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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외전 4 - 사모님은 인턴 (2) (84/88)

84. 외전 4 - 사모님은 인턴 (2)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에이, 왜 모른 척이야?”

정 대리가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툭 쳤다.

흠칫 놀란 수안이 화들짝 물러나자,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정 대리가 그만큼 또 다가섰다.

“수안 씨 다음 달이면 계약 만료지? 요 며칠 안색이 안 좋은 것 같던데, 그것 때문에 고민돼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요, 아닌데요.”

“에이, 나한테는 그냥 말해도 돼. 이제 돈 나올 구멍은 없고, 취직이 금방 될 것 같지도 않고, 걱정되는 거야 당연하지.”

“아닌데요. 저 돈 많거든요.”

“아이고, 존심 상했구나?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왜 하나?”

정 대리가 명품과는 거리가 먼 수안의 에코백을 비릿한 눈길로 쳐다보며 툭 건드렸다.

백 같은 건 그냥 집에 있는 거 들고 다니는 건데, 뭐 한다고 일부러 에코백까지 사서 구색을 맞췄을까.

매사에 완벽을 기하는 이놈의 성실함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미처 몰랐다.

“나 돈 없는 거가지고 트집 잡는 그런 옹졸한 사람 아니다. 수안 씨 처지 때문에 나한테 말도 못 하고 가슴앓이 한 거 다 알아.”

“제가 무슨 말을 못 하고 가슴앓이를 했는데요?”

“흐흐, 수안 씨 나 좋아하잖아.”

“아니요. 미쳤……. 암튼 아니거든요.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참 나, 자존심 세울 필요 없대도 그러네. 그렇게 철철 다 흘려놓고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해봐야 아무 소용 없거든.”

“흘리긴 제가 뭘 흘렸다고 그래요?”

답답하고 화가 나 수안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회사 정문을 코앞에 두고 걸음도 멈춰 버렸다.

“수안 씨 은근 내 일 다 떠맡아주잖아.”

“거야 정 대리님이 자꾸 떠넘기니까 하는 수 없이 한 거잖아요.”

“다른 사람 건 안 갖다 줘도, 내 커피는 꼬박꼬박 대령하고.”

“기획1팀에서 커피 심부름 시키는 사람은 정 대리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 수안 씨 부끄럽구나! 때와 장소가 좀 그렇긴 하지?”

미친. 이보세요, 지금 내 앞에 있는 댁이 제일 문제거든요.

“퇴근하고 만나는 게 좋겠다. 그치?”

“정 대리님, 뭔가 단단히 착각한 거 같은데요, 저 결혼했거든요.”

더 이상은 듣고 있기도 짜증 나는 데다, 여기서 더 나가면 도훈에 대한 도리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수안이 냅다 질러 버렸다.

하지만 이 정도 충격이면 정 대리도 더 이상은 아무 말 못 할 거라는 수안의 생각은 무참하게 뭉개져 버렸다.

소문을 양산하는 데 최적화된 정 대리는 어떤 이야기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하는 데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걸 미처 모르고 한 크나큰 오산이었다.

“참 나, 수안 씨, 은근 이상한 구석이 있네. 아무리 존심 상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냐. 그런다고 값이 더 올라가는 거 아니니까, 그만 튕기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무슨 말을 더 하면 좋을지 몰라 열에 들뜬 얼굴로 숨만 몰아쉬고 있자니, 정 대리는 싱글거리는 얼굴로 최후의 일격을 날려주신다.

“수안 씨 마음은 알겠는데, 우리 결혼까지 생각하기엔 너무 이르고, 우선 만나보기나 하자. 다른 사람 눈에 띄면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퇴근하고 저 건너 카페에, 히잌, 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길 건너 카페를 가리키다가 갑자기 인사를 하며 90도로 허리를 꺾는 정 대리 너머에 도훈이 팔짱을 낀 채 떡 버티고 서 있었다.

하마터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조금만 정신줄을 놓았다면, 여기가 회사 앞이라는 것도 잊고 남편의 너른 품으로 뛰어들었을지도 몰랐다.

