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5화 (5/77)

제5화. 지켜줄게요, 그게 뭐든

2018.02.17.

집을 나와 빨간 지붕 집으로 오는 내내 지연은 몇 번이고 남자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함부로 남의 집에 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너무도 당연한 듯 커다란 보폭으로 집으로 향했다.

막무가내인 그의 행동에 지연은 남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언성을 높였다.

“이보세요, 지금 뭐하는 거예요!”

그에게 신세도 지고 실례도 범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다.

“늦었지만 인사드리겠습니다. 전 진수현이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뉴욕에서 왔구요.”

뭐지? 싶었지만 지연도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았다.

정중히 자기 소개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

“전 송지연이라고 합니다. 저도 뉴욕에서…….”

지연도 할 수 없이 인사를 했는데 남자가 말을 잘랐다.

“일단 절 이상한 사람으로 보실까 봐 제 이름을 밝힌 겁니다.”

애초에 그녀의 자기소개 따윈 관심이 없었다는 듯.

불쾌해할 새도 없이 그가 말을 이었다.

“애가 추워하는 것 같으니 아무 생각 말고 딱 하루만 저희 집에 있다 가세요.”

친절을 가장한 명령 같은 말투.

뭐야? 뉴욕에서 하룻밤 신세졌다고 날 우습게 아나?

본능적으로 방어심이 올라왔다.

“아닙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한테 자꾸 신세를 지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고 손을 뻗어 그의 품에 있는 줄리를 안으려는데 갑자기 줄리의 코에서 하얀 물이 지익-

“이상하다, 코에서 물이 나오네?”

이게 콧물인지 모른다는 듯 기다란 속눈썹을 깜박깜박 거리며 소매로 코를 훔치는 줄리.

조금 전 지연에게 목도리를 주려고 일부러 콧물을 감추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일부러 짜낸 것 같은데…….’

잠시 줄리를 쏘아보다 지연은 다시 팔을 뻗었다.

“빨리 이리로 와.”

그런데 그녀가 이번에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에치이! 어? 기침도 나네?”

“…….”

재채기가 부자연스러웠거든?

이번엔 수현이 부추겼다.

“밖에 오래 있으니까 그렇지. 더 있으면 열도 나겠다.”

“아저씨, 열나면 죽어요?”

내참…….

손발 척척 맞는 환상의 콤비에 지연의 눈매는 가로로 찢어졌지만 입술에선 다른 말이 나왔다.

“그럼 추위만 잠시 피하고 가겠습니다.”

추운 건, 추운 거니까.

*

뉴욕으로 돌아가는 몬테규 가의 전세기.

보타이에 각 잡힌 정장,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50대 남자가 피곤한 듯 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로버트 알리.

그는 30년 넘게 몬테규 가의 고문변호사이자 집사로 일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꿈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로펌의 수장도 아닌 한 일가(一家)의 고문 변호사가 수십만 달러의 연봉과 전세기를 탈 수 있는 대우를 받기란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이 집안의 골치 아픈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사람들의 망언일 뿐이다.

지금도 불안한 기류로 두 시간 정도 통신이 두절됐는데 그의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두 시간이면 이 명문가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에.

기류가 안정을 찾자 인터넷과 전화가 연결됐다.

“휴, 다행이다.”

로버트는 조였던 보타이를 풀었다.

통신이 터지자마자 그의 휴대폰이 쉬지 않고 울려댔다.

‘그렇지, 잠시도 조용할 리 없지.’

예상대로 그의 하얀 머리카락을 쭈뼛하게 세우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애런의 여자와 아이를 찾은 것 같아. 아이의 이름이 줄리아나더군.

첫 번째 도련님 수현으로부터 온 것이다.

일단 이건 좋은 소식이다.

여자를 놓치고 한 달 동안 전전긍긍했었는데 다시 찾았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 이 모든 일의 원흉, 둘째 도련님만 찾으면 되는데…….

‘애런 도련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걸까?’

애런을 생각하니 다시 관자놀이에 힘이 팍!

사실 이 집안 고문변호사이자 집사일의 절반은 모두 애런 때문에 생기는 일들이다.

집안의 둘째 아들, 애런 몬테규.

