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외전 1 - 일등신랑감
겨울답지 않은 따사로운 햇살이 가족납골묘로 조성된 석실 위로 산란하게 부서졌다.
널찍한 석판에 새겨진 할아버지와 엄마의 이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수안이 손가락으로 코끝을 슥 문지르곤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할아버지, 엄마, 잘 있었어요?”
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휴대폰을 꺼내 잠깐 손가락을 놀리더니 배시시 미소를 머금고 석실을 향해 폰을 들어 보였다.
“엄마, 어때? 울 남편 멋있지?”
완벽한 코트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엉성한 머플러를 두르고 뒤돌아보며 활짝 웃는 모습의 도훈이 화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가 생일 선물로 건넨 머플러를 하고 출근하던 날 찍은 사진이었다.
뜨는 데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린 것치곤 너무도 볼품없는 머플러를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받아준 도훈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웠던 순간을 잡아놓은 것이었다.
“머플러 이거 내가 떠준 건데, 아무래도 난 엄마 닮아서 손재주가 영 없나 봐. 나미가 걸레로 쓰래도 싫어하겠다고 어찌나 놀리던지……. 근데 이 사진 보더니 울 남편 대단하대. 넝마를 걸쳐도 명품으로 보이게 만들 상이라나. 어때? 엄마가 보기에도 그래?”
‘아무렴. 내가 그런 것도 안 따져보고 도훈일 너한테 붙여줬을까 봐? 네 말대로 내가 손재주는 없을지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끝내주거든.’
간간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다.
사위는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한데 웃음기 섞인 주은의 목소리가 겨울바람에 실려온 듯 귓가를 맴돈다.
“에이, 사람 보는 눈이 끝내주는데, 그런 사람을 골라서 결혼하나?”
‘거야 철없을 때 실수한 거지. 너는 하여튼, 내 딸이지만 은근 못된 구석이 있어. 그렇게 아픈 데를 콕콕 찔러대야 속이 시원하니?’
“아직도 사랑해? 그 사람.”
‘글쎄, 이제 와선 잘 모르겠어.’
“그 사람 무기징역 선고 받았어.”
엊그제가 1차 공판 선고기일이었다.
수안은 도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참석했다.
명백한 증거와 증인들의 확고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최종진술에서 기석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딸을 빼앗기 위한 차도훈의 음모라며, 눈을 시뻘겋게 부라리고 악을 써댔었다.
그것만으론 부족했던지, 기석은 선고를 받고 재판정을 나서기 전 수안과 도훈을 죽일 듯 노려봤다.
네가 내 인생을 망쳐 놨다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눈치였다.
“아무래도 항소하려나 봐.”
재판정에서의 그의 태도로 미루어 이미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기석이 항소를 준비 중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기가 차서 잠시 말문이 막혔었다.
기석에 대한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 보다.
분노는 말할 것도 없었고, 옅은 실망감마저 밀려왔다.
최소한의 양심을 기대했었나 보다. 그렇게까지 바닥이 아니길 정말 간절히 기대했었나 보다.
자신에 대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10년 넘게 함께한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만은 느끼길 바랐던가 보다.
자신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제발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아니길 바랐던 마음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엄마, 나는, 그 사람이 용서가 안 돼. 내 몸에 그 사람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 미치겠어.”
꾸역꾸역 억누른 감정이 조금씩 비집고 나왔다. 앙팡지게 움켜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머리칼이 살랑 들어 올려졌다가 살포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주은이 기분을 풀어주려고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안아, 그런 생각 하지 마. 너는 내 딸이야.’
“흐으. 아우, 진짜. 이번엔 정말 안 울려고 했는데.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했는데, 흐읍. 엄마, 미안.”
‘아니,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수안아.’
“엄마가 뭐가 미안해?”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대신에 차도훈을 보내줬잖아.”
‘맞다. 그랬지, 참. 그럼 그걸로 퉁 쳐야겠다. 딸한테 일등신랑감을 턱하니 안겨줬는데, 그보다 어떻게 더 잘해? 그치?’
“흐흐. 네에, 그보다 더 잘할 순 없지.”
“뭐야? 그새를 못 참고 또 장모님이랑 싸우는 거야?”
화사한 꽃다발을 손에 든 도훈이 어느새 훌쩍 다가와 있었다.
오빠 소리를 찰떡같이 입에 달고 살더니, 장모님 소리는 아주 예사였다.
상큼한 미소를 머금은 도훈은 얼른 눈물을 훔치는 아내를 모른 척해주었다.
“무슨, 내가 앤가. 엄마랑 싸울 일 없거든요.”
