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외전 2 - 독점욕
수안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눈을 빛냈다.
나미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암만 그래도 저는 유부년데, 연애도 한 번 못 해본 애가 무슨 근자감일까 어이가 급 사라지려는 순간, 나미는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면회 가서 확 덮쳐 버리려고.”
“무, 뭐? 유나미, 미쳤어? 우선 대화를…….”
“백수안 네가 더 미친 거 같다. 웬 목청이 이렇게 커.”
갑자기 들려온 굵직한 목소리에 놀란 수안이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태경이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허억! 태경아, 화, 화장실 잘 다녀왔어?”
“얘 왜 이러냐?”
앉자마자 술잔부터 집어 든 태경이 수안을 한심한 눈길로 쳐다보며 나미에게 물었다.
“부부 싸움 했나 봐.”
“뭐어? 내가 부부 싸움을…… 했겠지?”
갑작스레 둘러댄 나미의 말에 버럭 소리를 높였던 수안이 눈에 경련이 일 정도로 찡긋대는 나미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말을 바꿨다.
“왜? 너 여기 온다고 뭐라고 해?”
미간을 찌푸린 태경이 걱정스러운 듯 물어왔다.
“아아니. 야, 얼른 가라고 등 떠밀더라.”
“아아, 그래서 우거지상이었구먼. 얼싸 좋다 등 떠미니까 서운해서.”
“아니야, 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좀…….”
냉큼 넘겨짚는 나미의 말에 손부터 내저었다. 하지만 그 손짓엔 어쩐지 힘이 없었다.
“야, 그 얘긴 그만하고 우리 건배나 하자.”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수안이 제 잔을 불쑥 앞으로 내밀자, 나미와 태경이 잔을 들어 부딪쳤다.
셋은 똑같이 잔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좀 전의 식사 자리에서부터 이랬다. 신나는 듯 웃고 떠들다가도 어느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작 하고 싶은 말들은 눌러두고,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 가벼운 말들만 늘어놓다 보니 자꾸 뚝뚝 끊기는 건지도 몰랐다.
“태경이 너, 짧은 머리도 엄청 잘 어울린다.”
괴괴하게 내려앉은 침묵이 영 마땅치 않아 건넨 말에 태경은 입꼬리를 피식 끌어 올렸다가 내렸다.
“내가 또 한 인물하지.”
그의 너스레에 나미가 팝콘을 집어 던지자, 태경은 그걸 또 받아먹고 한껏 으스댔다.
중간중간 예고도 없이 내려앉는 침묵처럼 웃음도 갑작스레 와르르 쏟아졌다가 멈췄다.
침묵과 웃음 사이의 공백은 술로 채워져, 세 사람 모두 어지간히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이제 그만 들어가야겠다며 태경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에야 수안은 꼭 하고 싶었던 당부의 말을 꺼내놨다.
“태경아, 몸 건강히 잘 다녀와야 해.”
엉거주춤 서 있던 태경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도 잘 지내라. 그리고…….”
태경이 잠시 말을 멈추고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시 만났을 때는 우리, 친구만 하자.”
“어? 어. 그래, 그러자.”
너무 듣고 싶었던 말 앞에서 잠시 멍했던 수안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쟤 면회 못 오게 해라.”
태경이 고갯짓으로 나미를 가리키며 말을 뱉어놓고 자리에서 불쑥 일어났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미가 거친 숨을 들이켰다.
“하, 한태경, 드, 들었어?”
“그래, 들었다.”
“어, 그, 저, 오해야. 내 말은 그러니까, 야아. 어디 가?”
“데려다줄 테니까 빨리 나와.”
“어? 데, 데려다준다고? 나를?”
“그럼, 얘를 데려다줄까?”
“아니야, 나는 알아서 갈 테니까 나미 데려다줘. 나미야, 너 거기 골목 으슥해서 무섭다며?”
2학기가 시작될 무렵 나미는 이혼에 합의한 부모님을 설득해 학교 근처에 원룸을 얻어 독립했다.
“그건 그런데, 그래도 같이…….”
“부잣집 마나님은 따로 사람 불렀으니까 걱정할, 흠, 득달같이도 오셨네.”
태경이 입구 쪽을 쳐다보며 실소를 흘렸다.
“알아서 간다니까 누굴 부른 건데?”
기대감에 부풀어 혹시나 하고 돌아보니, 역시나 캐주얼한 차림의 도훈이 펍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계집애, 아주 좋아 죽는 거 봐라.”
“아니야, 야. 좋아 죽긴 무슨. 한태경, 굳이 연락 안 해도 됐는데.”
“둘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이라. 너희들, 이 오빠 군대 가 있는 동안 술은 좀 자제해라. 알았냐?”
태경이 검지로 나미의 이마를 톡 치고는 수안의 이마를 행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미처 닿기도 전에 도훈에게 잡혀 버렸다.
“이쪽은 내가 알아서 하지.”
“뭐, 그러시든가요.”
“군대 잘 다녀오고. 오늘은 연락 줘서 고맙다.”
도훈이 태경의 손을 고쳐 잡고 악수를 하듯 아래위로 힘 있게 흔들더니 놓아주었다.
태경은 콧잔등과 한쪽 눈을 찡그리는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 뒤, 나미에게 가자며 고갯짓을 해 보였다.
“태경아, 낼모레 같이 가줄까?”
“됐다.”
“편지할게. 잘 다녀와.”
약간 비틀거리는 나미를 앞세운 태경이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애잔한 눈길로 뒷모습을 좇고 있자니 허리에 단단한 손이 휘감겼다.