로즈 몬테규가 수현의 아빠와 재혼하기 전 낳았던 아들이다.

애런은 몇 달 전 엄마 로즈와 크게 싸우고 집을 나가 아직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그를 찾지 않는다.

하이 스쿨 때부터 가출을 밥 먹듯 했기 때문에 가출은 애런에게 메인 디시를 먹은 후 디저트를 먹는 것만큼 일상이었다.

그도 집을 나가면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

연락이 온다면 오히려 더 큰 문제.

가지고 나간 수십만 불을 다 썼거나 타고 나간 수퍼카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니까.

하지만 로버트가 애런의 소식을 전혀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다. 그건 직무유기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었을 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그와 함께 지냈던 세계 각지의 미녀들이다.

어느 날은 스페인의 한 여자가 전화했다.

“애런과 마요르카에서 꿈같은 날들을 보냈어요. 그런데…… 그 새끼가 자고 일어나니 사라진 거 있죠? 옆 스위트룸에 있던 여자랑 같이 간 거 같아요. 저보다 가슴이 컸거든요.”

또 어느 날은 프랑스의 여자가 전화했다.

“함께 샤넬의 S/W 패션쇼 보다가 그만 그 새끼가 런웨이에 있던 모델이랑 사라졌어요! 어쩐지 그 모델 다리를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더라니!”

6개월 전에는 중국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스웨덴 여자였다.

“함께 베이징의 자금성을 구경하다 사라졌어요. 분명 이 성 안에 있는 게 확실한데, 이걸 다 어떻게 뒤지죠? 방만 9,999개라는데.”

도련님…… 설마 세계 일주를 하시는 겁니까?

몇 달 전부턴 그나마도 오던 여자들의 소식이 없어 안 그래도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는 찰나,

한 기자로부터 취재를 가장한 협박 전화를 받았다.

‘아십니까? 애런 몬테규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다는 걸?’

둘째 도련님에게 아이가 있어?

기자의 말에 의하면 몇 년 전 애런이 모르는 사이 여자가 아이를 낳아버렸다는 것.

임신 초기에 말하면 애런이 낳지 못하게 할까 봐 멀리 찾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그럼 이제까지 여자가 왜 아무 말이 없었나요?’

로버트가 묻자 기자도 그 이유는 모르겠고 추측으로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여자가 정말로 머리가 비상해서 빼도 박도 못하게 한참을 키웠다, 서프라이즈 뙇!

하나는 여자가 아이를 일단 낳긴 낳았는데 그 사실을 안 애런이 상처를 주고 버렸다는 것.

하지만 이 경우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연락을 취해 양육비는 받아낼 것이라고 했다.

로버트는 애런의 문제라면 한 팀이 되어 해결하는 수현과 의논하기로 했다.

기자는 기사화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돈을 요구했지만 수현이 거절했다.

‘협박에 응할 순 없습니다. 오히려 명예훼손과 무고죄로 고소하겠다고 하세요.’

역시 냉정한 첫째 도련님…….

수현이 시키는 대로 기자에게 큰소리는 쳤지만 솔직히 속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정말로 증거를 가지고 오면 어떡하지?

아직까지 애런이 애를 데리고 온 적은 없었지만 여태 친 사고들로 종합해볼 때 충분히 그런 일은 생기고도 남았다.

그는 수현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렸다.

‘만일 기자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먼저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애런 도련님과 그의 여자, 그의 아이는 화류계 호사가들의 가십거리가 될 테니까요.’

비밀리에 애런과 애런의 여자를 추적하던 중 수현이 알파인의 언덕에서 그녀로 의심되는 여자를 만났다고 했다.

얘기를 들으니 정황이 딱 들어맞았다.

‘에라이 문태규, 이 나쁜 자식아!’

여자는 둘째 도련님의 캐릭터를 잘 알고 있었고,

‘나 그 자식 애를 키운 여자다.’

기자가 말한 대로 애가 있었고,

조금 전 수현이 아이의 이름을 확인해주었다.

줄리아나.

하필 몬테규 가에서 운영하는 기업 이름과 똑같다. 그 말은 즉,

‘이 여자가 확실하다!’

