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 말고 니 형-2화 (2/77)

제2화. 너를 향한 그린 라이트

2018.02.07.

코끝을 간질이는 숨결이 누구 것인지도 모를 만큼 가까이 마주한 두 사람.

지연은 계속해서 입을 벌린 채 팀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흐렸던 시야가 확보되며 그녀는 자신이 떨어진 곳이 낯선 남자의 품이란 걸 확인하고는 또다시 옆으로 굴렀다.

쿵!

차가운 대리석으로 떨어지며 통증이 올라왔지만 지체 없이 벌떡 일어나 소파 뒤로 내달렸다.

팀도 마찬가지. 그녀가 자신의 몸에서 벗어나자 튕겨 오르듯 일어나 몸을 툭툭 털었다.

그는 부스스해진 머리를 긴 손가락으로 넘긴 후 두 손을 허리에 꽂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그렇게 제 위를 덮치시면…….”

말을 했다가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 그렇게 깨웠는데도 안 일어나시면 어떡합니까?”

지연은 꽃을 열 개는 꽂았을 것같이 산발된 머리를 심하게 가로저었다.

멀리 나가버린 이성과 기억을 소환해내고 싶었다.

그래도 생각이 안 나는지 영혼이 나간, 텅 빈 표정으로 팀을 보았다.

“제가…… 여기 왜 있죠?”

팀은 배려라고는 하나도 없는 짜증과 냉정함이 섞인 목소리로 받아쳤다.

“정말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의 냉담에 잔뜩 움츠러든 지연은 혼잣말인지 팀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시선을 떨궜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

그녀의 황망한 표정에 팀은 두 팔에 기운이 쭉 빠지는 허무함이 밀려왔다.

파파라치들 앞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내 동생 애런 몬테규를 부르더니 모른 척해?

동생의 아이를 키웠다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 지르더니 기억이 안 나?

집에 와서 그렇게 깨웠는데도 안 간다고 돌덩이처럼 버티더니 순수한 척?

“저기 이보세요!”

팀은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따져 물으려다……

저도 모르게 굳었던 입매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

순간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그녀의 뇌쇄적 모습 때문에.

‘설마 지금…… 예쁜 거야?’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는 모습이었다.

따지고 보면 도저히 빛날 수가 없는 형상이다.

취중에 뻗어버려 단발인지 긴 머린지도 모를 무심히 헝클어진 머리, 옅지만 다 뭉개져버린 화장, 눈동자는 흐렸고 가쁜 숨에 입술은 야무지지 못하게 살짝 벌어졌다.

햇빛 때문인가?

소파 뒤에 숨은 그녀는 맨해튼 62층 통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강한 햇살을 등지고 있다.

그 빛을 다 빨아버린 건지 정수리로 시작된 그녀의 머릿결은 한없이 매끈했고 오버핏의 하얀 셔츠가 빛을 흡수하며 역광이지만 그녀의 하얀 피부를 눈부시게 만들어줬다.

흐트러져 한쪽으로 쏠린 셔츠로 왼쪽 쇄골이 드러났고 셔츠를 뚫고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그녀의 볼륨 있는 가슴이 선명하게 선을 그렸다.

두근두근.

그의 심장으로부터 오묘하고 작은 울림이 느껴지고 있다.

“하…….”

자기도 모르게 낮은 탄성으로 내뱉었다가……

그냥 두 입술을 꾹 여미었다.

잠시 혼미해진 그의 머리를 다행히 이성이란 놈이 잡아끌었다.

‘애런이 만났던 여자니 당연히 예쁘겠지 뭐. 그동안 만났던 모델들과는 분위기가 다르긴 하지만.’

이성이란 놈은 대신 어제 그녀가 외쳤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나…… 그 새끼 애를 키운 여자다, 왜!’

그렇다면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여자.

어찌 보면 집으로 데려온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뒀다면 어제 파파라치들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지 모르니까.

팀은 지연을 조심스럽게 대하기로 했다.

먼저 얼음처럼 차가웠던 표정을 풀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랑 얘기를 좀 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일단 제 이름은…….”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데,

“어머나! 내 바지!”

갑자기 그녀가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팀의 말을 먹었다.

지연은 그제야 자신이 꽤 긴 기장의 셔츠만 입고 있을 뿐 하체를 시원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

소파에 숨은 채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팀을 보았다.

팀은 그녀의 시선을 받아치며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제가 벗긴 거 아닙니다. 어제 주무시면서…….”

그의 말이 끝나기 전 그녀가 말을 잘랐다.

“알아요, 안 그러신 거.”

그러더니 다람쥐처럼 빠른 몸짓으로 바닥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청바지를 낚아채 소파 뒤로 숨었다.

잠시 후 청바지를 입고 일어선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로 자백하듯 중얼댔다.

