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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울지만 마 (74/88)

74. 울지만 마

빠르게 쿵쿵대는 소리가 수안의 귓속을 가득 채웠다.

“너 아주 날 말려 죽일 셈이야?”

수안을 조금 떼어낸 도훈이 턱을 받쳐서 살짝 들어 올렸다.

미간에 짙은 주름이 생기는 걸 힐끔 쳐다본 수안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도대체 이게…….”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터진 입가에 닿을 듯 말 듯한 손가락에서도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화내지 말아요. 진짜 보기만 그렇지, 많이 다친 거 아니에요.”

“내가 지금 화내는 거로 보여?”

“아니에요?”

“아니야.”

“그러면 다행이고요.”

다행이라는 수안의 말에 도훈이 끝끝내 발끈하고 말았다.

“이 꼴을 해서, 다행이란 소리가 나와? 그런 여자를 네가 왜 만나고 다녀?”

최성진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오는 동안 절대로 화내지 말아야지, 얼마나 다짐을 하고 또 했는지 모른다.

수안에 관해서라면 뭐가 됐든 과해지는 자신을 알기에 냉정을 유지해 보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런데 모두 허사였다. 피가 맺힌 입술과 여기저기 푸릇하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얼굴을 보는 순간, 챙겨온 이성의 반이 날아갔다.

거기다 대고 다행이라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 안 그래도 뭉크러진 가슴에 홧홧하게 열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화내는 거 아니라더니 왜 소리는 지르구…….”

“하아! 화내는 거 아니고, 걱정하는 거야.”

도훈이 항복 선언이라도 하듯 맥없이 웅얼거렸다.

뾰로통하니 힐끔거리는 눈이 사람 애간장을 쉬이 녹일 정도로 어여뻐서, 설사 화가 있었대도 죄다 녹아 없어질 판이었다.

수안이 내보이는 사랑스러움엔 도대체가 면역이 생기질 않았다. 그러니 절제라는 건 생각조차 못 했다.

소소한 눈길 하나마저도 악착같이 제 것으로 하고 싶은 욕심이 저조차도 겁날 지경이었다.

이런 끝 간 데 없는 애착에 수안이 질려 나가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며칠 거리를 둔 거였다. 그녀 한정으로 희박해지는 자제심을 쥐똥만큼이라도 끌어올려, 마주했을 때 어느 정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같잖은 질투심으로 수안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수안의 보고 싶었다는 한마디에 터무니없이 무너져 버리는 자신을 맞닥뜨리곤, 생살을 도려내는 것 같던 며칠간의 인내가 모두 헛짓거리였음을 깨닫고 말았다.

벽을 세우고 살았던 세월이 너무 길어, 처음으로 아낌없이 마음을 내어준 사람에게 그대로 미쳐 버렸다.

마음은 그야말로 안달복달이었다.

긁힌 상처 하나에도 눈이 뒤집힐 판에, 얼굴에 맞은 흔적을 주렁주렁 달고 앉아 있으니 속이 좋을 리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어머니를 사칭한 여자를 만나느라 생긴 일이었다.

걱정이라는 말로 순화하고 애써 감정을 억눌렀지만, 들끓는 속은 말이 아니었다.

또다시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이 폐부를 들쑤셨다.

그런 복잡한 심경을 짐작조차 못 한 수안은 한층 누그러진 도훈의 목소리에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놓고 말았다.

“나도 아저씨가 걱정돼서 그런 거란 말이에요.”

말실수 좀 한 거가지고 며칠간 그녀를 방치해 둔 그에게 투정 부리듯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렇게 말하면 감격까지는 아니라도, 그간의 일에 대해 조금은 미안해하지 않을까 나름의 계산까지 끝낸 터였다.

“뭐가?”

그런데 도훈의 말끝에 날이 섰다.

의외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며칠 삐쳐 있었던 게 괜스레 민망해서 그러려니 지레짐작한 수안이 내내 말 않고 있던 일을 슬그머니 꺼내놨다.

“임시주총 열릴 수도 있다면서요. 박덕규 부회장이 아저씨 아버님 일로 트집을 잡는다고…….”

“어디서 들었어?”

묻는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소리를 질렀던 순간은 화난 게 아니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온도 차가 극명했다.

그저 묻는 게 아니라 답을 꼭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도훈의 태도에 수안의 망설임이 깊어졌다.