로버트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꼭 붙들고 계셔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제가 가기 전까진 절대 도련님이 애런 도련님의 형이라는 걸 밝히시면 안 되고요.

여자가 수현이 애런의 형이라는 걸 아는 순간 아이를 뺏길까 봐 도망가든지,

애런에게 데려다 달라고 떼를 쓰든지,

수현의 행방까지 언론에 알리겠다고 협박을 할지도 모르니까.

‘수현 도련님이 내가 갈 때까지 여자를 놓치면 안 되는데…….’

로버트는 기장과 통화하기 위해 기내용 인터폰을 들었다.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준비해서 다시 인천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물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또 하나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발신자를 확인할 수 없는 unknown.

‘뭐지?’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헉!

로버트의 머리가 다시 쭈뼛해졌다.

-Hey, Robert, wat up? (헤이 로버트, 잘 지냈어?)

십대 같은 말투, 뜬금없는 연락.

그였다.

이 모든 사건의 유발자, 애런 몬테규.

*

지연과 수현을 데리고 2층 빨간 벽돌집으로 온 수현.

설득에 설득을 거듭해 모녀를 집으로 데려와 사정 반경에 두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집 안에 발을 디디자마자 드는 생각은 미스터리 호러 그 자체였다.

‘끔찍하군.’

사실 수현은 두 사람을 집 안까지 데리고 올 생각은 아니었다.

로버트가 한국으로 왔을 때 찾아갈 수 있도록 연락처 정도만 알아내면 그뿐.

그런데 지연의 아빠와 지연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고 하필 그녀가 집을 나왔고 하필 갈 데도, 돈도 없다는 줄리의 말을 듣고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그대로 보내면 또 이들을 놓칠 테니까.

로버트가 당부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말라고.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집 안으로 들였는데 들어오자마자 줄리가 먼지가 풀풀 날릴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애만 뛰면 되는 데 그 뒤로 지연이 더 큰 몸짓으로 쫒아 다녔다.

“뛰지 마! 남의 집에서 뛰는 거 아냐.”

머릿속에 쇠구슬이 진자운동을 하듯이 지끈지끈.

26년 만에 찾은 한국에서의 첫날이, 힘들게 찾아낸 그의 새 보금자리가,

엉망이 되고 있다!

수현은 잘못 배달된 택배처럼 거실 중앙에 멀건이 서 있었다.

그런데 소파와 소파 사이를 패턴 없이 넘나들던 줄리가 갑자기 두 손을 배꼽에 모으고 그의 앞으로 급정거했다.

“아저씨 이거 켜주면 안 돼요?”

그녀는 말과 동시에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가니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올드한 스타일의 벽난로가 보였다.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 수리공에게 막아달라고 했었는데 얘기가 잘 전달돼지 않았던 모양이다.

긴 속눈썹을 위아래로 깜박이며 간절한 표정으로 올려보는 줄리를 보고 수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안 돼.”

알파인 저택에 있는 최고급 대리석 페치카에 익숙한 그에게 이런 잔재 날리는 오래된 벽난로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그런데 더 매력적이지 않는 소리가 그의 달팽이관을 고문했다.

“으앙~~~~~~~~”

수현의 거절에 줄리가 눈물을 터트린 것.

아이는 지연에게 달려갔고 그녀는 익숙한 품으로 줄리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아저씨가 괜히 그러시는 거야. 나중에 꼭 해주실걸?”

그러면서 아이를 달래려고 하는 말이니 걱정 말라는 식으로 수현에게 가벼운 윙크를 보냈다.

졸지에 벽난로 하나 피워주지 않는 옹졸한 아저씨가 되다니!

‘이게 다 애런 때문이야.’

짜증이 확 올라오면서 애초에 이 일에 엮인 것 자체에 대한 후회까지 밀려왔다.

알파인 언덕에서 여자가 소리 지를 때 차라리 그냥 모른 척할걸.

사실 수현은 이렇게 남 일에 참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아니, 반대로 심장의 반은 얼음일 거라는 소릴 들을 정도로 남들에게 냉정하다.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과 시기, 왜곡된 시선을 받으며 성장했다.

때문에 본능적으로 남들의 간섭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보호하는 DNA가 생겨났다.

