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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애처가 (75/88)

75. 애처가

도훈은 눈빛만으로 성진에게 싸늘한 질책을 날렸다.

차라리 욕하고 난리법석을 떠는 고객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도훈의 눈에서 감정이 싹 지워졌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수안이 부탁하는 건 들어주되, 보고는 필숩니다.”

“아, 네, 물론입니다. 저, 그러면 계약을 계속 유지하시는 겁니까?”

“최 소장님이 별 이견이 없다면요.”

“저야 물론 없죠. 수안 양이 다쳐서 계약 파기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수안이가 받아야 할 것 같네요. 혹시라도 최 소장님이나 현진 씨한테 부당한 처사가 내려지면 가만 안 있겠다고 하더군요.”

“허허, 역시 애처가시네요.”

계약 파기의 걱정을 던 성진이 기분 좋게 한마디 건넸다.

도훈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버릇인 듯 눈썹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워낙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혹시나 불쾌한 건가 싶어 유심히 살피던 성진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믿을 수 없게도 도훈의 귓불이 붉어져 있었다. 자세히 뜯어보니 입꼬리도 살짝 올라간 듯했다.

애처가라는 말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흠흠, 그만 일 얘기합시다. 이번이 기회라고 판단했다니, 기회를 잘 살려봐야죠. 한 번에 다 터뜨립시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인구 검사장과 얽힌 게 너무 많다 보니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럼 경고부터 해야겠군요.”

“경고요?”

“수집한 자료 내일부터 하나씩 언론사에 풉시다. 조 검사장이 그렇게 의리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진흙탕에서 같이 뒹굴 생각이 아니라면 발 빼겠죠.”

“하하하, 그거라면 자신 있죠. 제가 또 그쪽으로 발이 넓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어깨를 들썩이는 성진에 비해 도훈의 표정은 차분하다 못해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신그룹 둘째 딸 구속영장 기각시킨 것부터 가죠.”

“그렇죠. 관심을 집중시키려면 아무래도 그런 자극적인 얘기가 터져 줘야겠죠. 알겠습니다.”

“이자현 씨 음성파일과 트럭운전사 인터뷰 딴 건 가장 나중에 공개합니다. 그리고 이주은과 백수안 폭행 사실은 뺄 겁니다.”

“네? 그걸 빼면…….”

“그거 아니라도 지은 죄는 넘쳐 나니까요. 아내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싶습니다.”

이 회장과 이주은의 죽음에 백기석이 관련되어 있다는 걸 수안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이 공개됐을 때의 충격도 만만치 않을 텐데, 여러 사람들 입에 가십거리로 오르내리는 고통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도훈의 심중을 간파한 성진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아내를 사랑하시는 분이 왜 그렇게 울리셨을까? 현진이 녀석, 그간 정이 꽤 들었는지, 수안 양 울음소리 듣고 펄펄 날뛰는 통에 아주 혼났습니다.”

“최현진 씨가 사촌 동생이라고 했던가요?”

“네. 쉽게 정 주고 그러는 녀석이 아닌데, 수안 양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더라고요.”

성진이 싱글싱글 웃으며 노트북을 챙겨 일어났다.

“우리 수안이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죠.”

하마터면 성진은 들고 있던 노트북을 떨어뜨릴 뻔했다.

저런 소릴 할 때는 그럴듯한 미소라도 지어주면 괴리감이 덜 들 텐데, 진지에 밥 말아먹은 얼굴이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아, 하하, 예, 뭐, 예쁘고 당차고 귀여운 구석도 있고, 매력이 넘치긴…….”

“최 소장님까지 그렇게 볼 필요는 없고요.”

어쭈, 질투마저도 아주 진지하게 해주시고. 잘하면 한 대 칠 기세네.

노트북을 옆구리에 낀 성진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했다.

“하하, 저는 늦어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혹시라도 특이사항이 생기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성진은 도망치듯 빠져나오면서도 기분이 꽤 좋았다.

조사를 거듭하면 할수록 백기석이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그 쓰레기 처리에 일조를 하게 됐으니, 흥겹지 않을 리 없었다.

“내일부터 더 바빠지겠구먼.”

일다운 일을 할 생각에 성진의 발걸음은 날 듯이 가벼웠다.

다음 날부터 백기석 검사에 대한 기사가 각종 언론매체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검의 백기석 부장검사가 딸의 납치를 사주하고 납치에 직접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습니다.

한편, 백기석 검사는 지난해 5월 LSD(강력한 환각제의 하나) 밀반입 혐의를 받고 있던 해신그룹 대표회장의 차녀 이재인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조건으로 해신그룹으로부터 억대의 주식을 양도받은 것으로 알려져…….

―백기석 검사의 비리에 관한 제보가 계속되는 가운데, 서울중앙지검의 주xx 검사가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해 다시 한번…….

