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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외전 3 - 사모님은 인턴 (1) (83/88)

83. 외전 3 - 사모님은 인턴 (1)

“나 조기 조 앞에서 내릴게요.”

“그냥 가.”

“또 이런다. 어느 회사 인턴이 회장님 차를 얻어 타고 다녀요?”

두 사람이 부부가 된 지 횟수로 5년.

수안은 졸업을 앞두고 태성그룹 인턴 채용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했다.

퇴근은 몰라도 출근만큼은 매일 김 비서의 수행을 받던 도훈은 수안이 첫 출근을 하던 날부터 직접 운전해서 출근하기 시작했다.

효율성을 중시하시는 회장님답게 한집에 사는 인턴사원을 꼭 챙겨서 출근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신호에 걸리는 순간에도 손을 그냥 놀리는 법이 없었다.

하루 종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인턴사원의 손을 조물락대기 일쑤였다.

그러고는 매번 하루도 빠짐없이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기 위해 이렇게 실랑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 인턴이 회장님 와이프면 당연한 거지.”

“그걸 몰라야 하니까 이러는 거고요.”

수안은 미간에 힘을 주고, 5개월째 지치지도 않고 졸라대는 도훈에게 야무지게 말을 건넸다.

“여기요. 여기서 내릴게요.”

“아직은 추우니까 조금만 더 가.”

“자꾸 이러면 내일부터 이 차 안 타고 다닐 거예요.”

앞으로 한 달이면 계약 만료였다.

그냥 엄포를 놓는 게 아니라, 한 달 정도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 뜻을 넌지시 도훈에게 밝혔기에 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차를 세웠다.

“오빠, 오늘 알죠?”

“뭘?”

불통하게 되묻는 도훈이 귀여워 수안은 설핏 웃고 말았다.

저런 모습들에 수안은 하릴없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그녀에게만 내보여지는 모습임을 알기에 더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수안은 대답을 뒷전으로 미룬 채 미세하게 굳어진 입매에 입술을 톡 찍었다.

기회를 잡았다 싶은 도훈이 냉큼 고개를 돌리며 수안의 볼을 감싸 쥐었다.

진한 키스를 고대하며 얼굴의 각도를 조정하는 도훈의 입술에 수안의 손바닥이 척 달라붙었다.

“립스틱 지워져서 안 돼요. 키스는 저녁 식사 후로 예정되어 있으니까, 지금은 좀 참아주시죠.”

“그러게 화장 안 해도 예쁘다니까.”

“화장하면 더 예쁘니까.”

“남편 회장실에 처박아두고, 더 예뻐져서 뭐 하게?”

“수시로 순시한다고 내려와서는 부하직원들 간 떨어지게 만드는 회장님 입에서 나올 소린 아닌 거 같네요. 그리고 뭐 하려는 게 아니라 이 정도 가벼운 화장은 기본 예의거든요.”

“자네 아주 똑 부러지는군. 인턴 기간 끝나면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도훈이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수안이 까르르 웃음을 흘렸다.

요 며칠 수안이 초조해하는 것 같아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도훈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성실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니, 아무래도 인턴 기간이 끝난 뒤의 일들을 고심하느라 초조해한 것일 터였다.

저녁 식사 약속까지 따로 잡는 걸 보면 드디어 고심을 끝낸 게 분명했다.

어떤 결정을 내렸건 수안의 뜻에 따라주리라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지만, 제발 유학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은 어쩔 수 없었다.

장난인 듯 꾸몄지만, 내 밑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물음엔 진득한 진심이 담겨 있는 셈이었다.

“저녁 때 계약 조건 들어보고 결정할 거니까 철저히 준비해서 오시면 되겠네요, 회장님.”

“흠, 그렇게 하지. 대신 7시 이후부터 네 시간은 모두 내 거야.”

“넵. 퇴근하고 봐요.”

다시 한번 도훈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춘 수안이 만개한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차에서 내렸다.

차 문을 닫고 돌아서려는데, 차창이 스르륵 내려가더니 도훈이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수안아.”

저렇게 부르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수안이 상체를 숙여 몸을 조수석 쪽으로 기울이고 있는 도훈을 바라봤다.

“사랑해.”

늘 들어도 설레는 말이 수안의 귓속으로 쏙 파고들어 왔다.

“나도요. 너무너무 많이…….”

“백수안 씨, 여기서 뭐 해?”

“허억! 저, 정, 정 대리님 아, 안녕하세요.”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수안이 냉큼 허리를 펴고 돌아서서 얼결에 인사를 건넸다.

정차한 차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정 대리는 수안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이리저리 고개를 빼며 살피기 바빴다.

들키기라도 할까 걱정된 수안이 정 대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얼른 가라며 손짓을 해 보였다.

간혹 불퉁대긴 해도 아내의 뜻을 존중해 주는 도훈이 서서히 차를 출발시켰다.

“백수안 씨, 혹시 저 차에서 내린 거야?”

“설마요. 길 물어보기에 가르쳐 준 것뿐이에요.”