자신의 감정을 얘기할 친구 하나 사귀지 않을 정도로 만큼 완벽하게 자신을 고립시킬 정도로.

그런 사람이 남들 일에 관심이 있을까?

그런데 유일한 수현의 아킬레스건이 애런이다.

로즈 몬테규가 애런을 데리고, 수현의 아빠 진승규가 수현을 데리고 재혼했으니 사실 로즈의 진짜 핏줄은 애런이다.

심지어 재혼한 지 4년 만에 아빠 진승규는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승규가 죽은 후 사람들은 말했다. 수현이 로즈 몬테규로부터 내쳐질 거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로즈의 수현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깊어졌다.

이전보다 더 수현을 챙기고 의지하고 대외적으로 내세웠다.

의붓형에게 엄마의 사랑을 뺏겼기 때문일까?

사춘기가 되며 애런의 방황이 시작됐다.

마약, 음주, 하룻밤 수십만 달러를 날리는 카지노, 헐리웃 셀럽들과의 광란의 파티 등등,

전형적인 재벌집 망나니 자식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나쁜 짓은 그의 것이었다.

로즈는 애런을 가문에게 내치겠다며 강하게 나왔지만 늘 수현이 가로막았다.

‘어머니, 절대로 애런을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수현은 안다.

애런이 저러는 이유는 모두 어머니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라는 걸.

그도 예전에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랬던 기억이 있다.

그 마음을 알기에, 그래서 미안하기에 수현은 늘 애런에겐 져줄 수밖에 없는 형이 되고 말았다.

그가 사고를 치는 족족 해결을 해야 하는 것도 그의 몫이고.

‘휴…….’

애런을 생각하니 또 화만 낼 일은 아니었다.

수현은 온몸에 가시처럼 올라온 예민과 짜증을 스스로 달랬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해결해보자.’

로버트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온다고 했으니 길어야 이틀이다.

이틀만 저 여자와 아이를 붙들고 있으면 된다. 그런데…….

‘어? 어디 갔지?’

금방까지도 그의 시야에 있었던 두 모녀가 사라졌다.

부엌에도, 마루에도, 1층에 있는 방에도 없었다.

‘혹시?’

그는 자신도 한 번도 올라가보지 못한 2층으로 향했다.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한 바퀴 돌아 올라가니 가장 먼저 복도 끝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창문이 달빛을 흡수해 불 꺼진 2층을 밝혀주었다.

그런데……

밝은 빛이 떨어지는 마룻바닥에 세상에서 가장 성스런 그림이 펼쳐지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 쌔근쌔근 잠든 아이를 꼭 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있는 엄마의 모습.

달가운 손님들은 아니었지만 모녀가 만들어낸 그림에 그의 마음이 살짝 움직였다.

그는 줄리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작은 목소리를 냈다.

“벽난로 켜줄게요. 내려갑시다.”

.

.

.

지연이 잠든 줄리를 안고 1층으로 내려오니 수현이 벽난로 앞에 담요를 깔고 있었다.

그러곤 이 위에 줄리를 눕히라는 손짓을 했다.

“오늘 수리 끝낸 집이라 아직 보일러가 훈훈하진 않아요. 방이 따뜻해질 때까지 여기 좀 있다 올라가요.”

수현은 익숙한 솜씨로 벽난로 옆에 잘 정리돼 있는 참나무를 난로 안으로 넣었다.

나무에 불이 오르자 은근한 숲의 향이 집 안을 채웠다.

지연은 그가 시키는 대로 줄리를 안고 벽난로 앞에 앉았다.

추위만 피한 후 바로 나가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막상 12월의 잔인한 칼바람을 경험해보니 다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줄리도 잠이 들었고.

“감사해요, 이렇게 묵게 해주셔서.”

지연은 하룻밤을 보내는 걸 기정사실화 하며 인사를 했다.

수현은 짧게 입 꼬리를 올려 보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타탁 타닥 타닥-

난로 속 나무들은 온 몸을 태우며 실내에 온기를 퍼트렸다.

꽁꽁 얼었던 몸이 녹아내리니 잠시 접어두었던 고민들이 다시 떠올랐다.

아빠.

모른 척했지만 지연은 알고 있었다.

집을 나와 계단을 내려올 때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뒤따라 나오려 했다는 걸.

