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갑시다, 우리 집으로
2018.02.14.
줄리가 빨간 지붕 집으로 숨어버리기 한 시간 전.
“쟤 누구냐고! 쟤가 왜 널 엄마라고 부르냐고!”
불안하고 거친 음색으로 다그치는 봉수에게 지연은 모든 걸 내려놓고 차분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이의 이름은 줄리아나예요. 줄여서 줄리라고 불러요.”
“그런데?”
“줄리를 만난 건 뉴욕으로 유학 간 직후예요.”
지연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학비는 장학금을 받아 충당하고 생활비는 봉수가 대주겠다고 했지만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어마어마한 뉴욕의 물가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레스토랑 서빙이나 마트 캐셔도 있었지만 우연히 베이비시터 일을 한 후로는 계속해서 그 일만을 원했다.
아기들의 깊고 맑은 눈동자에서 죽은 동생 지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헤어져야 하는 사이란 걸 알기에 아기들을 사랑으로 대하되 정은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 결심을 무너뜨린 아이가 줄리였다.
한 살배기 줄리는 이 세상에 자신이 봐야 하는 사람은 오로지 지연 한 사람밖에 없다는 듯 깊은 사랑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지연을 보았다.
아빠는 한국인 변호사, 엄마는 미국인인데 두 사람은 줄리를 낳고 얼마 안 돼 이혼하고 엄마는 떠났다고 했다.
“한 살밖에 안 됐는데 엄마가 없다니…….”
동생 지우도 엄마가 지우 두 살 때 돌아가시며 엄마 없이 자랐다.
지우처럼 줄리도 엄마가 없다고 생각하니 짠한 마음이 들며 애착이 생겨버렸다.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5년을 키웠다.
어느덧 지연의 공부는 끝나가고 단 한 학기만을 남겼다.
그런데 난데없이 줄리의 아빠 문태규가 프러포즈를 했다.
“지연 씨, 몰랐겠지만 난 지연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좋아하긴커녕 서로 의미 있는 눈빛 한 번 교환한 적 없던 사람이 갑자기 프러포즈라니.
황당하기도 하고 오히려 불쾌해 지연은 베이비시터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줄리였다.
문태규 그 사람이야 평생 안 보고도 살 수 있지만 줄리는 그러기 힘들 것 같았다.
비록 돈 받는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베이비시터지만 5년을 오롯이 사랑의 손길로 키웠다.
그런 줄리가 그녀의 손을 잡고 ‘내니(nanny)가 엄마였음 좋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심장 안의 피가 거꾸로 솟아버리는 줄 알았다.
그래도 냉정하려 했다.
아이 때문에 아무나하고 결혼할 순 없으니까.
그런데 줄리에게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사고가 터져버렸다.
지우가 그랬듯 이 사고도 지연 자신 때문에 벌어진 사고였다.
지우는 학교 갔다 돌아오는 지연에게 오기 위해 당시의 베이비시터 손을 떨치고 달려오다 그만 마주 오는 차를 보지 못했다.
줄리의 사고도 마치 그때의 그 장면을 보는 듯했다.
베이비시터를 그만두긴 했지만 도저히 보고파 참을 수가 없어 찾아갔었다.
때마침 줄리는 악을 쓰며 지연을 찾다가 당시의 베이비시터와 함께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정말로 저 앞에 지연이 있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오다 그만!
줄리는 지우처럼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지연은 작은 숨을 헐떡거리며 병원 침상에서 죽음과 목숨을 건 힘겨루기를 하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혼자서 희미한 숨 한 번 쉴 수 없는 와중에도 줄리는 지연의 손을 놓지 못했다.
“내니…… 내니…….”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라곤 지연밖에 없는 것 같던 그녀의 애처로운 조막손.
그때 결심했다.
‘니 엄마가 되어줄게.’
맘에도 없는 문태규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어렵게 프러포즈를 받아들여줬더니 이번엔 태규가 돌변했다.
아예 줄리를 지연의 집에 맡겨놓고 찾으러 오지도 않았고 때로는 전화도 받지 않는 것.
그러더니 하루아침에 펑!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곧 데리러 올게. 잠시만 부탁해.
문자 하나 남겨두고.
영혼이라도 도둑맞은 사람처럼 바닥만 응시할 뿐 아무 반응 없던 봉수는 마지막 희망이라도 건지려는 듯 조심스럽게 흐린 눈동자를 올렸다.
“그래도 학교 졸업은…… 한 거지?”
지연은 아빠의 마지막 희망까지도 꺾었다.
