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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다행이에요 (73/88)

73. 다행이에요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기석을 필두로 덩치가 큰 남자도 함께 차에서 내렸다.

수안의 숨이 가빠졌다.

“오랜만이구나.”

기석의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붙박여 있던 수안의 한쪽 발이 찔끔 움직였다.

“오지 말아요. 아직 아니에요. 제발 잠시만 시간을 줘요.”

수안이 누구에게 하는 건지도 모를 소리를 빠르게 중얼거렸다.

“잡아!”

나직하게 떨어진 기석의 명령에 득달같이 움직인 남자가 수안의 팔을 움켜쥐었다.

“아버지, 이건 납치예요. 놔주지 않으면 소리익.”

커다란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버티자 몸이 답삭 들렸다.

“얼른 차에 실어!”

짐짝 취급하는 것 같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차에 태워지면 큰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수안은 틀어 막힌 입을 간신히 움직여 투박한 손을 앞니로 무는 데 성공했다.

뜯어버릴 듯 이에 힘을 주자 비릿한 혈향이 들이쳤다.

남자의 앓는 소리와 함께 입이 놓여났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퍽!

한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아찔하게 흐려지는 통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몰랐다.

남자가 거친 욕설을 토해냈다.

“뭐 하는 거야! 차에 빨리 태우라니까.”

얻어맞아서 멍한 머릿속으로 기석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팔이 억세게 잡혔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쳐다보지 않아도 누가 자신의 팔을 잡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오래도록 자신을 아프게 했던 손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손이 분명한데, 낯모르는 남자의 손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는 휘청거리는 수안을 끌어다가 강제로 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넌 운전이나 해.”

기석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깔린 뒤, 곧 수안의 옆자리로 올라탔다.

“난 여기서 따로 갈래요. 돈이나 빨리 입금.”

“시끄러. 지체할 시간 없으니까 입 다물고 얼른 타.”

애걸하는 듯한 여자의 의견이 기석의 차디찬 말에 묵살됐다.

잠시 망설이던 여자가 하는 수 없이 조수석에 타고, 운전석에 자리를 잡은 남자가 이내 시동을 걸었다.

“이번 납치도 저번처럼 실패할 거예요.”

한껏 움츠린 수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포에 전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앞에 둔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번엔 이자현 씨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못할 거예요, 아버지.”

“입 닥쳐. 그러게 그때 얌전히 사인했으면 이런 번거로운 짓거린 다시 안 했을 거 아니야.”

기석의 손이 수안의 관자놀이 부근을 퍽 후려갈겼다.

머리가 띵해지는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수안이 몸을 바짝 웅크렸다.

“지금이에요. 빨리, 빨리요.”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간절한 중얼거림이 기석의 예민한 촉을 자극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기석이 수안의 머리채부터 휘어잡았다.

“백수안, 지금 뭐라고 중얼거린 거야? 너,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기석의 다그침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이 탄 차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은 차에 부딪쳐 급정거를 했다.

기석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움켜쥐고 있던 수안의 머리칼이 놓여났다.

모든 걸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침착함을 잃지 않은 수안이 잠긴 문을 열고 차 밖으로 튀어나갔다.

최 소장과 경호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기석의 차를 에워쌌다.

가장 먼저 다급하게 다가온 현진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대는 수안을 끌어안았다.

“어, 언니이. 흑, 흐윽.”

내내 억눌러 놓았던 울음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너 얼굴이 이게 뭐야! 이 지경이 돼서 고집을 부렸단 말이야!”

현진이 입술이 터지고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수안의 얼굴을 부여잡고 소리를 질러댔다.

경호원이라기보다 친한 언니나 할 법한, 화가 잔뜩 묻어난 말에 수안은 울면서 웃었다.

“이런 씨, 저 새끼 아주 죽여 버릴까?”

뻔뻔하게도 권위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경호원들의 손을 쳐내고 있는 기석을 현진이 맹렬하게 쏘아봤다.

“최현진, 그만 흥분하고 어서 수안 씨 데리고 병원으로 먼저 이동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경호원들 틈에서 최 소장이 현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흥분하지 말라고 굳이 지적하는 최 소장도 가히 차분해 보이진 않았다.

