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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맞잡은 손 (79/88)

79. 맞잡은 손

회의장은 삽시간에 종이를 넘기는 소리로 가득 찼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도훈을 노려보고 있는 덕규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서류를 넘겨 보느라 바빴다.

서류를 확인할 시간을 주려는 듯 도훈은 그저 묵묵히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서류를 넘겨 보던 수안이 어느 부분에 이르러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하다가,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소소한 움직임을 감지라도 한 것처럼 도훈의 시선이 수안에게로 향했다.

서류의 한 부분을 부드럽게 쓸고 있는 그녀의 손끝을 따라갔던 도훈도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귀퉁이에 쓰인 메모 하나가 도훈과 수안을 뭉클한 감정으로 몰아갔다.

―우리 훈이 ⇒ 콩

콩에 여러 번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거로 보아, 편식하는 도훈에게 콩을 먹일 방법을 고심한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훈도 수안도 애틋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해맑게 웃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린 수안이 탁자 밑에서 슬금슬금 손을 뻗어 도훈의 손을 찾아 쥐었다.

자그마한 손의 온기에 도훈의 입꼬리가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어느새 위치를 바꾼 손이 원래 한 쌍인 양 사이사이 엉켜서 빈틈없이 맞물렸다.

주주총회도 회장직도 잠시 둘의 관심에서 멀어져 버렸다.

손만 맞잡고도 설레서 미치겠는 사람을 옆에 두니, 더 욕심나는 것도 없었다.

바짝 다가선 김 비서가 세 번이나 회장님을 부르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도훈이 좌중을 둘러봤다.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뭔지 설명을 해달라는군요.”

허리를 굽힌 김 비서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수안의 손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은 도훈이 준비한 말을 시작했다.

“차태진 공장장이 사적으로 기록한 일지입니다. 입출고 현황과 작업량은 물론, 직원들의 경조사까지 세세한 거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상세하게 기록했죠. 나는 이 기록을 토대로 횡령사건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열 살 무렵부터 쭉.”

일지의 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는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무슨 내용인지 어렴풋이 알기까지 5년이 넘게 걸렸고,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내는 데는 4년이 더 걸렸다.

“아버지의 무죄를 주장하며 울며 매달리는 내게 돌아가신 회장님은 증명해 보이라고 하시더군요. 내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찾아낸 단서로 윤재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설득해서 사건의 전말을 밝혀냈죠. 물론 회장님도 듣고 수긍을 했습니다.”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한 덕규만이 인상을 구긴 채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덮자 하시더군요.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낸 동료이자 친우의 잘못을 한 번은 눈감아주련다고 하시면서요.”

도훈의 시선이 박덕규에게로 올곧게 향했다.

“박덕규 부회장님, 내가 준비한 자료에 틀린 부분이 있는지 제대로 살펴보길 바랍니다. 나는 눈감아줄 생각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가 주주들에게 나누어준 서류에는 차태진의 일지뿐 아니라, 박덕규가 저지른 횡령과 배임 행위에 대한 기록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미 서류를 모두 확인한 주주들이 술렁댔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은 도훈이 진행자에게 신호를 보내자, 이내 회장 해임안에 대한 표결이 시작되었다.

표결은 모든 주주들의 동의를 얻어 찬반 거수 의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해임 반대를 말하는 진행자의 목소리에 손을 든 수안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김운철을 쳐다봤다.

마침 그의 시선도 수안을 향해 있었다.

회한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운철은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내젖고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수안이 참지 못하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간을 일그러뜨렸던 운철도 결국 체념이 섞인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해임안이 부결됐다는 진행자의 발표가 있기도 전에 회의장은 웅성거림과 박수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탁자를 내려친 박덕규가 운철에게 악담을 퍼부은 뒤, 도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가 이대로 물러날 것 같아?”

으르렁대듯 말을 뱉어낸 덕규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수안을 넘겨다봤다.

훌쩍 일어난 도훈이 수안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했다.

“흠, 어린애 치마폭에서 언제까지 놀아날 수 있나 보자고.”

덕규의 도발에도 도훈의 무심한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내일부터 법무팀에서 조사 착수할 겁니다. 꽤 바빠질 테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푹 쉬시죠.”

“이이…….”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찔 들어 올렸지만, 애먼 힘만 쓰다가 허리춤에도 못 미쳐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삭이지 못한 분을 끌어안은 채 덕규는 잰걸음으로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도훈은 이내 주주들과 비서진에 둘러싸였다.