“죄송해요.”
이런저런 일로 장학금을 놓쳤고 힘겹게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마련했는데 태규가 급한 일이 있다며 빌려달라 했다.
딱 삼 일만 쓰겠다는 돈은 돌아오지 않았고 사라져버렸다. 그와 함께.
“그래, 그랬다는 거지…….”
이야기를 들은 아빠는 화난 목소리를 내지도 화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연은 알 수 있었다. 아빠의 심장이 얼어붙었다는 걸.
그가 내뿜는 기운은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전 음침한 찬기가 돌듯 냉랭했다.
지연은 그녀의 애절함을 알리기 위해 읍소했다.
“아빠, 제발…….”
하지만 지금의 봉수는 딸을 위해 동태전을 만들던 그 따뜻한 아빠가 아니었다.
“그래서?”
짧지만 말에서 느껴지는 냉정함은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묻잖아, 그래서! 결혼 끝났음 끝난 거지 쟤는 왜 데리고 왔어!”
지연은 답답한 마음으로 가슴을 쳤다.
“맡을 사람이 저밖에 없잖아요.”
봉수는 휙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싸늘하게 고개를 돌렸다.
“듣고 싶지 않아. 애 아빠 연락 안 되면 애 엄마한테 연락해. 데려가라고.”
“이혼 후 연락두절이라고 했어요. 실제로 제가 5년 동안 키우면서 한 번도 애 엄마한테서 연락 온 적 없었어요.”
꾹 눌렀던 그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했다.
쾅!
봉수가 테이블을 두 손으로 내리쳤다.
“송지연, 너 미쳤어?”
테이블 내리치는 소리에 잠시 움츠러들었으나 지연은 물러나지 않았다.
어차피 줄리를 지키기 위해 각오한 일이었다.
“제가 없음 줄리 시설에 보내야 해요. 전 그렇게 못 해요.”
“허…….”
봉수는 실없는 표정에서 나오는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너무 기가 차서 눈물도, 한숨도 나오지 않으니까.
봉수에겐 딸 지연이 자신에게 남은 인생 전부였다.
맞벌이하는 부모를 둔 탓에 늘 목에는 열쇠를 걸고 다녔고 냉장고에 있는 찬 간식을 꺼내 먹으며 자란 지연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징징거리며 엄마, 아빠 맘을 불편하게 만든 적 없는 지나치게 성정이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그래서 빨간 지붕 집도 무리를 해서 샀던 것이다. 그녀에게 작은 보상이라도 해주기 위해.
그런데 그 집에서 지우가 태어나며 지연은 동생을 돌봐야 했고 엄마가 죽으며 동생의 엄마 역할까지 해줘야 했다.
그러려고 지우를 낳은 게 아닌데.
하지만 그녀는 이 또한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우가 자기가 받은 인생 최고의 선물이라며 예뻐했다.
지연은 그런 딸이었다. 너무 착해 오히려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그런데 지우까지 사고로 죽어버렸다.
하늘의 잔혹함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부인도 죽고 늦게 본 딸마저 죽으며 이제 봉수에게 남은 건 지연뿐이었다.
안 그래도 가슴 시린 자식, 그에게 지연은 소금이며 물이며 공기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그냥 그녀 자체가 존재의 이유였다.
그녀의 유학을 위해 가족의 추억이 고스란히 있는 집도 팔고 24시간 편의점에서 8시간 아르바이트생을 두는 것 외에 시린 뼈를 두드려가며 일을 했지만 하나도 힘들다 생각하지 않았다.
지연이 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든 원하던 교수가 되든 간에 뭐든 자리를 잘 잡을 수만 있다면 그깟 무거운 몸뚱이 새털이 되어 날아갈 것 같았다.
뭐가 힘이 들까? 존재의 이유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런데 뭐? 누구 아이를 키워? 피도 안 섞인 생판 모르는 남의 아이를?’
지 직장은? 지 결혼은? 지 미래는!
존재의 이유가 사라져버릴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이 이보다 클까?
지우를 보내버린 아픔이 너무 커 이런 일을 벌였다 해도, 이건 이해해줘선 안 될 일이었다.
딸의 미래를 위해선 아비도 물러날 수 없었다.
주름진 목에 파랗고 빨간 핏대를 세웠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걔가 시설에 가든 말든 왜 니가 데려 오냔 말이야!”
“아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저도 줄리…… 사랑해요.”
“뭐? 사랑? 그래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애 데려와 니 앞길 망쳐버릴 거야? 그럴 셈이야?”
