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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충분히 매력적 (78/88)

78. 충분히 매력적

임시주총이 열리는 대회의실 앞.

뻣뻣하게 굳어서 서 있는 수안을 지희가 한심하단 눈길로 힐끔거렸다.

“그냥 회장님께 일임하는 게 어떻겠어요?”

“왜요? 내가 실수라도 할까 봐요?”

“너무 긴장하면 일을 그르치기도 하니까요. 가뜩이나 힘든 회장님께 폐를 끼칠까 걱정스럽네요.”

다분히 사무적인 미소를 머금은 지희가 턱을 치켜든 채 수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큰 키에 턱까지 치켜들고 있으니, 완전히 그녀를 얕잡아보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인상을 굳힌 수안이 지희를 향해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을 까딱거렸다.

미간을 찌푸린 지희가 하는 수 없이 쭈뼛쭈뼛 고개를 기울였다.

“장 실장님,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요, 나아, 태성그룹 최대 주주예요. 게다가, 가뜩이나 힘든 회장님 와이프기도 하고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수안은 재밌는 얘기라도 한 것처럼 생긋 웃어 보였다.

지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뜻인데요?”

“내가 장 실장님을 해고시킬 수도 있다는 소리죠.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요.”

“무슨 얘기를 이렇게 즐겁게 하실까?”

지희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다가오는 줄도 몰랐던 도훈이 옆에 우뚝 서며 다정하게 물어왔다.

지희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듯, 당황하여 얼른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냥, 조금 긴장했었는데, 장 실장님 덕에 풀렸어요.”

“긴장은 왜 해. 내가 있는데.”

무뚝뚝하게 툭 던진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손길이 매끈한 머리칼을 쓸다가 어깨를 매만지고 멀어졌다.

“들어갈까?”

“네.”

대회의실 문이 열렸다.

쭉 둘러앉은 주주들의 시선이 나란히 선 도훈과 수안에게로 쏟아졌다.

허리를 쭉 편 수안이 먼저 걸음을 옮기는 도훈의 뒤를 따라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도훈이 가장 상석에 자리하고, 수안이 오른쪽, 그 반대편에 김운철과 박덕규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곧 진행자에 의해 개회가 선언되고 논의해야 할 안건이 공개됐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박덕규가 발언권을 얻자마자 침통한 표정으로 그룹 수장으로서의 도훈의 자질 부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게다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작고하신 회장님의 지분을 상속받은 백수안 양은 바로 어제까지 법적으로 미성년자였습니다.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기도 힘들지 않습니까? 명확한 증거가 없는지라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차도훈 회장과 백기석이 이 회장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공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생깁니다.”

“부회장님, 그건 너무 억집니다. 만일 공모를 했다면 백기석이 저 지경이 되어 있진 않겠지요.”

도훈의 편에 선 주주가 발끈하고 나섰다.

“토사구팽당한 걸 수도 있지요. 그리고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 그게 진실이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왜 이 자리에서 자신의 추측을 얘기하느냔 말입니다.”

“어차피 판단은 주주 여러분들께서 하시는 거 아닙니까.”

덕규는 높아지는 언성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한 뒤 여유로운 태도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회의장은 시끄럽지 않으면서도 어수선했다.

묵묵히 앉아 있는 도훈은 여유롭다기보다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초조해진 수안은 반대편에 자리한 김운철의 기색을 살피기 바빴다.

덕규의 옆에 앉은 걸 보면 심경의 변화가 없는 것도 같고, 덕규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걸 보면 또 뭔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기 짝이 없는 행태에 수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짓가랑이를 잡았어야 했는데.”

“누구 바짓가랑이를?”

“히익, 놀랐잖아요. 왜 갑자기 귓속말을…….”

도대체 회의에 집중이나 하는 건지, 작게 중얼거린 그녀의 말에 도훈이 즉각 반응을 했다.

입술을 붙이기라도 할 것처럼 바짝 들이대고 속삭이는 데에 놀란 수안이 목을 움츠리며 투덜댔다.

“다른 놈 바짓가랑이 붙들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어으, 진짜, 장난치지 말고 회의에 집중이나 해요. 걱정도 안 돼요?”

“걱정을 왜 해. 남편 자리 지켜보겠다고 부지런히 사람 만나고 다니는 든든한 마누라가 옆에 버티고 있는데.”

“아, 알았어요?”

“그럼 몰라.”

“씨이, 현진 언니 완전 배신자.”

“현진 씨 아니야.”

“그럼요?”

도훈의 시선이 김운철을 향했다.