“요즘도 길 물어보는 사람이 있나? 더구나 출근시간에?”

“하하, 그러게요. 내비가 고장 났대나 뭐래나. 어딘가 좀 2%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더라고요.”

수안이 되는대로 마구 둘러댔다.

하필이면 하고많은 사람 중에 정 대리와 맞닥뜨릴 게 뭐람.

정 대리는 업무 능력보다 소문을 몰고 다니는 데 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소문 들었어요?’로 시작되는 사내 메신저는 거의 대부분이 정 대리의 손을 거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저 차 회장님이 타고 다니는 차 아닌가?”

차 뒤꽁무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정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말에 수안은 하마터면 놀란 숨을 토해낼 뻔했다.

“에이, 아니에요. 나이 드신 분이었는걸요. 회장님은 젊은 분이잖아요. 게다가 회장님만 저 차를 타는 것도 아니고.”

“그래? 이상하네. 차번호가 분명 맞는 것 같았는데.”

“정 대리님, 어제 취합해 달라고 하셨던 자료 있잖아요.”

“어? 어. 그게 왜?”

“정 대리님 메일로 보냈다고요. 확인 안 하신 것 같아서.”

그게 뭐 중요한 일이라고 이런 순간에 말하는 걸까 하는 불만이 담긴 정 대리의 표정을 뒤로하고 수안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러다 지각하겠어요. 얼른 가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 대리가 하는 수 없이 따라붙었다.

“백수안 씨, 혹시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이요?”

“회장님 와이프, 그러니까 사모님이 우리 회사에 다닌다는 소문. 어어, 조심해. 굽이 높아 보이지도 않는데 왜 비틀대고 그래.”

“그, 그러게요. 하하, 하하.”

“솔직히 말해봐.”

“네? 뭐, 뭘요?”

“수안 씨도 놀랐지? 그래서 삐끗한 거지? 내가 더 놀라운 사실 하나 알려줄까?”

기계적으로 걸음을 내딛는 수안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헤맸다.

마피아놀이를 할 때처럼 가슴이 두근댔다.

인턴 채용 공고가 떴을 때 도훈에게도 알리지 않고 응시를 했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가지고 있는 배경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평가를 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인턴을 마칠 때까지 밝혀지길 원치 않았다.

그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대체 어디에서 새 나간 걸까?

정 대리가 얼마만큼 파악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딱 잡아떼야 할지, 아니면 인정하고 협력을 부탁해야 할지 고민하던 수안은 우선 정 대리의 말을 들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놀라운 사실이라니요?”

“회장님 사모님이 이번 인턴들 중에 있다는 거야.”

“허억!”

“그렇지. 놀랄 줄 알았어. 나도 그거 알아내고 얼마나 놀랐게.”

“어디서 그런 걸…….”

“나름의 루트가 있지. 그것까지 밝힌 순 없고. 그래서 내가 이모저모 유추해 봤거든.”

수안이 놀라고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녀의 반응에 신이 난 정 대리의 어깨가 한층 더 치솟았다.

“회장님 사모님이 외모가 조금 딸린다는 소문은 들어봤지?”

“그, 글쎄요. 그런가요?”

“허, 아무리 햇병아리 인턴이라도 너무 깜깜이네. 암튼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엔 아무래도 기획3팀의 백지인 씨가 사모님인 것 같다 이 말이야.”

수안은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이번 인턴 중에 백씨 성을 가진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는 걸 깜빡했었다.

“그래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평정을 되찾은 수안이 까닭을 묻는 여유까지 선보였다.

“백지인 씨 명품으로 도배를 하고 다니잖아. 게다가 근태도 안 좋은가 보더라고. 일 시킬 때마다 이런 것까지 자기가 해야 하냐고 따져 묻기 일쑤래. 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러는 거 아니겠어.”

“그럴까요?”

“확실하다니까. 원래 가진 것들은 아쉬울 게 없거든. 에이, 진짜, 일할 맛 안 나게. 그럴 거면 왜 인턴으로 들어온 거야?”

일할 맛 안 난다는 정 대리의 말에 수안은 실소를 흘릴 뻔했다.

네 일은 네 일이고, 내 일도 간혹 네 일로 만들어 버리는 정 대리의 입으로 들을 소리는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여튼, 백수안 씨같이 빽 없고 돈 없는 사람은 뭐든 열심히 해야 하는 거야. 그나마 수안 씨는 비주얼이라도 되니까 다행이지. 흐극, 흐극.”

수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한 번 훑어본 정 대리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말인데, 수안 씨 같은 부류는 사람을 잘 만나야 앞날이 훤히 피는 거거든.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이 좀 살거든. 아, 물론 태성그룹 회장님만은 못하겠지만 말이야. 흐극, 흐극.”

바닥만 보고 걷던 수안의 미간이 짙게 일그러졌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이게 웬 봉변인가 싶었다.

그냥 차 타고 가자던 도훈의 말을 들을걸, 하는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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