평상시라면 완벽한 연출을 위해 정 대리보다 더 깊숙이 허리를 숙였을 수안이 복받친 설움에 인사는커녕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시울만 붉혔다.

그런 수안을 날카로운 눈길로 좇던 도훈이 곧 정 대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원증이…….”

“아, 예, 기획1팀 정진우 대리입니다.”

재킷주머니에서 허둥지둥 사원증을 꺼내서 목에 건 정 대리가 참 우렁차게도 자기소개를 했다.

“그렇군.”

그게 끝이었다.

아무 말 없이 무감한 얼굴로 내려다보기만 하는 회장님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암만 생각해도 회장님과 이런 식으로 마주하고 있어야 할 만큼 눈길을 끈 일이 없는 것 같은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일 정도로, 제게로 향한 회장님의 시선이 살벌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이 자리에서 짜부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정 대리가 슬금슬금 옆걸음질을 했다.

“추, 출근시간이 다 되어가서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안 씨, 얼른 따라오지 않고 뭐 해?”

맹수를 맞닥뜨린 초식동물처럼 잔뜩 움츠러들어서도 그럴듯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정 대리가 굳이 수안까지 챙겨가려 팔랑팔랑 손짓을 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회장님의 시선 때문에 그런 자그마한 손짓 하나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건만, 저 눈치 밥 말아먹은 인턴은 선 자리에서 꼼짝을 안 했다.

일 처리가 깔끔해서 몇 개월 잘 써먹은 데다, 인물도 꽤 반반해서 그럭저럭 자신의 짝으로 괜찮겠다고 생각했던 인턴이 마뜩찮아지는 순간이었다.

저렇게 눈치가 없으면 남자 앞길에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속으로 푸짐한 한숨을 몰아쉰 정 대리가 인상을 팍 구기며 수안을 몰아쳤다.

“백수안 씨, 정신 안 차려? 얼른 따라오라니까.”

회장님 앞이라 소리를 높일 수도 없고, 거의 속삭이듯 말을 토해낸 정 대리가 수안의 손목을 잡아끌 요량으로 막 손을 뻗었을 때였다.

“이리 와, 수안아.”

같은 남자가 듣기에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그윽한 목소리가 회장님에게서 흘러나왔다.

감정이 아예 없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말에 놀란 건 일도 아니었다.

회장님이 오란다고 쪼르르 다가가는 인턴의 행동에 거친 숨을 삼켰다가, 그 개념 없는 인턴의 손을 다정하게 거머쥐는 회장님의 행동에 거의 까무러칠 듯 놀랐다.

“저런 걸 왜 그냥 참고 있어?”

“안 참았어요.”

“참던데, 아주 많이.”

“인턴이면 그 정도는 해야 해요.”

“쯧! 기획1팀 정진우 대리.”

수안을 자신의 뒤로 세운 도훈이 얼이 빠진 정 대리를 싸늘하게 불렀다.

“네, 넵.”

“백수안 씨 결혼했습니다.”

“네? 겨, 겨, 결혼…….”

도훈과 수안을 번갈아 쳐다보던 정 대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 있던 정 대리가 거의 본능적으로 허리부터 넙죽 숙이고 봤다.

“모, 몰라봐서 죄, 죄송합니다.”

“뭐, 그건 일부러 숨긴 쪽도 책임이 있으니까 됐고…….”

“절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믿어주십쇼.”

“뭘 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예? 어, 그…….”

정 대리의 얼굴이 완전 울상이 됐다.

궂은일 마다않고, 고분고분 말 잘 듣던 백수안이 문제의 회장님 사모님이라는 걸 짐작이나 했겠느냔 말이다.

이모저모 생각해 봐도 잘못한 것투성이라 가슴은 이미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판에, 회장님의 믿음을 사기 위한 방안 같은 게 떠오를 리 없었다.

“우선 지금의 이 상황부터 어떻게 무마시키는지 지켜보도록 하죠.”