“그럼 오빠 흉 봤나?”
능청스레 말을 건넨 도훈이 단정한 자세로 석실 앞 화병에 꽃을 꽂았다.
우아한 손동작으로 갈무리하는 머플러는 그녀가 생일선물로 건넨 바로 그것이었다.
반듯하게 선 도훈이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 눈을 감고 묵례를 했다.
“뭐라고 했어요? 속으로 내 흉 봤나?”
원래 말수 적은 사람이니, 나름의 방식으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리라 짐작은 했지만, 그의 속내가 괜스레 궁금해져서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뭐 그냥.”
“그냥? 그냥 뭐요?”
“걱정하지 말라고.”
“에이, 그게 뭐야. 이렇게 예쁜 아내를 줘서 감사하다고, 늙어 죽을 때까지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겠다고, 응. 그렇게 말해야죠.”
고개를 바짝 쳐든 수안이 눈에 힘을 주고 하는 소리에 도훈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어, 그 웃음 뭔데요?”
샐쭉하니 쳐다보는데도 미소를 지우지 않은 도훈이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겨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
“그래서 우리 예쁜 아내님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된다고?”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속셈인 걸 뻔히 알았지만, 그를 다그칠 마음은 없었다.
부부 사이엔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중국어 학원 등록하러 가려고요.”
“방학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좀 더 쉬어. 이번 주 금요일 껴서 여행 가자.”
“안 돼요. 이번 방학 동안에 중국어 실력 좀 업해놔야 한단 말이에요.”
“영어랑 일어 회화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면 됐지, 웬 욕심이 이렇게 많아.”
겉으론 욕심 많다 핀잔을 하면서도 속으론 꽤나 기꺼운 듯, 도훈은 수안의 볼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미리미리 해놔서 나쁠 거 없잖아요.”
“그럼 학원 등록하고 저녁 먹으러 가자. 인택이가 신 메뉴 시식 좀 해달라더라.”
수안이 곤란한 기색을 띠며 입술을 움찔거렸다.
“표정이 왜 그래?”
“어, 그게에, 오늘 나미랑 태경이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래?”
“태경이 이틀 후에 입대하거든요. 내일은 조용히 보내고 싶다고 해서 오늘 저녁 먹고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그래.”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요.”
“괜찮아. 춥다. 그만 가자. 인사드려.”
다시 묵례를 하는 도훈의 옆에서 간단한 인사말을 건넨 수안은 그의 손에 이끌려 주차된 곳으로 이동했다.
혹시나 기분이 상했을까 힐끔힐끔 눈치를 살폈지만, 언짢은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맞잡은 손은 더없이 따뜻했고, 옷깃을 여며주는 손길은 다정하기만 했다.
도훈이 서운해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씁쓸했다.
“오빤 이제 어디 갈 거예요?”
제가 듣기에도 상당히 의뭉스러운 물음이었다.
학원에 들렀다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도훈은 시종일관 다정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그녀와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도훈이야 뭐, 바쁘지 않은 날을 꼽기 힘든 사람이었고, 그나마 좀 시간 여유가 있던 수안마저 기말고사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터라 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집을 공유하는 부부였기 망정이지, 아마 애인 사이였다면 요 며칠은 얼굴 보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그러니 그와 저녁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지만, 도훈의 담백한 태도가 어쩐지 좀 서운했다.
그래서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 건지 넌지시 물은 것이었다.
“오랜만에 인택이랑 한잔할 거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재밌게 놀다 와.”
도훈이 어서 가보라 고갯짓을 했다.
“오늘 좀 늦을지도 몰라요.”
“그래. 어서 가봐.”
참 홀가분하게 들리는 ‘그래’였다.
재촉하는 도훈의 손짓에 수안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고 차에서 내렸다.
***
“백수안, 네가 군대 가냐? 어째 태경이보다 더 우거지상이야?”
“네 얼굴도 가히 좋아 보이진 않거든.”
한마디씩 툭툭 던지고 받은 수안과 나미가 잔을 부딪치고는 홀짝 기울였다.
1차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신 뒤 가까운 펍으로 옮겨온 참이었다.
“태경이한테 아직 아무 말도 못 했지?”
태경이 화장실 간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수안은 내내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내일모레면 군대 갈 애한테 무슨 말을 하냐.”
“그러니까 더 해야지. 그래야 훈련 받으면서도, 밥 먹으면서도 계속 네 생각 할 거 아니야.”
“하, 얘가 뭘 모르네.”
“내가 뭘 모르는데?”
“그런 미적지근한 방법이 통하겠냐.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확실한 한 방을 노려야지.”
“확실한 한 방? 그게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