어디에 세워놔도 빛이 나는 내 남자. 한 걸음 떨어져서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던 수안이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잠시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그가 돌아올 곳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게 집을 공유하는 부부의 특권 아니겠는가.

가벼운 걸음으로 대회의실 앞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는데,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요, 잠깐 얘기 좀 해요.”

급하게 다가온 지희가 그녀의 옆에 멈춰 섰다.

“장 실장님이랑 나 사이에 아직 할 얘기가 남았을까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죠?”

“뭐가요?”

“위험 요소는 없어진 거 아닌가요? 이제 회장님 힘은 더 이상 필요치 않잖아요.”

“그래서요?”

심드렁한 수안의 물음에 지희는 속이 바짝바짝 탔다.

제법 일 처리를 잘하고 있는 듯했던 기석은 어이없게도 수안을 납치하려다 잡혀 버렸고, 박덕규 부회장은 제대로 힘도 못 쓰고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래도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되뇌는 와중에도 이미 끝을 본 것만 같은 섬뜩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포기가 안 되는 걸 어쩌라고.

제어가 안 되는 자신의 마음이 원망스러운 만큼 수안이 미웠다.

단 한 조각의 절심함도 없이 도훈을 잡고 있는 이 애가 정말 치가 떨리게 미웠다.

“이제 두 사람, 각자의 인생을 찾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걸 왜 장 실장님이 참견하려고 드는 거죠?”

“전에 말했잖아요. 수안 씨 인생을 찾으라고. 앞으로 정말 사랑하는 사람도 생길 텐데, 언제까지 사랑 없는 결혼에 매어 있을 생각이에요? 그건 두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거예요.”

“누가 그래? 사랑 없는 결혼이라고.”

갑자기 들린 도훈의 목소리에 지희가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봤다.

발걸음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음에도 지희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어, 저는 그저 수안 씨를 생각해서 조언을…….”

“장 실장 조언이 필요해?”

두 사람 사이에 버티고 선 도훈이 수안을 향해 물었다.

“아니요, 그보다 사랑이, 있어요?”

“몰랐어?”

“네. 아니, 알긴 했는데, 그거는 나 혼자만의 감정이니까, 사랑이 있는 거라고 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살짝 풀어져 있던 도훈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수안에게로 고정된 눈은 깜빡임도 멈췄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지희가 안절부절못하며 옆에 서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이미 없는 사람이나 매한가지였다.

“혼자만의 감정? 혹시 그게 나를 사랑한다는 의민가?”

“네, 뭐, 어쩌다 보니.”

마지못해 하는 것 같은 대답에 도훈이 멍해졌다. 들썩거리는 가슴만 아니라면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다 보니 뜻하지 않게 사랑 고백을 하게 되어버린 수안이 붉어진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도 도훈은 고장 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대회의실 문이 열리고 주주들이 몰려나오면서 복도가 어수선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도훈이 수안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난 이만 퇴근한다고 김 비서한테 전해줘. 그리고 장 실장은 오늘부로 해고야.”

빠르게 말을 끝낸 도훈이 수안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 밖에 서 있는 지희를 돌아봤다.

“부당해고 같은 개소린 들먹일 생각 하지 마. 박덕규 쪽에 자료 제공한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선배, 오해예요. 그건 부회장님이 강제로, 잠시만 내 말 좀 들어줘요. 아주 잠시만…….”

애절하게 외치는 지희의 목소리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에 의해 차단되어 버렸다.

둘만 남은 공간, 숨소리마저 신경 쓰일 정도의 침묵을 견디지 못한 수안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아저씨, 내가 좀 헷갈려서 그러는데요, 혹시 말이에요, 나아 사랑해요?”

“그래.”

여태까지 들은 ‘그래’ 중 가장 설레는 ‘그래’가 도훈의 입에서 담백하게 흘러나왔다.

“왜, 왜요? 언제부터요?”

“어쩌다 보니.”

샐쭉하니 올려다보는 수안을 향한 눈빛에 꿀이 뚝뚝 떨어졌다.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 심장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참기 힘든 듯 도훈의 입술이 기어이 수안의 이마에 진득하니 닿았다가 떨어졌다.

“수안아, 사랑해.”

이 멋대가리 없는 남편을 어찌할까.

말없는 사람의 사랑 고백은 미사여구 없이 참 짧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슴이 절절 끓는 걸 보면, 어쩔 도리 없이 사랑에 미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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