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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외전 8 - 완벽한 행복 (88/88)

88. 외전 8 - 완벽한 행복

눈 화장을 끝낸 수안이 얼굴 각도를 이리저리 틀어대며 세심하게 확인을 했다.

흰자위에 붉은 기가 조금 남아 있었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가린 화장이 제법 그럴듯했다.

“이건 좀 너무 노골적인가?”

거울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던 수안이 헤어밴드를 풀고 머리칼을 정돈해 가슴 앞으로 드리웠다.

가리는 용도보다는 효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용도에 가까운 엠파이어스타일의 미니드레스는 임신으로 인해 두루뭉술해진 허리 라인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섹시해 보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거짓말에 서툰 그녀로선 도훈이 뭔가를 눈치채고 꼬치꼬치 캐묻는 일이 없도록 선수를 쳐야 했다.

“흠흠, 이거 은근 긴장되네!”

몸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없는 주름까지 펼 듯, 드레스 자락을 쓸어내리던 수안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드레스룸을 벗어났다.

거실을 지나쳐 현관 앞에서 서성대던 수안은 차가 들어왔다는 신호를 확인하고 주차장 쪽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도훈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터무니없이 두근댔다.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두근거림이 그의 어머니를 찾아갔던 일을 들킬까 봐서인지, 간만의 시도가 불러일으킨 흥분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마침내 도훈이 활짝 열린 출입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수안은 첫날밤을 맞이하는 새색시처럼 얼굴만 짙게 붉혔다.

그런 그녀를 마주한 도훈은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더 다가서지도 못하고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어삼킬 듯 뜨겁게 바라보다가 거친 숨만 토해냈다.

“내 생일 아직 좀 남았는데.”

“풋!”

“혹시 나 뭐 잘못했나? 벌주려는 의도면 너무 지나치다 싶은데.”

“그래서 싫다고요?”

수안이 도도한 고양이처럼 턱을 치켜들었다.

팔랑거리는 속눈썹이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사람 애간장을 녹이기에 딱 좋았다.

도훈은 먹잇감을 마주한 맹수처럼 우아하고 느긋하게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싫을 리가. 이런 벌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달게 받아야지.”

나직하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인 도훈이 곧장 입술을 삼켰다.

부드럽게 감기는 천 위로 도훈의 손이 뜨겁고도 끈적하게 미끄러졌다.

무람없이 헤매던 손이 습관처럼 볼록한 배 위에 안착했다.

“이 녀석, 잠잠하네.”

도훈이 입술을 완전히 떼지도 않고 말을 하는 바람에 수안의 입술도 함께 달싹였다.

“날 닮아서 똑똑하거든요. 아빠와 엄마를 위한 시간이라는 걸 아는 거지.”

도훈의 입술이 목에 닿았기 때문에 수안은 키득거림과 야릇한 신음이 절묘하게 뒤섞인 탁한 목소리로 말을 간신히 끝맺었다.

“흠, 그럼 그 시간 알차게 활용해 봐야겠네.”

“꺄아아!”

도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이 답삭 들렸다.

놀람보다는 즐거움이 섞인 비명 뒤로 또르르 구르는 듯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무거울 텐데.”

수안을 안은 채 가뿐하게 걸음을 옮기던 도훈의 눈썹이 삐죽 치솟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마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따지는 듯한 표정이라, 수안은 배시시 웃음부터 머금었다.

“웃어? 내 마누라가 나를 아주 물로 보셨다 이건데. 요즘 내가 너무 얌전히 재웠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면서도 숨결 하나 흩트리지 않고 빈정대는 도훈의 말에 수안은 조금 억울해져서 입을 삐죽거렸다.

얌전히 재웠다는 도훈의 말에는 상당히 어폐가 있었다.

물론, 임신하기 전을 생각하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임신 초기를 제외하고 수안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거의 매일 안았으니 절대로 얌전히 재웠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얌전히 재운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수안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리자, 도훈이 그녀를 좀 더 바투 안으며 물었다.

“아니이, 아무래도 콩이랑 두 몫이니까.”

“흠, 이대로 집을 한 세 바퀴쯤 돌아봐?”

도훈의 말이 그저 과시가 아니라는 건 수안이 제일 잘 알았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그는 여전히 매일 체력단련에 힘썼으며, 군살 없는 완벽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집 세 바퀴는 됐고, 그냥 침대로 가요.”

수안이 탄탄한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거친 숨결과 뒤섞여 수안의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그래서 도훈이 곧장 침실로 향할 거라는 데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았는데, 막상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은 곳은 거실의 소파 위였다.

“그전에 대화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엉뚱한 곳에 내려앉았다 당황했던 수안이 이제는 다른 이유로 멈칫했다.

“무슨 대화?”

“글쎄, 왜 이렇게 예쁘게 꾸몄는지 같은 거? 아니면, 생전 않던 짙은 눈 화장에 관한 거라도 좋고.”

