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가족이니까
“그거 여기 어깨랑 가슴이랑 너무 파였다고 안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나마 그게 제일 덜 파였어. 여기 옷은 죄다 가리는 용도가 아니라, 효율적으로 내보이는 용도 같으니 원, 쯧.”
“뭐지? 설마 지금이 조선시댄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거야? 나, 한복 입고 결혼식 해요?”
“그거 괜찮은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장난 좀 쳐보려다가 덤터기를 쓴 수안이 새치름하니 도훈을 노려봤다.
그게 뭐 그리 우스운 일이라고 도훈은 왁자한 웃음부터 쏟아냈다.
“한복은 50년 후쯤에나 입는 거로 하고, 이번엔 첫 번째 거로 하자.”
오늘따라 말도 많고 웃음도 많은 도훈이 50년 후 리마인드 웨딩 의상까지 일사천리로 결정한 뒤, 수안을 일으켜 피팅룸으로 등 떠밀었다.
“갈아입고 나와. 놀러 가자.”
“우리 놀러 가요? 어디요?”
“네가 가고 싶은 데.”
“어, 그런 거 생각 안 해봤는데. 미리 힌트라도 줬어야지 생각을 해놓죠. 어디 가지?”
급하게 말을 쏟아내는 수안의 얼굴이 한여름날 햇살처럼 쨍했다.
“옷 갈아입으면서 천천히 생각해.”
“금방 갈아입고 나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넘어진다, 수안아, 천천히…….”
뒷걸음치다가 획 돌아서는 수안이 휘청하자 도훈의 손이 절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미처 닿기도 전에 저 혼자 중심을 잡은 수안이 피팅룸 안으로 쪼르르 달려가 문을 닫아버렸다.
뻗었던 손을 내린 도훈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말갛게 지워졌다.
휴대폰을 꺼내 올라온 기사를 확인하는 눈길이 깊게 가라앉았다.
피팅룸 문이 열리는 순간 잘 웃는 차도훈으로 금세 탈바꿈했지만, 그의 의도대로 정신의 반은 뺏긴 수안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
“나미야, 미안. 벨소리 못 들었어.”
토요일 오후의 한강 둔치에는 산란하는 봄볕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꽤 법석였다.
야외라 청각이고 시각이고 한군데 묶여 있기 어려운 데다가, 도훈의 도발에 넘어가 자전거까지 타며 엎치락뒤치락하느라 가방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목 놓아 울어대는 건 알지도 못했다.
음료수를 사러 간 도훈에게 물티슈도 사오라는 주문을 넣으려다가 어마무시하게 찍힌 나미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수안아, 너 괜찮은 거지?]
나미가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수안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지 그럼. 왜, 너 무슨 일 있어?”
[내가 무슨 일 있을 게 뭐 있어. 괜찮다니 다행이다. 나는 너 충격받아서 전화도 못 받고 끙끙 앓고 있는 줄 알고, 집으로 쫓아가 봐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짜식, 의외로 대범한대. 이제 너희 아버지 일엔 초연해지기로 한 거야?]
“……그렇지 뭐.”
[그래, 그래, 잘 생각했다. 네가 끙끙 앓고 있으면 억울하게 돌아가신 너희 할아버지랑 엄마는 더 가슴 아플 테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 수안아.]
“갑자기 할아버지랑 엄마 얘기는 왜…….”
[너희 아버진, 아니, 이제 그렇게 부르지도 말아야겠다. 그 인간은 어쩜,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한다니. 어우, 끔찍해.]
뜻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말들이 난분분했다.
종일 꿈결인 듯 둥실 떠다니다가 갑자기 험한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목소리에서 꿀 떨어지는 거 보니 사장님이랑 같이 있는 거지? 괜찮은 거 확인했으니까 이만 전화 끊어야겠다. 월요일에 보자.]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내용은 아직 파악도 못 했는데, 가슴이 먼저 덜컥 내려앉았다.
얼추 짐작을 하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조작하는 손이 제가 보기에도 안쓰럽게 떨리고 있었다.
조그만 화면 위에 자극적인 낱말을 줄줄이 이어붙인 헤드라인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따뜻한 어둠에 감싸였다.
“보지 마.”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은 도훈이 커다란 손으로 눈을 가려 버렸다.
곧이어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쑥 빠져나갔다.
“아저씨는, 알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오늘…….”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얕은 한숨과 함께 손을 떼어낸 도훈이 수안의 옆을 차지하고 앉았다.
“오늘은, 아니, 내일도 나만 보면 안 될까? 그보다 더 오래도록 봐주면 더 좋고.”
제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짜증 나는 듯, 수안이 거칠게 눈물을 훔쳐 냈다.
“나를 왜 자꾸 바보로 만들어요. 아무것도 안 보고 안 듣고, 멍청이처럼 희희낙락 꿈속에서 살길 바라요? 대체 언제까지요? 내가 그렇게 미덥지 못한가요? 그래요?”
