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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사랑해, 수안아 (80/88)

80. 사랑해, 수안아

헐벗은 어깨 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수안이 눈도 뜨지 못하고 꾸무럭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히잉, 안 해.”

나직한 웃음소리가 수안의 등을 따라 흘렀다.

섬세한 손은 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부드러운 살결을 따라 악기를 연주하듯 움직인다.

투정을 부리듯 칭얼대던 수안의 숨결이 또 물색없이 거칠어졌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그를 향해 돌아누워 섹시한 웃음을 머금은 입술을 답삭 집어삼켰다.

짙게 스며드는 아침 햇살 아래서도 순식간에 열정적인 밤이 되살아났다.

“하아, 우리 이러면 안 되는데.”

누가 할 소릴. 먼저 야하게 달라붙어 놓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도훈은 수안이 자신을 괴롭히기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여기저기 입술을 대며 잔망스레 쪽쪽거렸다.

도대체 뭘 해보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애매한 그의 태도에 수안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게슴츠레 흘겨봤다.

“오빠 미치겠다, 백수안. 좀 적당히 예뻐야지.”

“으으으, 완전 느끼해.”

수안이 몸을 부르르 떨며 치를 떨었다.

“어우, 닭살 돋은 거 봐. 그냥 다시 아저씨로 강등해야겠어요. 꼬박꼬박 오빠라고 붙이니까 더 느끼한 거 같아. 으으으.”

사랑 고백을 받은 기념으로 수안은 도훈의 호칭을 오빠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들을 때는 시큰둥하니 맘대로 하라는 식이더니, 제 이름을 꼭 붙여야 되는 줄 아는 어린아이처럼 오빠라는 말을 아주 입에 달고 살았다.

생전 오빠 소리는 해본 적이 없었던 수안이 낯설고 쑥스러워 열에 아홉은 호칭을 생략하는 동안, 도훈의 입에 오빠 소리가 찰떡처럼 붙어버렸다.

결국 오빠는 부르는 사람보다 불리는 사람이 더 많이 사용하는 호칭이 되어버렸다.

도훈이 나름 만족하는 것 같으니 됐다 싶다가도, 이렇게 한 번씩 저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어허, 낙장불입 몰라? 한 번 뱉은 말 쉽게 번복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우리 수안이 어디서 그런 못된 걸 배웠지?”

“꺄아아, 하하하, 간지러, 오빠 간지러워요. 오빠!”

무람없이 헤집고 들어오는 손에 몸을 마구 비틀어대던 수안이 ‘오빠’라는 호칭을 남발했다.

이래도 저래도 그저 좋은 도훈이 수안을 터뜨려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꼭 부둥켜안았다.

“으으, 숨 막혀요.”

“나도 그래.”

사랑스러운 아내의 사랑을 얻고 제대로 맛이 간 남편은 매일매일 숨이 막혔다.

이게 꿈이면 어쩌나, 시시때때로 확인하고 싶은 걸 꾹꾹 참느라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랑해, 수안아.”

결국 이렇게 매번 먼저 사랑을 속삭이는 것으로 아내의 마음을 샅샅이 붙잡는다.

그러면, 함박 웃으며 저에게 안겨올 걸 알기에.

“나도요. 너무, 너무, 너무 많이 사랑해요.”

이렇게 너무 많이 사랑을 되돌려줄 걸 알기에, 그는 단 한 순간도 사랑을 망설이지 않는다.

기분이 좋은 듯 꼼지락거리며 품으로 파고들던 수안이 그의 턱에 조그만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짧은 밤 동안 서로를 탐닉하는 데만 몰두했던 둘은 잠옷을 챙겨 입을 여유가 없어 여전히 알몸이었다.

말랑하고 매끈한 몸이 몽그라지듯 맞닿아오자, 도훈이 괴로운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끙끙 앓았다.

“오빠 힘들다. 이러면 안 된다니까, 수안아.”

“왜요? 오늘 출근 안……. 맞다.”

도훈의 품에서 빠져나온 수안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깨에서 스르륵 미끄러지는 이불을 눈으로 좇던 도훈이 한 손으로 이마를 턱 짚으며 또다시 끙 앓았다.

“오늘 우리 결혼식 하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대체 몇 시야? 히익, 벌써 11시가 다 돼가잖아. 그러니까 내가 응, 그만 좀 하고 자자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듣는 척도 안 하고. 하여튼, 짐승!”

“백수안, 오빠한테 말버릇이……. 수안아아, 옷은 좀 입고, 하아! 나를 아주 말려 죽이려고……. 수안아, 아직 시간 많아. 우선 뭐 좀 먹고 움직이자, 응?”

훌렁 일어나 욕실로 도망치듯 달려가 버린 수안의 뒤에 대고 도훈이 한숨과 푸념이 섞인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벌써 5월도 거의 끝자락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임시주총 이후에 바로 하기로 했던 결혼식은 이런저런 이유로 며칠 더 미뤄졌다.

그사이 기석의 1차 공판기일이 잡혔고, 부회장직에서 물러난 박덕규는 업무상횡령 및 배임 혐의로 입건되어 경찰 조사를 앞두고 있었다.

김운철은 과거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반성으로 장학재단 설립을 추진키로 결정했고, 비서실장에서 해고된 지희는 대충 주변 정리를 마치고 닷새 뒤에 뉴욕으로 날아갔다.

주변이 빠르게 흐르고 변화하는 동안, 도훈과 수안은 사랑의 단꿈에 빠져 때때로 현실을 잊었다.

간혹 서로를 보듬고 앉아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삼키다가, TV로 수인복을 입은 기석이 포승줄에 묶여 이동하는 장면을 보거나,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덕규를 보는 게 전부였다.