분명 맨발이셨을 거야.

그러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딸을 보고 그대로 쾅 문을 닫아버렸겠지.

‘그렇게까지 냉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줄리를 지키기 위해 아빠를 향해 겨눴던 잔인한 칼들이 후회라는 이름으로 되돌아와 지연의 심장을 찔렀다.

미치겠다!

봉수가 지연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기에 미칠 것 같았다.

엄마와 지우의 추억이 있는 이 집을 팔고 유학을 보낸다는 게 봉수에겐 얼마나 큰 결심이었는지 알기에 미칠 것 같았다.

하나 있는 딸내미의 성공을 아빠가 얼마나 바랐는지 알기에 미칠 것 같았다.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지연으로선 옴팡지게 입술을 여미고 맞설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줄리의 심정은 어떨까?

세상에 하나 남은 자신의 보호자가 저렇게 흔들린다면 줄리의 세상엔 아무것도 없는 게 되는 거잖아.

지우도 세상에 엄마처럼 따르는 단 한 사람, 그녀에게 달려오느라 사고를 당했다.

지금 지연이 줄리를 버리면 그녀가 지우처럼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엄마 주머니를 잃은 아기 코알라처럼 삭막한 들판을 헤매게 만들 순 없었다.

난 절대로 너만은 잃고 싶지 않아!

그래서…… 알면서도 소리쳤다.

앙칼지게 발악했다.

칼로 심장을 베는 심정으로 대들었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아빠…….’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내렸다.

눈물은 흘러 난로불로 붉어진 줄리의 동그란 볼을 똑똑 두드렸다.

‘울어?’

그녀의 눈물을 목격한 수현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눈물이 의외였기 때문에.

물론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에 대해 오해를 했던 건 사실이었다.

마른 몸매에 은근한 볼룸을 드러내며 맑고 투명한 피부를 가진 예쁜 외모지만 술에 취하면 망가져버리는 헐렁한 여자.

하지만 한국에서 마주친 그녀는 자기 몸집만큼 큰 짐과 줄리를 두 손에 꼭 쥐고 당차게 집을 나올 줄 아는 강단 있는 여자였다.

그래서 억센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억센 여자기에 애런을 버틸 수 있었고, 억센 여자기에 애런 몰래 아이도 낳았고, 억센 여자기에 혼자 지금까지 키울 수 있던 거 아닌가?

아빠와 싸우면서도 눈가 한 번 붉히지 않았던 여자가 갑자기 이런 처연한 눈물을 흘리다니.

수현의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으며 그녀의 옆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여자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에게 있어 누군가의 눈물이란 외면해야 할 존재였지 달래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사귀던 여자도 그의 냉정한 태도에 상처받아 울거나, 미래를 약속하자며 징징대면 바로 이별을 선언했다.

무시 받지 않으려, 지지 않으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으려 공격적으로 살아온 그에게 남의 눈물을 닦아줄 여유 따윈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외면하기 힘들었다.

내 잘못이 아닌 동생의 잘못이기에 왠지 더 크게 느껴지는 죄책감?

왜 우는 거냐고 물어보기라도 할까?

눈물의 의미를 알면 해결해줄 수도 있으니까.

집이 없어 그렇다면 구해줄 수 있고 돈이 없어 그렇다면 주면 되니까.

‘그래, 대놓고 물어보자.’

용기 내어 막 이유를 물어보려는데 그녀가 먼저 알려주었다.

“아빠……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끅끅 숨죽이며 울다 서러움이 터져버린 것.

그녀는 잠든 줄리의 볼에 눈물로 가득 찬 얼굴을 묻으며 흐느꼈다.

“그래도, 그래도 보낼 순 없어요……. 절대로…….”

아이가 깰까 차마 큰소리로 터트리진 못하고 가슴으로 토해내는 그녀의 눈물.

그 모습을 보는 수현의 심장에 말할 수 없는 감정의 너울이 퍼져나갔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 느낌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수현은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로 손을 올렸다.

그녀가 기대어 울 수 있도록 단단하고 넓은 자신의 어깨 위로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지켜줄게요, 그게 뭐든.

당신이든.

당신 딸이든.

#dar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