어쩐지 두 사람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수안은 또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소리를 흘렸다.

울고 싶지 않은데 흐느낌이 멈추지 않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현진과 함께 차에 올랐다.

병원으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흐느낌이 계속되었다.

기석에게서 무사히 벗어난 안도감 때문이리라 여겼던 유난스러운 흐느낌의 원인을 제대로 깨닫게 된 건, 기석 일행을 경찰에 넘기고 온 최 소장을 맞닥뜨리고 나서였다.

“그 여자는요?”

그렇게 묻고 나서야 자신이 도훈에 대한 애달픔과, 어딘가 닮은 듯한 그들만의 서글픔에 흐느꼈음을 깨달았다.

“백기석한테 고용된 사람이었습니다.”

“하아, 다행이에요. 정말, 흐윽.”

멈췄던 울음이 다시 시작되자, 최 소장이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평생 해왔던 일이 보드라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위로 같은 건 영 젬병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억지로 등 떠밀리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 사진은 진짜랍니다. 차 회장님의 어머니를 찾긴 했는데, 겨우 사진 한 장 얻어내고 설득에는 실패했나 보더라고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 여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 흐읍.”

“그만 울라고 꺼낸 얘긴데, 이거 참. 차 회장님한테 나, 끝장나게 생겼습니다. 이제 그만 울어요.”

수안의 흐느낌이 갑작스럽게 멈췄다. 황급히 눈물을 훔쳐 낸 그녀가 최 소장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아저씨한테 연락하셨어요?”

“네, 백 검사가 관련된 데다 수안 씨가 다치기까지 해서 어쩔 수 없이 연락드렸습니다.”

“그래도 하지 말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화만 낼 텐데. 게다가 요즘만 같으면 일부러 숨기지 않아도 말짱하게 나을 때까지 아저씨한테 들키는 일은 없었을 거란 말이에요.”

시무룩하니 툴툴대는 모습에 최 소장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아빠미소가 올라앉았다.

현진을 통해 연락을 해오고, 그와 오늘의 일을 의논하던 수안은 나이답잖게 의젓하고 당차더니, 뾰로통한 지금의 모습은 영락없이 스무 살 꽃다운 아가씨였다.

이러니 극강의 포커페이스인 차도훈을 미쳐 날뛰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기석을 경찰에 넘긴 뒤에 있었던 도훈과의 통화를 새삼스럽게 떠올린 최 소장이 등골이 오싹한 듯 몸을 살짝 들썩였다.

음산하게 깔리는 목소리가 누구 하나 잡고도 남을 분위기였는데, 하필 빤히 보이는 데를 저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놨으니.

코를 풀다가 터진 입술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리는 수안을 안타까이 바라보던 최 소장이 남몰래 한숨을 삼키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얼마나 헤집었는지 앞머리가 형편없이 헝클어진 도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그 외엔 눈에 담을 게 없는 것처럼 그의 시선은 오로지 침대 위에 앉은 수안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흠흠,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눈치 빠른 최 소장이 병실 앞을 지키다가 따라 들어온 현진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도 한참,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선 도훈은 수안을 집어삼킬 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타는 듯한 그의 시선에 긴장한 수안이 바짝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겨우 4일 만에 마주하는 건데, 엄청 오래 떨어졌다가 만난 것처럼 가슴이 뭉클했다.

울음 뒤끝이라 그런 건지, 금세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막상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여지기만 했다.

“휴우! 나 뭘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에 도훈의 눈썹이 살짝 치솟았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말도 없이 이런 일을 저질러서 잘못했다고 하는 게 먼전지, 보기만 그렇지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 게 먼전지, 그것도 아니면…….”

숨 쉴 틈 없이 말을 늘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중간에 말을 끊은 수안이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뱉어냈다.

“겨우 4일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말하면 되게 웃길 거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그건 내 마음인 거니까. 하아,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게 먼…….”

미처 끝맺지 못한 말이 너른 품속으로 쏙 파묻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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