차마 지희에게 들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의 일을 지희를 통해 알았다는 사실이 은근 자존심 상하기도 했고, 또 그의 비서실장을 꿰어낸 꼴이라 양심에 찔리기도 해서 대충 얼버무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냥, 나도 이래저래 아는 사람이 있어요. 알아보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그러니까 이래저래 아는 사람 누구?”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지. 아직 외부엔 알려지지 않았고, 분명 회사 내 사람이란 소린데, 쓸데없이 입을 놀리는 사람을 그대로 둘 순 없잖아.”

“쓸데, 없어요?”

냉정하게 쏟아지는 도훈의 말을 듣고 있던 수안의 눈이 단어 하나에 심란해져 찰랑댔다.

“남편의 일을 알고 싶은 게, 남편이 걱정돼서 그러는 게 쓸데없는 거예요?”

“곡해하지 마.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리고 네가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일이었어.”

“나는, 아저씨한테 도움이 되고 싶은 것뿐이에요.”

도훈의 말에 미간만 찌푸리고 있던 수안이 시무룩하니 중얼거렸다.

“수안아, 네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어. 이런 꼴을 당하면서까지 나를 도울 필요도 없고.”

도훈이 붉게 터져 손댈 수도 없는 입술 대신 부드러운 머리칼을 매만지며 타이르듯 속삭였다.

“하지만 임시주총에 해임안이 상정되는 건 막고 싶단 말이에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아저씬 해임돼도 상관없는 거죠? 언제든 다 놓고 떠나고 싶은 거죠?”

“그게 무슨 소리야?”

“아저씨가 지금의 위치에 미련이 없을 거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붙잡아둘 수 있으면……. 되게 이기적이라는 거 아는데, 나는 이제 아저씨 없이는…….”

며칠간 느꼈던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저는 사랑이라도, 도훈은 아닐 수 있다는 걸 알아 더욱 서러웠다.

요 며칠간 방치되면서, 도훈이 놓아버리고자 하면 그들의 관계는 얼마든지 끝날 수 있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아 버렸다.

“며칠 동안 나는 계속 그 생각만 했어요. 이대로 아저씨와 영영 멀어져 버리면 어쩌나, 그 생각만…….”

기어코 어깨가 가냘프게 떨렸다.

막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이 무거울 리도 없는데, 고개가 푹 떨어졌다.

“이 바보야, 왜 그런…….”

침대가 끼익 하며 비명을 질러대더니, 한쪽이 묵직하게 눌렸다.

그리고 웅크리고 있는 수안의 몸이 도훈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그럴 리 없잖아. 내가 어떻게 너를 멀리할 생각을 하겠어.”

“흣, 그럴 것처럼 피해 다녔잖아요. 며칠 동안 코빼기도 안 보여줘 놓고, 흐윽.”

“잘못했어, 수안아. 이제 다신 안 그래. 그러니까 그만 울자. 응?”

소중하게 보듬고 온 마음을 다해 달래는데도, 어찌 된 게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 가기만 했다.

“수안아, 이러다 지친다. 뚝 하자, 응? 차라리 기분 풀릴 때까지 때릴래? 싫어? 그럼 무릎이라도 꿇을까? 뭐든 원하는 대로 해줄게. 울지만 마.”

도훈이 애걸복걸 달래는데도 설운 울음소리는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

[저번엔 이자현 씨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못할 거예요, 아버지.]

[입 닥쳐. 그러게 그때 얌전히 사인했으면 이런 번거로운 짓거린 다시 안 했을 거 아니야.]

가늘게 떨리는 수안의 목소리에 이어 신경질적인 기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연이어 들린 ‘퍽’ 하는 소리와 얕게 앓는 소리 또한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창을 향해 선 도훈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널찍한 등이 감정을 나타낼 리 없으니, 오직 핏줄이 불거지도록 꽉 움켜쥔 주먹만이 그의 격정을 표출해 내고 있었다.

음성파일은 수안의 간절한 속삭임 뒤로 끝이 났다.

최성진은 긴장한 채 도훈을 주시했다.

도훈이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밖으로 표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번만큼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간이 바짝 졸기 일보 직전이었다.

“최 소장님.”

“크윽, 네, 네?”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듯 놀라는 성진을 돌아선 도훈이 지그시 쳐다봤다.

“백기석이 관련됐으리라곤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 여자가 진짜 회장님의 어머니건 아니건, 회장님한테 상처가 될 거라면서 먼저 만나보겠다고 수안 양이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바라보는 눈길만으로 바짝 긴장한 성진이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백기석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애들 바로 투입했어야 했는데, 들으셨다시피 수안 양이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수안 양의 안전을 최우선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저도 백기석의 덜미를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상의 어떤 기회도.”

감정이 복받친 듯 언성을 높였던 도훈이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수안이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이어진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들렸지만,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은 분노에 휩싸인 도훈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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