“아빠, 줄리가 들어요, 제발 줄리 듣는 데서 그런 말씀은…….”
“듣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낼이면 보지 않을 아인데!”
“아빠. 제발 그만! 그럼 줄리가!”
지연은 봉수에게 소리치며 줄리가 있는 식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줄……리야?”
그녀가 없었다.
봉수도 식탁을 보았다. 그의 눈에도 좀 전까지 동태전을 먹던 여자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지연이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리야!”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며 뛰어나갔다.
.
.
.
줄리를 찾으러 온 동네를 뒤지다 가게 된 곳이 언덕 위 빨간 지붕 집이었다.
줄리는 검고 긴 속눈썹을 깜박거리며 자랑하듯 수현에게 말했다.
“이 사람이 우리 엄마예요!”
수현과 지연이 마주했다.
“당신은…….”
그 여자.
알파인 언덕에서 만났던 동생의 여자.
그에게 잊지 못할 미역국을 선사했던.
뉴욕에서 훅 가버린 후 그렇게 찾았었는데 이런 곳에서 보게 되다니.
지연을 바라보는 수현의 마음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그렇게 찾고 있었던 사람을 찾았다는 반가움과 잊고 있었던 고민거리를 다시 대면하게 됐다는 불편함.
복잡한 수현의 마음을 알길 없는 지연은 그녀에 관해서라면 숨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시선이 불편했다.
“누구…… 시죠?”
그녀는 수현을 알아보지 못했다.
줄리를 찾느라 아직 제대로 된 이성이 작동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금발 염색을 지운 수현은 한 달 전과는 상당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수현은 여전히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그 눈빛이 부담스런 지연의 음성이 뾰족해졌다.
“누구신데요?”
누구라고 답을 해야 하나, 수현이 고민하는 중 고맙게도 줄리가 대신 답해주었다.
“누구긴, 이 집 주인이지. 사실 누구냐고 물을 사람은 이 아저씨 아냐? 우리가 남의 집에 막 들어온 건데.”
그제야 지연의 눈빛에서 경계가 풀렸다.
“어머, 그러네.”
지연은 줄리를 안은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함부로 들어왔네요.”
수현은 얼떨결에 함께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지연은 그가 왜 같이 죄송하다고 하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빨리 이곳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의 집에 오래 있을 순 없으니까.
“아 예, 그럼 실례 많았습니다.”
안고 있던 줄리를 바닥에 내리고 손을 잡고 나가려는데 수현이 그녀를 붙들었다.
“잠깐!”
“…… 네?”
수현의 손에 붙들린 그녀가 몸을 틀었다. 그러다 그만 다리가 꼬여버렸다.
“어! 어!”
그런데 문제는 꼬인 다리가 아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정원의 잔디 사이사이, 청소 후 남아 있던 물기가 얼어 바닥이 얼음이었던 것.
“어! 어!”
지연의 두 다리가 얼음 바닥에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그녀는 두 팔을 동그랗게 휘저었고 그 바람에 수현도 잡았던 그녀의 손목을 놓쳤고 그녀도 줄리의 손을 놓쳤다.
버텨보려고 다리에 힘에 힘을 주었지만 역부족!
“으아~~~~~~~!”
다급한 괴성과 함께 막 뒤로 넘어지려는 찰나, 수현이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중심을 세워주기 위해 훅 당겼는데,
쭈우우욱-
얼음 위에서 그녀의 두 발이 미끄러지며 그만 쏙!
두 사람의 몸이 포개지며 숨결이 세로로 맞닿았다.
마치 뉴욕의 어느 아침처럼.
지연은 수현의 커다란 품에 안긴 채 그의 깊은 눈동자를 올려보았다.
이 눈빛, 이 표정, 이 향기……
“아…….”
그제야 지연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안고 있는 이 남자에 대한 기억이.
“혹시 뉴욕에서 뵀던, 저 그때 술 취했을 때 구해주셨던…….”
수현은 그녀를 꼭 안은 채 대답했다.
“예, 아, 예.”
그녀 역시 그의 품에 안긴 상태로 얼었던 표정을 활짝 폈다.
“반가워요! 어떻게 이런 인연이 있지?”
발까지 동동 구르며 좋아하는데 갑자기 줄리의 삐뚜름한 목소리가 달팽이관을 찔렀다.
“두 사람 왜 껴안고 있어요?”
수현과 지연의 고개가 동시에 아래로 내려갔다.