“수안아.”
“평생 아저씨 그늘에 묻혀 살길 바라는 거예요? 왜요? 왜 그래야 하는데?”
“가족이니까.”
“…….”
“네가 내 유일한 가족이니까.”
도훈의 말에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을 토해내던 수안의 입이 벙하니 벌어졌다.
주책없이 계속해서 흐르던 눈물도 얼결에 멈춰 버렸다.
“허망하게 아버지를 잃었어. 그보다 더 허망하게 회장님과 누님을 잃었고. 너만은 반드시, 어떤 상처도 받지 않도록 지켜내고 싶어.”
한차례 마른세수를 한 도훈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네가 못 미더운 게 아니라, 나는 단지 나를 믿을 수 없는 것뿐이야.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만에 하나 너마저 잃게 된다면, 나는…….”
자신의 약한 부분을 내보이는 게 영 내키지 않는 것처럼 말을 끝맺지 못한 도훈의 시선은 먼 데를 헤맸다.
수안이 미처 떨어지지 못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흠결 없이 잘나서 매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도훈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외양이든 내면이든 제게는 항상 큰 사람이었기에, 그가 설핏 내보인 상처와 연약함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도훈의 강박적인 보호본능은 단순한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이 아닌, 가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음을 깨달았다.
부부라는 관계에만 집중한 나머지, 미처 연관 짓지 못했던 유일한 가족이라는 말이 가슴속을 아프게 둥둥 울렸다.
“그러니까 더 알려줬어야죠.”
“네가 상처받고 아파하는 게 싫어.”
내용과는 별개로 꼭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 같은 그의 말투에 수안은 상황에 맞지 않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나한테는 충분히 약해.”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고집스러움에 수안이 푸지게 한숨을 쏟아냈다.
“내가 유일한 가족이라면서요. 나도 그래요. 나한테도 아저씨가 유일한 가족이니까. 그 사람은 내 가족이 아니니까. 할아버지랑 엄마 생각하면 충격적이고 화가 나지만, 아프진 않아요.”
내내 비껴 있던 도훈의 시선이 수안에게로 향했다.
수안의 속내를 가늠해 보는 눈길엔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이내 뻗어온 손길엔 애잔함이 묻어 있었다.
부드럽게 눈물을 훔쳐 내는 그의 표정엔 이러고도 진짜 아프지 않느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이건,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남편이 그렇게 지독한 사람이라는 거 모르고 돌아가셔서 차라리 잘됐다 싶다가도, 엄마 인생이 너무 딱해서…….”
도훈이 지워낸 보람도 없이 눈물은 다시 맺혔다가 흘렀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입술은 앞니에 억세게 물렸다가 놓여났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할머니랑 사이도 좋으셨다니까. 워낙 욕심 많은 분이라서 성에는 안 차셨겠지만, 그래도 많은 걸 해보고 가셨으니까 조금 덜한데, 울 엄만 아니잖아요. 왜 그런 사람을 만나서, 흣.”
참고 참은 울음이 터져 나오자마자 더운 품에 담뿍 안겼다.
소리 없는 울음이 도훈의 품으로 몽땅 삼켜졌다.
“너 처음 만났던 날, 대문으로 들어서는 널 보면서 누님이 그러더라.”
“우리 딸 참 예쁘지? 기석 씨하고 나 사이에서 어떻게 저렇게 예쁜 아이가 나왔나 몰라. 그래서 그 사람 만난 거 후회 안 하려고. 수안일 보고 있으면, 많이 행복하거든.”
도훈이 전해준 주은의 얘기는 수안을 슬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했다.
도훈의 품에 안겨 다정한 손길에 머리를 내맡기고 수안은 꽤 오래 엄마를 생각했다.
“아저씨.”
“음?”
“그 사람,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죗값을 치르게 되겠지.”
“또 저번처럼 빠져나가 버리면…….”
“그것 때문에 네가 맞기까지 했는데,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
어림없는 소리라며 으름장을 놓는 도훈의 얼굴에 금세 날이 섰다.
“내가…….”
“아니, 내가 해. 뭐가 됐든 내가 할 거야.”
도훈의 단호한 말에 반항심이 울컥 치솟았지만, 그에게 따지고 들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뭐든 쉽게 변하는 건 없으니까, 차차 맞춰가면 될 일이었다.
“그래도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려주긴 할 거죠?”
“그래.”
조금의 틈을 두긴 했지만, 그는 너무나 익숙한 긍정의 답을 들려줬다.
수안은 칭찬이라도 하듯 그의 허벅지를 두어 번 토닥였다.
나른한 숨결이 흩뿌려지나 싶더니, 정수리로 그의 입술이 꾹 내려앉았다.
서로의 어깨를 내어준 남녀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