도훈은 수안에게 그 이상을 허용치 않았다.

때때로 수안은 애 취급하지 말라며 짜증을 내긴 했지만, 아직은 그녀가 험한 세상으로부터 조금 멀었으면 했다.

수안이 그런 것도 이겨내지 못할 만큼 약하다고 여겨져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누구보다 강단 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폭력에 노출되었던 그녀의 어린 시절을 어떤 형태로든 보듬고 다독이고 싶었다.

수안이 부모 없이 책임감과 의무감에 눌려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안쓰러워하며 위로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점점 진정하고 유일한 가족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아저씨, 오빠, 나 입을 옷 좀 가져다줘요. 샤워가운이 어디로 도망가고 없어요.”

욕실 문틈으로 머리만 쏙 내민 수안이 도훈을 애타게 불렀다.

“우리 둘뿐인데 그냥 나와.”

“아아, 창피하단 말이야. 가져다줘요오.”

침대 위에 나른하게 처져 있던 도훈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홀딱 벗은 채 욕실로 들어갈 땐 언제고, 나오는 건 또 창피하다는 어린 아내의 심리를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기가 찼다.

뭐, 이러나저러나 예뻐 죽겠으니까 그냥 넘어가긴 하겠는데, 얌전히 옷을 넘겨주기도 싫은 걸 어찌할까.

어린 아내를 만나 나날이 유치해지고 욕심만 늘어난다.

“옷 가져다주면 뭐 해줄 건데?”

“뽀뽀 열 번?”

“흠, 키스 한 번.”

양심도 없지. 고작 뽀뽀 따위로 사람을 부리려고.

뾰로통하니 입술을 내민 수안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침대에 앉은 도훈에게까지 들리는 듯했다.

입꼬리는 자꾸 치솟고, 하릴없이 두근대는 심장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오케이, 키스 짧게 한 번.”

수안이 내건 절충안에 실소를 흘린 도훈이 우아하게 몸을 늘여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드레스룸에서 적당한 옷을 골라 욕실 앞으로 다가간 그는 옷을 낚아채려는 손목을 당겨 욕심껏 입술을 삼켰다.

야금야금 삼키고 슬금슬금 밀어, 두 사람 모두 욕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내 문이 닫히고 욕실 밖에는 주인 잃은 옷만 덩그러니 남았다.

다시 욕실 문이 열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결혼식이 시작되는 5시까지 준비를 마치기 위해 두 사람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

“이제야 나타나시는군, 그래.”

겨우 10분 전에 다담 앞에 도착하니, 삐딱하게 선 인택이 조바심을 내며 그들을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초대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거 뭐야? 수녀복이야? 뭘 이렇게 다 가렸어?”

쪼르르 다가온 나미가 호들갑스레 말을 쏟아내며 수안을 돌아보게 했다.

“이게 최선이었어. 한복 입고 결혼할 순 없잖아.”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는 푸념에 나미가 도훈을 살벌하게 한 번 흘겨봤다.

그러고는 감격에 겨운 듯 수안을 담뿍 안았다.

“그래도 예쁘기만 하니 다행이다.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물론 결혼도.”

어깨에 기대어 울기라도 할까 봐 걱정돼 얼른 나미를 떼어놓고 나니, 그 뒤로 뻘쭘하게 선 태경이 보였다.

술에 취해 찾아왔던 뒤로 더 어색해져, 이렇게 가까이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고 있자니, 태경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예쁘다.”

“고, 고마워.”

“오래오래 행복하란 소린 차마 못 하겠다.”

“괜찮아. 이해해.”

“한 번만 안아봐도 되냐?”

퉁명스레 묻는 말에 수안은 도훈의 눈치부터 살폈다.

가진 자의 여유였을까. 도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태경도 도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지, 이내 단단한 팔이 수안의 몸을 감쌌다.

“행복해라.”

“고마워. 너도 행복해야 해.”

“그만하지.”

어느새 다가온 도훈이 태경과 수안을 갈라놓았다.

“잠깐인데 그것도 못 참습니까?”

“나도 아끼는 중이라, 이 정도도 최선이야.”

“으, 재수 없어.”

태경이 험악하게 내쏘는데도 도훈은 그저 피식 웃어버리고 끝이었다.

그저 소유권을 주장하듯 수안의 허리를 감싸 제게로 바짝 붙이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도훈의 입술이 정수리로 내려앉았다. 늘 그러하듯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였다.

인택이 정성스레 마련한 꽃길 위에서 그들은 진정한 부부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식순도 주례도 없는 결혼식은 신랑신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맹세의 글로 채워졌다.

어여쁜 신부에게 홀린 신랑은 사회를 자청한 인택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시시때때로 입맞춤을 해댔다.

맛깔스러운 음식과 기분 좋은 웃음소리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다담 안이 어둠에 휩싸였다.

“어허, 이거 참 갑작스럽게 이게 무슨 일인가 모르겠네요.”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웃음기 섞인 인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바깥이 환하게 밝아졌다.

다담을 마주한 호수 위로 오색찬란한 빛이 난분분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와아! 이게 뭐예요?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한 거예요?”

점멸하는 불꽃에 시선을 고정시킨 수안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에 들어?”

뒤에서 그녀를 포근히 감싸 안은 도훈이 관자놀이 부근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완전, 너무 예뻐요.”

통통 튀어오를 것 같은 목소리에 도훈의 입꼬리가 멋들어지게 치켜 올라갔다.

“나보다 더 행복한 신부는 없을 거야. 어쩌죠?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몰라.”

“너보다 더 행복한 신랑 여기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굵직한 팔이 가냘픈 허리에 단단히 감겼다.

저보다 더 행복하다는 신랑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신부의 얼굴 위로 당연한 듯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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