수안이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주춤 물렸다. 하지만 도훈이 긴 다리로 장막을 치듯 보듬고 있어서 그의 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왜 울었어?”

이렇게 딱 물으니, 어떻게 발뺌 좀 해보려고 또르륵 굴러가던 눈동자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울긴 누가……. 하아, 표시 나요?”

시무룩하게 처진 눈꺼풀 위를 도훈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말이라고.”

“30분만 더 지났어도 말짱해 보였을 텐데.”

“그래도 알았을 거야.”

“에이, 아닐걸. 지금도 너무 가까이 있지만 않았어도…….”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모를 수가 없잖아. 너만 보고 너만 신경 쓰는데.”

이래저래 얼버무려 보려고 어설프게 짓고 있던 수안의 미소가 나직하지만 힘 있는 도훈의 음성에 서서히 사위었다.

하여튼, 진지함이 일상인 그녀의 남편께서는 완전 오글거리는 멘트도 엄청 근엄하게 들리도록 하는 재주가 있었다.

“으으, 나 어떡해. 손가락 완전 곱은 거 봐.”

어깨를 부르르 떤 수안이 손가락을 반쯤 구부려 도훈의 눈앞에 들이댔다.

“그런 오글거리는 멘트는 쫌, 장난스럽게 하면 좋잖아요.”

“장난이 아닌데 왜 장난스럽게 하나.”

“아우, 콩아, 아빠 완전 느끼하다, 그치?”

“콩아, 엄마의 중상모략은 못 들은 거로 해야 한다. 그리고 엄마한테 자꾸 말 돌려봐야 소용없다는 얘기도 좀 전해주고.”

대화는 도훈의 의지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뭐 하나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영부영 넘어가길 바란 게 잘못이었다.

얕은 한숨을 뱉어낸 수안이 탄탄하고 널찍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도훈은 그렇게 안겨오길 기다렸던 사람처럼 그녀를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고 양팔로 포근히 감쌌다.

“오빠 어머니를 보고 왔어요.”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잠깐 멎었을 뿐, 도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만난 거 아니고, 그냥 먼발치에서 잠깐 보기만 했어.”

도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녀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 중 그 어느 것도 그에게 전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딸이 있더라고요. 두 사람이 토닥거리는 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나서, 그래서 좀 울었어.”

“그래.”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이던 도훈이 너무나 익숙해서 적잖이 안심이 되는 한마디를 툭 뱉어냈다.

“오빠?”

“응?”

“쓸데없는 짓 해서 미안해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오빠가 너무 오냐오냐하니까 욕심만 늘어서 보탤 필요 없는 것까지 탐냈어.”

“그래.”

짤막한 말 뒤에 도훈의 입술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수안아, 나는 너와 함께한 이후로 완벽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볼록한 배를 감쌌다.

“게다가 앞으로는 더 완벽해질 테고.”

절로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말에 수안은 고개를 끄덕이듯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아프게 부모를 잃었고, 또 부모로 인해 아픔을 겪었던 그와 그녀는 그 누구보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할 터였다.

어쩌면 정말 서툰 부모라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마저도 그들에겐 더없이 완벽한 행복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기에 뭔가를 더 보탤 필요는 없었다. 그게 이미 끊어진 인연임에야 더 말해 무엇 할까.

정말 괜한 욕심을 부려서 상처받고 마음 상한 것이 더없이 한심하고 민망하게 느껴졌다.

“피곤해?”

자괴감에 점점 더 품으로 파고들기만 하는 수안을 조금 떼어낸 도훈이 세심하게 안색을 살폈다.

수안은 냉큼 고개부터 저었다.

“그럼 이제 이 예쁜 포장지 벗겨봐도 되지?”

어느새 열망으로 짙어진 도훈의 눈이 드레스 위로 드러난 뽀얀 살결 위를 훑고 있었다.

“포장지만 예쁘다고요?”

“글쎄, 일단 좀 벗겨봐야 알겠는데.”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도훈을 톡 친 수안이 앙큼하게 눈을 흘겼다.

밉다고 쳐다보는데도 도훈은 그저 예뻐 죽겠다는 듯 기어코 입술을 머금었다.

“이제는 좀 질릴 때도 됐는데 말이야. 점점 더 예뻐지면 어쩌라는 건지…….”

한숨처럼 말을 토해낸 그가 드레스의 어깨 스트랩을 내리고는 잔약한 어깨 위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 한쪽 입꼬리를 멋들어지게 끄집어 올렸다.

“아무래도 난 포장을 않는 쪽이 더 마음에 들어.”

“으, 완전 능글맞은 아저씨 같아.”

“그래서, 싫다고?”

“아니, 엄청 많이 사랑한다고.”

수안이 감미롭게 속삭였다. 도훈과 수안의 입술이 엇비슷한 형태로 곡선을 그렸다. 더없이 사랑스러운 시간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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