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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내조의 여왕 (77/88)

77. 내조의 여왕

기석이 빠져나가도록 두지 않겠다는 도훈의 다짐은 지켜졌다.

최성진이 제공한 자료에 이자현과 트럭운전사의 진술까지 더해져, 기석은 구금 상태로 줄줄이 사탕처럼 쏟아지는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검찰에서는 이례적으로 기석이 경찰에 구금된 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직무상의무와 품위유지의무 위반을 사유로 들어 해임을 전격 결정하고 통보했다.

검찰로서는 나쁠 게 없는 결정이었다.

태성그룹 사위라는 뒷배경이 사라진 기석은 특별한 효용가치도 없을뿐더러, 나쁜 의미로 유명인사가 된 그를 징계함으로서 검찰에 대한 이미지 쇄신 효과도 노릴 수 있었다.

수안은 그 모든 상황들에서 한발 떨어져, 도훈으로부터 전해듣거나 뉴스로 접하는 게 다였다.

죗값을 치르게 하고 말겠다는 도훈의 의지가 너무 대단해서, 그녀까지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어설픈 복수심에 자신의 감정을 소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지난 과거보다 앞으로의 일이, 유일한 가족의 일이 더 중요했다.

기어코 임시주주총회 날짜가 잡혔다.

안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차도훈 회장의 해임결의안이었다.

도훈은 늘 그렇듯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걸음한 길.

날씨는 더없이 화창하고 내다보이는 정원은 물색없이 고운데, 꼭 필요한 사람은 벌써 한 시간째 묵묵부답이었다.

바짝 긴장했던 마음은 어느새 슬금슬금 풀어져 제집인 양 하품마저 비집고 나왔다.

이제나저제나 목 빼고 기다리는 게 안쓰러웠는지, 자신을 이 저택의 집사라고 소개한 여자는 음료와 간식거리를 들고 여러 번 들락거리며 그만 돌아가라 종용했다.

하지만 은근한 똥고집이 특기인 수안은 유일한 가족이라는 말에 제대로 꽂힌 상태였다.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를 꼬박 버티래도 버틸 참이었다.

그런 수안의 의지가 통한 건지 막 세 번째 하품이 시작되었을 때, 여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수안은 한껏 벌린 입을 한 손으로 가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응접실로 들어서려던 대성캐피탈 김운철 대표가 뜨악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당황한 수안이 급히 자세를 바라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만 볼썽사납게 주저앉고 말았다.

입술을 깨무는 수안에게서 앓는 소리가 절로 샜다.

김 대표의 미간과 입술이 꿈틀꿈틀 춤을 췄다.

“다리에 쥐가 나서……. 그냥 웃으셔도 돼요.”

“흡, 흠흠, 좌식이 익수지 않았나 보구먼. 이거 본의 아니게 괴롭힌 꼴이군.”

“뭐, 좌식인 거 빼고는 한 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만큼 좋았으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괜한 헛기침을 한 김 대표가 수안과 마주하고 앉았다.

“정 실장, 여기 차 좀 다시 내와.”

찻잔이 비어 있는 걸 본 김 대표가 밖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곧 정 실장이 들어와 수안과 김 대표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나갔다.

“차나 한 잔 더 하고 돌아가.”

“그럴 거였으면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진 않았겠죠. 임시주주총회 소집통지서 받으셨죠?”

“그래. 5월 17일이더구나.”

공교롭게도 임시주총이 열리는 날은 수안의 생일 다음 날이었다.

그 때문에 5월 16일로 예정해 두었던 결혼식은 물론이거니와 수안의 생일파티도 임시주총 뒤로 미뤘다.

도훈은 극구 반대했지만, 수안의 고집이 대단했던 데다, 편한 마음으로 즐거운 날을 맞이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을 무시할 수가 없어 마지못해 동의해 주었다.

임시주총의 결과가 생일파티를 겸한 그들의 결혼식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 테지만, 결과가 좋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마음이었다.

“박덕규 부회장님한테 협박을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찻잔을 기울이던 김 대표의 미간이 짙게 일그러졌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열아홉에 집을 뛰쳐나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다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스물다섯 살 때부터 사채놀이를 시작해서 대성캐피탈이라는 번듯한 회사를 차리기까지, 그에게 옳은 일은 오직 돈이 되는 일이었다.

처음엔 불법인지 모르고 불법적인 일을 했고, 나중에는 불법인지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가진 거라곤 몸뚱어리밖에 없는 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랑스러워할 일은 못 되지만, 제 삶에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도 없었다.