“죄송합니다. 제 술버릇이에요, 자다 바지 벗는 거.”

“…….”

참 말문 막히게 만드는 여자네.

뭐 어쨌든 다행이었다, 스스로 벗은 걸 알고 있으니.

안 그랬음 동생의 여자를 건드리려 한 쓰레기로 몰릴 수도 있었으니까.

옷차림 정리도 됐겠다, 이젠 정말 애런과 저 여자 사이를 정리해볼 시간이었다.

“이보세요, 아가씨. 일단 우리 서로 자기소개를 해봅시다. 제 이름은…….”

위이이이이잉.

그런데 이번엔 그의 뒷주머니의 진동이 그의 입을 막았다. 전화였다.

누구로부터의 전화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었다.

“잠시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그러다 다시 말을 바꾸었다.

“아니, 저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커피 한 잔 사 오도록 하죠.”

지연을 거실에 둔 채 팀은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나왔다.

저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의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군가와의 긴 의논이 필요하기 때문에.

.

.

.

팀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지연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몸의 기운을 뺐다.

어제 일이 조각처럼이라도 떠오르면 좋으련만 절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뜨니 처음 보는 남자의 가슴팍?

‘설마 홧김에 저 남자랑!’

지연은 스스로의 몸을 아래위로 살펴보았다.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한 느낌이 있을까 싶어.

다행히 머리만 쥐어뜯긴 것처럼 아플 뿐 몸엔 아무 느낌이 없었다.

아까 남자에게도 말했지만 청바지는 분명 그녀 스스로 벗었을 것이다.

술만 취하면 하의를 벗는 게 고칠 수 없는 버릇이니까.

아무 일이 없었다는 전제하에 자기가 왜 이 집에 왔을까 차근차근 어제 일을 떠올리며 유추해보았다.

일단 문태규가 사라진 걸 알고 망연자실했지.

한인 타운의 한 주점에서 치사량의 술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고 뉴저지로 갔다가 바람을 쐬러 알파인 언덕까지 걸었지.

그 자식이 자주 데려가던 뷰포인트에 가서 그 자식 이름을 불렀고.

그 자식 이름을 불러서, 그 자식 이름을 불렀는데……

“…….”

그 자식 이름을 불렀다.

그 뒤론 까만 보자기로 머리를 동여맨 듯 기억이 없다.

하지만 대충 나오는 그림은……

‘술 마시고 공원에서 뻗었는데 지나가던 남자가 할 수 없이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모르는 여자를 남자가 나쁜 목적도 없이 자기 집으로 데려온 이유는?

생각해보니 그는 한국사람.

서구형의 큰 체격, 금발 머리, 서투른 한국 발음이었지만 그는 분명 까만 눈동자를 가진 한국 사람이었다.

술에 취해서 알파인 언덕 어딘가에 노숙자처럼 쓰러져 있는 고국 동포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

“고마운 사람이네. 오면 제대로 인사를 해야겠다.”

그때 그녀의 청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줄리 언제 데리고 갈 거야? 어젯밤에 온다고 안 했어?

로라 아줌마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맞다, 줄리!”

줄리 소리에 지연의 두 다리가 번쩍 힘을 내며 바로 섰다.

줄리를 옆집 아줌마한테 맡겨놓은 채 하룻밤을 그냥 보내버린 것이다.

밤새 나를 얼마나 찾았을까?

지연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소파 위에 얌전히 올려 있는 핸드백을 들었다.

길거리 노숙자가 될 신세를 집으로 데려와 챙겨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는 전하고 싶었지만 맘 편히 그가 커피를 사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가려고 막 집 안을 나서려는데,

“우와!”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까는 함께 있는 남자만 신경 쓰여 이 집이 어떤 집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상당히 고급 콘도였다.

굳이 창 쪽으로 가보지 않아도 벽의 한면 전체를 이루고 있는 통유리 너머로 이곳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맨해튼의 중심이구나.

록펠러 센터부터 뉴욕의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빌딩숲 중심에 있는 게 분명했다.

저 멀리 파란 하늘과 구름이 맞닿을 듯 가까운 걸 보니 상당히 높은 층임도 확실하고.

침실이 따로 없는 원룸이긴 했지만 이 정도 환경의 집을 빌리려면 최소한 한 달에 렌트비만 만 불은 나갈 것이다.

“아, 정말 멋진 집이다.”

통유리창 앞으로 달려가 박물관에 진열된 명품 그림 보듯 맨해튼의 풍경을 감상하는데 저 멀리 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니 또 줄리 생각.

그래, 내가 지금 남의 집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감사의 인사도 못 하고 가면서 집 구경은 무슨.

지연은 아름다운 맨해튼의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제야 오장육부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지 타들어가듯 목이 말랐다.