“이제 그만 남편한테도 신경 좀 써주지.”
전에 없이 불퉁한 목소리에 미간을 좁힌 수안이 그를 올려다봤다.
도훈이 곧장 이마를 부딪쳐 왔다.
“아야!”
“그만 나가자. 여기 너무 시끄럽다.”
엄살을 떨며 이마를 부여잡는데도 도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그가 이끄는 대로 하는 수 없이 따라가며, 수안은 뾰로통해져서 그의 뒤통수를 흘겨봤다.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에 이르러 도훈이 조수석 쪽 문을 열어주었다.
“운전해도 돼요? 술 마신 거 아니에요?”
“어서 타.”
“다담 사장님이랑 한잔한다고 했잖아요?”
“안 했어.”
“왜요?”
의아해서 물어보자, 수안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톡 친 도훈은 아무런 말 없이 차체를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냉큼 올라탄 수안이 취기 어린 눈으로 도훈을 말똥말똥 쳐다봤다.
“혹시 나 데리러 오려고 술 안 마신 거예요?”
차를 출발시키는 도훈의 입꼬리가 설핏 호선을 그렸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생색낼 줄 모르는 사람이니, 저 정도면 긍정의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안의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맺혔다.
사랑은 이렇게 뜬금없이 가슴을 톡톡 두드린다.
표현이 요란스럽지 않은 사람의 애정 표현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쿨한 남편의 태도에 서운했던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금세 설렘에 휩싸인 수안이 상체를 기울여 단정한 뺨 위에 입술을 붙였다.
서서히 출발하려던 차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쪽’ 하는 촉촉한 소리를 내고 이내 떨어졌는데도, 도훈은 고장 난 것처럼 꼼짝을 안 했다.
“휴우, 어쩌려고 이래?”
“어,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냐앙 데리러 와주니까 너무 좋아서. 이제 아무것도 안 할게요.”
수안이 항복을 선언하는 것처럼 양손을 들어 보이며 생긋 웃었다.
도훈의 미간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생글거리던 수안의 웃음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혹시, 화났어요? 내가 뽀뽀해서?”
그전까진 기분이 괜찮아 보였으니, 저렇게 인상을 쓰는 이유는 그것뿐인 것 같았다.
“그래.”
역시나.
“나 뭐, 미운 짓 했어요?”
“잘 아네.”
이제 수안의 미간도 도훈만큼 일그러졌다.
“미운 짓 뭐요? 애들 만난 건 오빠가 엄청 쿨하게 그러라고 했잖아요. 설마, 뽀뽀한 거가지고 그러는 건 아니죠?”
“왜 아니야.”
“네에?”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턱이 잡혔다.
얼굴이 불쑥 가까워지나 싶더니 입술이 뜨겁게 빨렸다.
너무 뜬금없어서 밀어내지도 못했다. 아니, 별로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밀어내기는커녕 이게 웬 떡이냐며 냉큼 벌어진 입으로 부드러운 혀가 쑥 밀고 들어왔다.
대양의 일렁임처럼 온유하고 감미로운 키스가 이어지다가 촉촉한 소리를 내며 멎었다.
“저녁 내내 독수공방한 거 생각하면 키스를 수십 번 해도 모자랄 판에, 뽀뽀 한 번 해놓고 아무것도 안 한다니 당연히 밉지.”
“독수공방…… 왜 다담 사장님 안 만나고…….”
“네 맘 편하라고 핑계 댄 거야.”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너무 쿨하게 보내줘서 좀 섭섭했는데.”
“허! 매번 욕심 부리지 않으려고 이 악무는 건 알지도 못하지.”
꽤나 억울한 듯 도훈이 그녀의 코를 살짝 잡아서 비틀었다.
“뭐든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데, 그러자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자꾸 줄고. 게다가 우리 부인께선 나날이 예뻐지기까지 하니…….”
구구절절 내보이기엔 참 민망한 마음 한 자락 비춰놓고, 제 스스로도 마땅치 않아 말도 끝맺지 못하고 이마를 감싸 쥐었다.
창창한 부인 앞길에 무한한 경험과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이 반이라면, 수안의 인생이 오로지 자신으로만 가득 채워졌으면 하는 욕심이 반이었다.
부부로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서서히 사그라질 줄 알았던 욕심은 공교롭게도 나날이 늘어나기만 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수안에게 그대로 내보일 수는 없었다.
저조차도 놀라게 되는 자신의 독점욕에 수안이 부담을 느끼길 원치 않았다.
그는 굳어졌던 표정을 감추고 수안을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뜻 있는 말 아니니까, 귀에 담을 필요 없어. 이만 집에…….”
“그거, 나를 아주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소리죠? 난 그렇게 들었는데, 잘못 들은 거예요?”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 짓는 수안이 정말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매순간 자신을 사로잡는데, 미치지 않고 버틸 재간은 없었다.
“우리 수안이 똑똑하네.”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질척하게 젖어드는 소리에 장소도 불문하고 아래로 힘이 불끈 쏠렸다.
집으로 가는 20여 분을 참아낼 수 있을지 슬슬 걱정이 될 즈음, 똑똑한 데다 엉뚱하기까지 한 부인은 잠시 입술이 떨어진 새를 틈 타 아찔한 말을 속삭인다.
“우리 그거 해볼래요? 카ㅅ, 읍.”
도훈은 앙큼한 부인의 입을 틀어막느라 또다시 입술을 겹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