그걸 박덕규 그 양아치 같은 놈이 걸고넘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운철은 말 몇 마디 나누는 것만으로도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 파악해 낼 수 있었다.

박덕규는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능력도 안 되면서 욕심은 많아서 야비한 짓거리를 서슴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백기석 그놈이 정보제공자더군.”

일순 수안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20년 가까이 함께 일하다가 틀어져서 나간 놈을 협박하고 회유해서 얻어낸 정보를 박덕규에게 제공했어.”

“모, 몰랐어요.”

“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고. 뭐, 내가 손댈 필요도 없이 차 회장이 잘 처리해 주고 있으니까. 흠, 이 회장님이 사람 하나는 잘 들였지.”

검찰총장까지 움직여서 백기석 목을 친 사람이니 더 말해 무엇 할까.

절대로 적으로 돌리면 안 될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어쨌든, 빌어먹게도 이번에 난 박덕규 쪽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어. 그렇게 알고 이만 돌아가.”

운철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수안이 가방에서 오래되어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종이와 수안을 번갈아 바라보던 운철이 머뭇머뭇 종이를 집어 들어 펼쳤다.

“하아!”

허탈함, 난감함, 아니면 그리움.

너무 많은 감정이 그의 한숨 한 자락에 고스란히 섞여 있었다.

“이걸 여태 보관했을 줄은…….”

“투자한 건 꼭 받아내는 분인 거 아시잖아요.”

“여기에 얽힌 사연도 들은 건가?”

“대충요.”

사채놀이를 시작한 지 2년쯤 되어갈 무렵, 이자를 많이 주겠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제가 가진 전부를 빌려주었다가 떼일 처지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그쯤은 별다른 지시 없이도 척척 해결할 직원들이 지천이지만, 그땐 배 째라며 막무가내인 작자 앞에서 제 속만 새까맣게 태우던 시절이었다.

마침 그 작자가 운영하는 공장에 물건을 납품하던 이 회장을 만난 건 천운이었다.

그는 공장의 기계를 압류해 자신의 밀린 물품 값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운철의 돈도 챙겨주었다.

그 돈을 못 받으면 영락없이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 처지라 죽을 각오까지 했기에, 그에게 이 회장은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크나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바로 갚을 여력이 없어서,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아 제 손으로 직접 써서 건넨 종이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태봉 사장님의 은혜 절대로 잊지 않고, 언제고 반드시 갚겠습니다.

감사한 마음과 신념을 담아 또박또박 눌러쓴 문장을 착잡한 눈길로 보고 있던 운철이 표정을 굳힌 채 수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수안이 넌 이 회장님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일군 회사를 박덕규 같은 사람 손에 넘기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이미 파악 끝내셨겠지만, 앞으로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차도훈이에요.”

“그래, 파악 끝냈지. 차도훈 회장은 지금 당장 내쳐진다고 해도 다시 제자리를 찾을 사람이라는 것까지 말이다.”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때에도 김 대표님과 함께하게 될지는 의문이네요.”

수안의 말에 종이를 접던 운철의 손이 잠깐 멎었다가 다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주제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거기에서 벗어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박덕규 같은 사람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조곤조곤 말을 끝낸 수안이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종이는 선물로 드릴게요. 부디 현명한 판단 부탁드립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수안이 미련 없이 저택을 벗어나 현진이 기다리고 있는 차에 올랐다.

“휴우!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질 걸 그랬나 봐요.”

“뭐야, 안 잡았단 말이야? 엄청 오래 걸리기에 바지를 아예 홀딱 벗겨 버리는 줄 알았더니.”

“언니!”

“하하하. 내조의 여왕님 이쯤 하고 그만 댁으로 가십시다.”

“아저씨한테 연락 왔어요?”

“말이라고. 너 왜 전화 안 받느냐고 아주 안달복달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거짓말하지 말아요. 기껏해야 무슨 일 있는 거 아닙니까? 그 한마디 물어봤을 게 뻔한데, 무슨.”

“오오, 이심전심. 어떻게 그걸 딱 맞추니?”

현진의 너스레에 수안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씰룩거렸다.

“암튼 그 한마디에 엄청나게 많은 감정이 함축적으로 담긴 것 같다 이 밀이지. 그러니 되도록 빨리 귀가하자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수안의 얼굴이 한숨 쉰 적이 있나 싶게 맑게 개어 있었다.

임시주총을 코앞에 둔 상황에 김 대표의 확답도 받지 못했지만, 도훈만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도 자신과 같기를 바라는 마음이 참으로 애틋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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