줄리의 말대로 그의 두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었고 그녀의 하체가 그의 허리에 조금의 빈공간도 없이 밀착해 있었다.
후다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놔주는 두 사람.
수현과 지연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줄리가 두 사람 사이에 들어오더니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두 사람 아는 사이예요?”
두 남녀의 입에서 동시에 대답이 나왔다.
“어, 아니!”
안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수현과 지연, 두 사람 다 서로를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금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여곡절로 하룻밤을 같이 보내긴 했지만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지연은 대답을 생략한 채 줄리의 손을 잡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아이를 외투도 없이 남의 집 마당에 오래 세워둘 순 없었다.
“아무튼 미국에선 감사했습니다. 지금은 실례였고요, 그럼 이만.”
가벼운 목례를 하고 나가려는데 이번엔 줄리가 버텼다.
“나 안 가.”
지연이 그녀의 팔을 다시 끌었다.
“무슨 소리야, 어서 가자.”
여섯 살짜리의 의지도 두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할아버지가 나 나가라 그랬잖아, 엄마 인생 망친다고. 나 안 가, 무서워.”
“줄리야, 그게 아니라…….”
“낼 미국으로 보내버린댔잖아, 나 미국 안 가, 가기 싫어.”
“줄리야!”
급기야 줄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나 엄마랑 여기 살 거야. 나 보내지 마, 응?”
“…….”
지연은 줄리의 팔을 잡은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발자국 뒤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수현의 머리에 여자의 상황이 그려졌다.
동생 애런 몬테규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그녀의 나라 한국을 찾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가족들은 아이만 미국으로 보내버리려 하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애초에 왜 미국에 갔는지 모르겠으나 미국까지 가서 미혼모가 되어 돌아온 딸을 반기는 집안은 없을 테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이 동생 대신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라니.
수현은 지연에서 그녀의 옆에서 검은 눈망울을 반짝이는 소녀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저 아이가 내 조카라는 거지?’
칠흑 같은 머리에 눈처럼 하얀 피부, 커다랗고 깊은 눈을 가진 서양인과 동양인 사이의 혼혈아.
금발인 애런과는 머리색은 다르지만 장난기 어린 눈매는 딱 애런이었다.
동생의 아이라고 생각하니 줄리를 바라보는 수현의 눈빛이 조금 전보다 촉촉해졌다.
아이가 긴 눈썹에 눈물을 머금은 채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나 나가라 그랬잖아, 엄마 인생 망친다고. 나 안 가, 무서워.’
조카가 겪었을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생각 같아선 당장 애런 몬테규가 자신의 동생임을 밝히고 싶었지만 섣불리 나설 순 없었다.
애런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리고 애런이 애 아빠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받지 못한 상황에서 여자 말만 덜컥 믿고 뭔가를 해줄 순 없으니까.
어쨌든 모든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그녀를 붙들어놓는 게 급선무.
수현은 주저앉아 완강히 버티는 줄리를 질질 끌고 가는 지연을 보며 집으로 잠깐 들어가자고 하려다…… 그냥 두기로 했다.
‘분명 이 근방에 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급하게 나왔다지만 둘 다 외투도 없이 저런 차림으로 있을 순 없었다.
대신 모녀가 완전히 집을 나간 후 자신도 문을 나서 따라가기로 했다.
이번엔 놓칠 수 없으니까.
.
.
.
‘도대체 언제까지 저럴 건지…….’
수현은 벌써 한 시간째 지연과 아이가 들어간 연립주택 주차장에 서서 2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연과 줄리의 뒤를 먼발치에서 따라가던 수현은 그들이 그의 집과 불과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골목의 낡은 2층짜리 연립주택에 들어가는 걸 보았다.
복도의 훤한 불빛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는 것까지 확인했고 정확한 호수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다시 찾아올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집을 알았으니 이제 돌아가자.’
어차피 로버트가 오기 전까지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집으로 돌아가려 발길을 돌렸는데, 갑자기 건물에서 골목을 울릴 정도의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미친 거 아냐! 절대 안 돼!”
방음이 잘되지 않는 주택에서 새는 소리는 라이브 쇼처럼 생생했다.
“아빠, 제발 부탁드려요. 전 이 아이 못 보낸단 말이에요.”
“당장 낼 비행기 표 사서 데려다주지 못해?”
“아빠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데려다줘요!”
여자와 여자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의 말다툼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가! 너 같은 딸 필요 없으니 나가!”
딸을 내쫓으려는 저 소리가 불안하기도 하고,
“자꾸 줄리 앞에서 그러시면 저 정말 나갈 거예요.”