회사 내에 도훈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다는 걸 감안할 때, 오가는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고 해도, 사원들이 수시로 오가는 출근시간에 그와 함께 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슈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소문을 주도하는 정 대리한테 이보다 더 자신 있는 임무는 없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아주 감쪽같이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백수안 씨는 오전에 정진우 대리가 외근 보낸 겁니다. 알겠습니까?”

“네? 외근을 어디로…… 아, 예, 알겠습니다. 오후 1시까지 외근인 거로 보고하겠습니다.”

맹하게 물었다가 도훈의 살벌한 눈빛에 움츠러든 정 대리가 금세 말을 바꿨다.

군기가 바짝 든 것 같은 말투가 나름 마음에 들었는지, 도훈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수안에게 따라오라 눈짓을 했다.

도훈의 처사가 불만스럽긴 했지만, 정 대리가 보는 앞에서 회장님의 말에 반박을 할 수도 없는지라 수안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임원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들은 눈 깜짝할 새에 회장실 앞에 도착했다.

의아해하는 김 비서와 다른 두 명의 비서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넨 수안이 도망치듯 회장실로 쏙 들어가자, 방해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도훈이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내가 더 화나니까, 화내지 말아요.”

냉큼 선수를 친 수안이 소파에 무너지듯 몸을 기댔다.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뱉어내긴 했지만, 도훈은 별다른 말 없이 수안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이런 방법이 아니어도 경영수업은 얼마든지 가능해.”

“알아요,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는 거. 그래도 나름 배운 것도 많아서 후회는 안 해요. 근데, 나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딱 나타났어요?”

“몰랐어? 네 몸에 도청장치 해놓은 거.”

“정말요? 어디에요?”

“여기.”

도훈이 작게 속삭이며 동그랗게 반짝이는 눈 위에 입을 맞췄다.

“또 여기.”

다음엔 보드라운 뺨.

“그리고 여기.”

다음은 역시나 입술이었다.

눈꺼풀에 입술이 닿을 때부터 배시시 웃음을 머금었던 수안이 입맞춤을 받고 나서는 아예 활짝 만개했다.

“하여튼 맨날 장난이야.”

“장난이 아니라, 내가 그놈 눈빛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쫓아갔게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 여기 어디 자리 마련해 줄 테니까 경영수업은 나한테 받아.”

“싫은데.”

“왜?”

“다른 계획이 있거든요.”

“다른 계획, 뭐? 오늘 저녁에 그거 말하려는 거였지? 사람 피 말리지 말고 그냥 지금 해.”

“음, 나 엄마 될 거거든.”

수안의 머리칼을 지분거리던 도훈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숨소리마저도 잠시 멈춘 것 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그게 무, 무슨 소리야?”

“내 맘대로 일 저질러서 미안해요. 나느은 오빠 닮은 아기도 낳고 싶고 그런데, 오빠는 나 배려한다고 자꾸 미루기만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단 말이에요.”

“그, 그럼 뭐야, 지금 여기에 아기가…….”

띄엄띄엄 말을 이어가던 도훈이 납작한 수안의 배에 손을 올리고는 입술을 꾹 다물고 미간을 짙게 일그러뜨렸다.

“네, 있어요. 어제 병원 가서 확인했는데, 다음 주에는 아기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화났어요?”

말 못 하는 아이처럼 도훈이 냉큼 고개를 저었다.

“뭐야, 우, 울어요?”

도훈의 눈가에 반짝 비치는 게 눈물인지 아닌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의 품에 꽉 안겨 버렸다.

“사랑해, 수안아.”

감격에 겨운 도훈의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다른 말은 모르는 사람처럼 도훈은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좋아요?”

빈틈없이 안긴 품에서 간신히 고개를 든 수안이 촉촉한 목소리로 물었다.

“숨도 못 쉬겠어.”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토해낸 도훈이 수안의 이마와 볼에 차례로 입맞춤을 한 뒤, 이내 입술을 머금었다.

경건하면서도 미치도록 설레는 키스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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