아무래도 김운철이 도훈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김 대표님이 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막 질문을 하려는데, 조용히 다가온 김 비서가 도훈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네고는, 진행자에게로 다가가 잠깐 얘기를 나눈 뒤 회의실 구석으로 물러났다.

도훈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덕규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헛기침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상쇄시킨 뒤 흥겨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자자, 여러분, 나는 이쯤에서 당사자인 차도훈 회장님의 생각을 들어보는 건 어떤가 싶은데요.”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덕규의 시선이 도훈에게 닿았다.

“발언권을 주시니 뭐라도 읊어봐야겠군요. 우선, 하나만 정정하고 가죠.”

가볍게 운을 뗀 도훈이 잠시 말을 멈추고 눈썹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곤란할 때 나오는 습관임을 익히 아는 수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내가 가진 지분 때문에 결혼했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게 너무 거슬려서 말입니다. 내 아내는, 백수안은 그깟 주식 같은 거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회의장에 있는 거의 모두가 헛숨을 삼켰다. 그중 가장 많이 놀라고 어이없어한 건 수안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도훈에게로 집중된 상태만 아니었어도, 옆구리든 허벅지든 아무 데라도 쿡 찌르고 말았으리라.

회의장 분위기를 이상야릇하게 만들어놓은 도훈은 자신의 주특기가 포커페이스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무심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부회장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당시 저희 아버님이 공장장으로 있을 때 물류부장으로 함께 근무했던 사람을 아십니까? 그 사람 이름이 윤…….”

말을 하다 만 도훈이 생각이 잘 나지 않는 듯 자신의 앞에 놓인 몇 장 안 되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윤재호를 말하는 건가? 그 사람은 왜?”

한 장씩 서류를 살피는 도훈이 답답했던지 박덕규가 냉큼 이름을 대며 물어왔다.

“아, 그러네요, 윤재호. 20년이 넘은 일인데 부회장님 기억력이 남다르신 걸까요? 아니면 윤재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셨던 걸까요?”

“무, 무슨……. 자네 아버지 일을 조사하다가 알게 된 것뿐일세.”

“그렇군요. 그럼 그때 영업부장으로 있었던 사람 이름도 기억하시겠군요.”

느긋하게 기대앉아 있던 덕규가 서서히 몸을 바로 했다.

포커페이스에는 영 재능이 없는 듯,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논점을 흐리지 말고 본론만 말하게.”

“그럼 그렇게 할까요. 그 당시 영업부장으로 재직했던 사람은 저기 앉아 계신 이규철 상무이사님입니다. 맞습니까?”

도훈의 지목을 받은 이규철이 간결하게 긍정의 답을 했다.

“현재도 재직 중인 분은 기억 못 하시면서 20년 전에 퇴사한 사람은 기억한다. 참 선별적인 기억력이군요.”

“윤재호 그 사람이 일을 잘해서 눈여겨봤던 기억이 있네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굳은 표정일망정 덕규의 목소리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딱히 꿀릴 게 없다는 모양새였다.

“부회장님의 왜곡된 기억을 한 번 제대로 살려보도록 하죠.”

도훈의 눈짓을 받은 진행자가 회의장 조명의 밝기를 낮추고 스크린에 화면 하나를 띄웠다.

화면에는 초로의 남자가 정면을 주시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19XX년부터 20XX년까지 태성그룹 천안공장에서 물류부장으로 근무한 윤재호라고 합니다.]

자기소개를 한 남자가 근로계약서를 펼쳐 잘 보일 수 있도록 카메라 가까이 댔다가 떼어냈다.

[그때 나는 태성전자 사장이었던 박덕규의 지시에 따라 입고 수량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물건을 빼돌렸습니다.

빼돌린 물건은 박덕규가 처분을 했고, 나는 수수료 명목으로 일정 부분을 받아 챙겼습니다.

그러다 입고 수량이 차이가 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차태진 공장장에 의해 사실이 밝혀졌고, 박덕규는 차태진을 회유하려다가 실패하자 그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웠습니다.

그 자살도, 정말…….]

“지금 이게 무슨 짓거리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일을 꾸며?”

발끈한 박덕규의 목소리에 남자의 목소리가 묻혀 버렸다.

“이건 모함이야! 태성을 키우는 데 내 모든 걸 바쳤어! 그런 내가 태성에 해가 되는 짓을 할 리 없잖아. 이건 나를 태성에서 몰아내려는 저놈의 수작이라고!”

파르르 떨리는 덕규의 손가락 끝이 도훈을 가리켰다.

무심한 표정의 도훈이 김 비서에게 손짓하자, 그가 들고 있던 서류를 주주들 앞에 한 부씩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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