검찰개혁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던 와중이라 연일 쏟아지는 백기석 검사의 비리에 관한 제보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그가 경찰에 구속된 직접적인 요인인 납치사건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작년에 이재인의 마약 밀반입사건이 워낙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데다 얼마 전에는 그녀의 갑질 영상까지 공개됐던지라, 상대적으로 납치사건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자극적인 얘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서 수안의 노출을 최소화하려는 도훈의 의도가 제대로 먹혀든 셈이었다.

또한 백기석으로부터 조인구 검사장을 분리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조 검사장이 그리 의리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도훈의 생각은 정확히 적중했다.

검찰개혁이다 뭐다 시끄러운 이때에 괜한 일에 얽혀 이름이 오르내리면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조 검사장은 극도로 몸을 사렸다.

상황은 점점 기석에게 불리해지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이 회장과 이주은의 살인을 교사한 정황들이 언론에 노출되는 날이었다.

심사숙고해서 고른 날은 토요일 이른 오후였다.

도훈은 금요일 오전 강의뿐인 수안과 2박 3일을 꼬박 붙어 있을 요량으로 어제 연차휴가를 냈다.

수안을 되도록 홀로 두지 않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에게도 나름 선물 같은 시간이 되고 있었다.

“아저씨, 어때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뱅그르르 한 바퀴를 돈 수안이 톡 터뜨리면 상큼함이 물씬 풍길 것 같은 웃음을 머금고 물어왔다.

“너무 짧아.”

수안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온 치마 끝자락을 내려다보다가, 거하게 한숨을 내쉬는 디자이너 선생님에게 미안한 눈길을 보냈다.

“억지 부리지 마요.”

“그러면 뱅글뱅글 돌지 말았어야지.”

적정한 길이로 보였던 드레스는 수안이 한 바퀴를 도는 사이 물결치듯 다리에 휘감기며 매끈한 허벅지를 감질나게 드러냈다.

완전한 노출보다 저렇게 언뜻언뜻 보일락 말락 하는 게 더 색정적으로 느껴진다는 걸 깨달아 버린 순간이었다.

그러니 저 드레스는 안 된다. 엄한 놈들 눈요기 시켜줄 일 있나.

도훈은 더 이상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턱을 치켜들고는 얼른 다른 것으로 갈아입으라며 무성의하게 손짓을 했다.

안 그래도 도톰한 입술을 쭉 내밀고 도훈을 노려보던 수안이 쿵쾅거리며 걸어가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래, 좀 쉬었다가 할까? 나도 뭐 좀 마셔야겠다. 얼음 얼려놓은 게 있으려나?”

화를 참고 있었던 게 분명한 디자이너 선생님이 이때다 싶은지, 손부채질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룸을 나가 버렸다.

미안한 마음까지 더해져 심통이 더 불어난 수안이 떼쓰듯 발을 쿵 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 나름 유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도훈은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진 뾰로통한 입술을 만지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사납게 눈을 치켜뜬 수안이 그의 손을 툭 쳐냈다.

“이제 더 이상 못 해요. 아니, 안 해. 지금까지 입은 것 중에서 골라요. 이게 뭐야. 이 화창한 날에 여기 처박혀서 계속 입었다 벗었다. 선생님한테 미안해서라도 더는 못 하겠으니까 알아서 해요.”

발까지 동동 구르며 심통을 부리는 수안을 꿀 떨어지는 눈길로 바라보던 도훈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도훈의 기분은 좀체 나빠질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제대로 충전을 한 덕분이 아닌가 했다.

휴가를 낸 기념이라며 억지를 부려 밤새 욕심껏 수안을 안았다.

곧잘 따라오다가도 한 번씩 졸리다, 목마르다 투정을 부려대는 수안을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절절함으로 꼬여내 탐하고 또 탐했다.

동그랗고 조그만 머리통에 오롯이 저 하나만 가득 차도록, 다른 건 미처 돌아볼 틈이 없도록 거듭 사랑을 나누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으나, 그런 걸 따질 여력이 없을 정도로 숨이 멎어도 좋을 것 같은 꿈결같은 밤이었다.

수안의 정신을 빼놓을 목적이었으나, 자신의 정신 또한 반은 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일상인 듯 평화로이 앉아 있으니, 그깟 정신이야 조금 모자라도 그만이다 싶었다.

이대로 세상 모든 잡스러운 것들로부터 수안을 온전히 떼어놓을 수만 있다면, 정신이 아니라 더한 걸 달래도 상관없을 듯했다.

“제일 처음에 입었던 거로 할까?”

“제일 처음? 어떤 거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아저씬 기억나요?”

“그럼 안 나? 완전 눈부셨는데.”

수안의 미간이 기억을 더듬느라 예쁘게도 찡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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