 모르는 사람 집에 오는 게 아니었어.
급한 결정에 살짝 후회가 올라올 무렵 갑자기 침대를 트램펄린처럼 방방 뛰던 줄리가 픽 쓰러져 졸린 눈을 비볐다.
짐 챙겨 나가려는 시점에 줄리가 눈을 비비니 지연은 난감했다.
“졸린 거야? 시차 적응이 안 되나?”
줄리가 큰 눈을 가자미처럼 내리고 옹알이하듯 말했다.
“아냐, 새벽부터 너무 놀아서 그래, 아저씨랑.”
“새벽부터 같이 놀았다고?”
“응, 새벽에 눈 떴는데 심심해서 엄마 립스틱 바르고 아저씨 침대에 들어갔어.”
헐, 또?
지연은 줄리가 집에 손님이 오면 새벽에 그들의 이불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놀래는 성향이 있다는 걸 들은 바 있다.
당연히 손님들은 놀라 비명을 지르고 화를 냈고.
나중에 줄리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어보니 전혀 상상도 못 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프리 스쿨 친구들이 그러는데 아빠 품은 따뜻한 거래. 그런데, 우리 아빠는 나 한 번도 꼭 안아준 적 없어. 맨날 바쁘다 그랬지. 그래서 다른 아저씨품은 어떤가 좀 궁금했어.’
‘…….’
그 이유를 듣곤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는지…….
그러고 보니 문태규 그 자식은 집에서도 일을 해야 한단 이유로 퇴근하면 품으로 달려오는 줄리를 한 번도 꼭 안아준 적이 없었다.
밀어내기 바빴고 놀아준 적은 더더욱 없었고.
그래서 줄리는 아빠 또래의 남자들이 궁금하고 그들과 함께 놀고 싶고 버릇없는 행동을 해서라도 관심 받고 싶은 거였다.
불쌍한 줄리…….
그래서 수현 씨에게도 그런 행동을 했었구나.
‘그래서 수현 씨는 줄리를 보는 눈빛이 그렇게 지쳤던 거고.’
순간 그의 불편했던 표정이 이해되면서 줄리가 그를 괴롭혔단 생각은 못 하고 수현이 아이를 싫어한단 생각을 했던 게 부끄러웠다.
줄리에 대한 얘기를 해준다면 좀 이해해주려나?
하지만 이제 곧 헤어질 사람에게 그녀에 대한 슬픈 얘기를 하고 싶진 않다.
지연은 눈을 깜박깜박 거리며 졸고 있는 줄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줄리야, 우리 나가야 해. 나가자.”
네가 더 미움 받기 전에.
줄리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엄마의 말에 작은 턱을 주억거렸다.
“네…….”
엄마가 나간다면 그녀도 가야 하니까.
.
.
.
지연은 여느 때처럼 한 손엔 커다란 짐, 한 손엔 줄리를 잡고 수현의 방에 노크했다.
줄리에게 배꼽 인사를 하라는 준비도 시키고.
“저기요, 저희 가는데요.”
그런데 안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용이 들리진 않았으나 대화의 분위기는 대충 느낄 수 있었다. 좀 심각한?
살짝 분위기가 안 좋은 거 같아 그냥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들으려면 듣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 큰소리를 냈다.
“저희 가겠습니다.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아저씨.”
줄리도 문을 향해 배꼽 인사를 했다.
안에선 전화를 끊은 거 같은데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할 도린 했다고 생각한 지연이 줄리의 손을 잡았다.
“자, 이제 가자.”
그러데 막 돌아서는 찰나 갑자기 성급한 동작으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더 다급한 몸짓으로 수현이 지연을 막아섰다.
“저기요!”
놀란 지연이 확장된 동공으로 그를 보았다.
“네?”
하지만 수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앞머리를 푹 밑으로 내린 채 두 손을 허리에 집고 호흡을 정리했다.
“흠…… 흠…….”
지연은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듯 궁금증을 담은 눈동자로 그를 보았다.
수현은 그런 지연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입 바람으로 앞머리를 날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연 씨, 저…….”
그리고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