염치없지만 물은 한잔하고 가야 할 것 같아 하얀색 벽으로 경계가 나눠진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응? 저건 뭐지?”

그녀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저것이 왜 저런 모습으로 있을까 생각하다,

“이거다!”

그녀는 손가락을 튕기며 입꼬리를 쓱 위로 올렸다.

이거면 술 취한 자신을 챙겨준 사람에게 소박한 보답은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커피를 사 오겠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간 팀은 계속해서 울리는 로버트의 전화를 받았다.

“어, 로버트 나야.”

로버트 알리. 30년 넘는 몬테규 가의 집사 겸 고문 변호사였다.

로버트가 다급하게 응답했다.

“어제는 전화를 못 받아 죄송합니다. 하루 종일 기자들에게 시달리다 뻗어버렸습니다.”

팀은 어제 그녀를 소파에 눕힌 후 로버트에게 전화를 했었지만 받지 않았다.

“어, 이해해. 나도 알면서 전화할 수밖에 없었어. 큰일이 생겨버렸으니까.”

“큰일이라면 혹시…….”

로버트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팀은 마치 로버트가 보고 있는 것처럼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애런의 일이야. 그때 그 기자 말이 사실인 것 같아.”

“하……. 절대 아니기만 바라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로버트는 팀이 말하는 그 ‘큰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최근 심각하게 고민하던 일이었으니까.

무거운 침묵이 잠시 휴대폰 사이를 오갔다.

깊은 생각을 끝낸 로버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여자를 제가 만나봐야겠습니다. 여자의 연락처를 알고 계십니까?”

“지금 맨해튼의 내 집에 있어. 이야기가 좀 긴데……. 아무튼 여자를 데리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네요, 기자들보다 도련님이 먼저 여자를 발견하신 건.”

“어떻게 하면 되지?”

“제가 갈 때까지 여자를 붙들고 계십시오. 만약 놓치면 여자가 기자들을 만나거나 줄리아나 본사, 또는 몬테규 본가로 찾아가 협상을 하려고 할 겁니다.”

“그래, 꼭 붙들고 있을 테니 빨리 와.”

팀은 로버트와의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버트의 말마따나 그녀를 붙들고 있어야 하니까.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두 잔의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서둘러 콘도로 올라왔다.

그런데 현관문 앞에서부터 이상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게 무슨 냄새야?”

문을 여니 본격적인 냄새가 그를 덮쳤다.

이미 온 집 안의 공기 안에는 이 고소하면서도 짠 내음 물씬한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팀은 강아지처럼 코끝에 힘을 주고 킁킁거리며 냄새가 흐르는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데 부엌에 들어와 냄새의 원인을 확인하고는 얼굴에 싸한 소름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건!”

찾고 찾다 포기했던 무언가를 찾았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라고 할까?

한 발자국씩 천천히 다가가 아직도 인덕션 위에서 약하게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열었다.

예상이 맞았다.

“미역국.”

옆에는 직접 쓴 메모가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쓴 듯.

-아이가 기다리고 있어 급하게 가야 했습니다. 폐 끼친 게 죄송해 뭐라도 보답하고 싶었는데 부엌을 보니 미역국을 끓이다 실패하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멋대로 있는 재료로 만들어봤습니다. 아무튼 부족한 솜씨지만 맛있게 드시길 바랍니다.

미역국을 만들다 실패했다는 그녀의 추측은 맞았다.

며칠 전 팀은 미역국이 너무 먹고 싶었다.

먹어본 지 이십 년이 더 된 음식이라 맛도 기억이 안 나는데 무작정 미역국이란 게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뉴저지 저택의 요리사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예전에 몇 번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그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라리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한국 마트에서 재료를 사고 한국 요리책을 구입해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이 공간으로 왔다.

책을 펼쳐놓고 레시피대로 만들어보려 시도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실패한 재료들을 싱크대에 그대로 방치한 채 어제 급하게 몬테규 회장의 기자회견 때문에 나가느라 치우질 못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요리를 완성해놓다니.

“제대로 된 미역국은 이런 냄새가 나는구나.”

수저를 들고 조심스럽게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목구멍으로 미역국이 넘어가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스르르 눈을 감을 뿐.

음식의 맛이라는 게 똑같은 그림 찾기처럼 두 개의 음식을 가지고 이건 똑같다, 저건 다르다, 따질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미역국을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먹고 싶었던, 상상속의 그 미역국과 굳이 비교한다면,

정확히……

똑같았다.

*

한 달 후.

“우리 짐 저거 아냐?”

줄리는 작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트랙을 돌고 있는 지연의 짐을 가리켰다.

“어! 어! 저거 우리 짐 맞아!”

지연은 얼른 트랙으로 달려가 노란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커다란 이민 짐을 바닥에 내렸다.