맞서는 줄리 엄마 목소리도 심장 조이게 만들고.
그래도 설마 진짜로 내쫓겠어, 싶은데…….
쾅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리더니 지연이 나왔다.
한 손엔 노란 테이프가 붙은 커다란 짐, 한 손엔 줄리를 잡고.
지연은 자기 덩치만 한 짐을 힘겹게 들어 계단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 울고 있는 줄리를 번쩍 안았다.
복도 창 너머로 그녀가 내려오는 걸 보고 있던 수현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진짜…… 나왔어?”
수현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겨울 하늘은 밤을 서둘렀다.
공기는 쌀쌀했고 군데군데 가로등이 있었지만 주택가 골목엔 이미 어둠이 점령했다.
“이 어둡고 추운 날 어딜 가려고…….”
주차장 한편에서 그녀와 아이의 행보를 지켜보고만 있는데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어디 가?”
“어디든 우리 갈 데 없겠니?”
엄마의 막연한 대답에 아이는 근심 섞인 목소리를 냈다.
“엄마 한국 돈 없다고 아까 그랬잖아. 달러도 백삼십 불 남았다고 안 그랬어?”
지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성난 발짓으로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먼발치에서 듣고 있던 수현은 지연의 침묵이 맘에 걸렸다.
‘진짜로 돈이 없는 거야?’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따르는데 아이가 갑자기 작은 손으로 지연이 끌고 있는 짐을 잡았다.
“그럼 같이 끌어....... 영차, 영차, 이렇게 하는 건가?”
작은 손으로 끌기 힘에 겨우니 줄다리기를 하듯 구령을 외쳤다.
그녀의 행동에 서두르던 지연의 발걸음이 멈췄다.
잠시 줄리를 바라보다 성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니가 그러면 내가 더 힘든 거 몰라? 하나도 도움 안 되거든!”
그녀는 커다란 짐에서 꾹 쥐고 있는 줄리의 손을 뗐다.
다시 한손엔 짐, 한손엔 줄리를 쥐고 나아가는데 이번엔 줄리가 미니마우스가 들어간 자기 목도리를 푸르기 시작했다.
“그럼 이거 할래? 엄마 춥잖아.”
언 손으로 매듭을 풀려니 잘 되는 듯 헛손질만 해댔다.
지연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그녀는 줄리의 목도리를 잡고 오히려 더 꽁꽁 동여맸다.
“잘난 척하지 말고 가만 안 있을래? 너 때문에 더 늦어지잖아!”
그때 줄리의 코에서 하얀 물이 훅 떨어졌다.
“추릅!”
줄리는 엄마가 볼 새라 급하게 코를 먹어버렸다.
지연은 가는 눈으로 줄리를 째려보았다.
“이것 봐, 지가 더 추우면서.”
오히려 입고 있던 빨간 점퍼를 벗어 아이의 어깨에 걸치고 벗겨지지 않게 점퍼의 두 팔을 동여맸다.
그리고 줄리를 한손으로 번쩍 안아 올렸다.
하지만 외투로 입은 패딩 때문에 아이가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녀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맨손이 아무래도 덜 미끄러질 거라 판단한 듯.
다시 고쳐 번쩍 안아들고 남은 한 손으론 무거운 짐을 잡았다.
다리는 후들후들, 입에선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운 모래 짐을 지고 가듯 둔탁했지만 그녀는 줄리도, 무거운 짐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한 발, 한 발 전진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지연의 어깨에 보드라운 코트를 훅 덮었다.
“어?”
그는 빨간 지붕 집의 남자 수현이었다.
그도 추위에 솜털까지 경직된 얼굴이었지만 전혀 춥지 않은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갑시다, 우리 집으로.”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지연의 어깨를 스쳐 커다란 보폭으로 앞서갔다.
뭐지?
영문을 모르는 지연은 수현이 걸쳐준 코트를 얼떨결에 쥔 채 마른 나무처럼 서 있었다.
몇 발자국 나아간 그가 뒤돌아 명령하듯 말했다.
“추워요, 가자니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지연은 그의 뒷모습만 좇는데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모든 짐을 벗어버린 것처럼.
‘어?’
어느 틈에 가져간 걸까?
넓고 커다란 등을 가진 남자는 조금 전까지 그녀가 힘겹게 쥐고 있던 것들을 대신 들고 가고 있었다. 뚜벅뚜벅.
오른 손엔 줄리를 안고 왼손으론 짐을 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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