주변의 짐들과 지연의 짐을 슬쩍 번갈아보던 줄리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남들은 폼 나는 트렁크들 들고 가는데 우리 짐은 왜 이래? 싼티 나.”

지연은 주먹을 쥐고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주는 시늉을 했다.

“이게 얼마나 짐이 많이 들어가는데! 평소엔 작아 보이는데 지퍼 3단만 올리면 사람도 들어갈 정도로 커진다고. 멋지지?”

“치이, 참 멋도 있겠다.”

“나도 내가 5년 만에 오는 한국에 이런 모습으로 올 줄 몰랐다. 성공해서 고급 트렁크 하나 들고 우아한 모습으로 올 줄 알았다고!”

“나도 쪽 팔린다 뭐. 말로만 듣던 한국에 이렇게 돼지처럼 뒤뚱거리는 옷을 입고 오다니.”

줄리는 차이나타운에서 나름 백 불 넘게 주고 산 노란색 롱패딩을 쌀쌀맞은 손길로 들어 올렸다.

지연은 그녀의 투정이 귀여워 살짝 미소 지었다가 다시 정색을 하고 혼내듯 언성을 높였다.

“투정 그만 부리고 지금부터 내 손 꼭 잡고 따라와. 여기서 길 잃어버리면 넌 정말 끝이야.”

지연의 협박에 줄리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조그마한 손을 쑥 올렸다.

한 손엔 헝겊으로 된 싸구려 이민 짐, 다른 한 손엔 여섯 살 난 여자아이 줄리의 조막손.

어느 것 하나 놓칠세라 두 손에 힘을 꼭 주고 지연은 씩씩한 걸음으로 공항 밖으로 향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새벽 산책을 나온 듯 크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음~ 한국 냄새. 5년 만이다.’

줄리도 한국에 온 게 좋은지 지연과 잡고 있던 팔을 자기 머리꼭지까지 흔들었다.

지연과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한 눈웃음을 보이며 까르르.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한국에 들어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뭘 하든 지옥 같던 뉴욕만큼 끔찍할까.

버스를 타기 위해선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때마침 횡단보도에 초록 신호등이 켜지며 안내원이 길을 건너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발걸음을 허락하는 그린 라이트.

마치 앞으로의 그녀 인생 같아 기분이 하늘 위로 상승했다.

그녀의 당당한 눈빛이 심장을 향해 소리 질렀다.

그래, 잘 돌아왔어 송지연!

이제부터 넌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거야.

그녀의 심장도 힘을 내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인천 공항의 한 활주로에도 그린 라이트가 켜졌다.

허공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개인 전용 비행기의 착륙을 허락하는 그린 라이트였다.

최신식 기종의 비행기는 잘 정돈된 활주로에 무리 없이 미끄러졌다.

팀은 내릴 준비를 시작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꼭 해야 하는 일, 모자를 푹 눌러쓰고 까만 선글라스를 쓰는 것.

그 모습을 본 로버트가 살짝 웃었다.

“한국엔 기자들도 파파라치들도 없을 겁니다. 줄리아나 그룹의 직원들도 모를 정도로 도련님 오시는 건 일급비밀이니까요.”

모자를 누르고 있던 팀의 손이 무안했다.

“아, 그런가?”

하긴, 새엄마 몬테규 회장과 고문 변호사 로버트 말고는 그의 한국행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팀은 오히려 모자를 벗고 선글라스를 가방에 넣었다.

모자를 벗으니 금발의 염색을 지운 그의 검은 머리가 드러났다.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난 이제 자유다.’

로버트 말대로 비행기에서 내린 그를 카메라로 찍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건 그를 알아봐서가 아니었다.

‘와, 스타일 죽인다.’

그의 모델 같은 비주얼과 고급스러운 니트와 바지, 캐시미어 코트를 보고 하는 말들.

자유로움을 느끼니 발걸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공항 건물에서 나온 팀은 복식 호흡을 하듯 깊게 숨을 들이켰다.

“흠…… 한국 냄새가 바로 이런 거라는 거지?”

여섯 살 때 한국을 떠났으니 26년 만?

평범한 한국 냄새가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춤이라도 한번 추어볼까?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데?

흥이 오른 그를 보며 길 건너편에서 기다리던 로버트가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세요, 진수현 도련님!”

진수현 도련님?

분명 로버트가 그를 팀 몬테규가 아닌 진수현이라고 불렀다.

진수현, 그가 미국에 오기 전 여섯 살 때까지 불렸던 이름이다.

‘그래, 이제부터 나는 팀 몬테규가 아니다. 진수현이다.’

그때 횡단보도에 초록 신호등이 켜졌다. 발걸음을 허락하는 그린 라이트.

마치 앞으로 한국에서 펼쳐질 진수현이란 남자의 인생 같아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시작되었다.

팀 몬테규가 아닌,

진수현의 인생이.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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