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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부부 싸움은 처음이라 (72/88)

72. 부부 싸움은 처음이라

창가에 몸을 기댄 도훈이 이쪽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아니, 주시하는 것 같았다.

정원을 밝히는 옅은 조명만이 스며드는 거실은 어둠침침했고, 그마저도 등진 도훈의 표정은 어둠 그 자체였다.

원래도 대등한 경쟁이 될 수 없는 상대라는 건 알았지만, 조명에 노출된 상태마저도 저쪽이 더 유리하다 생각하니, 안 그래도 숙취 때문에 힘든 속이 아프게 쓰려왔다.

태경은 무슨 말이든 빨리 해보라 떼라도 쓰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고, 음영이 진 도훈의 얼굴을 반항적으로 노려봤다.

“하여튼 머리가 나쁘다니까.”

“X발, 왜 자꾸…….”

“미치도록 욕심나는데, 너 같으면 그냥 놔버리겠나?”

“에이 씨, 뭐래는 거야? 수안이가 원하는 게 중요하다면서요?”

“원하도록 노력해야지.”

“잘하면 무릎이라도 꿇겠습니다?”

“그건 이미 예사로 하고 있고.”

도훈의 여상한 말에 태경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네 포지션은 수안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특별한 친구고.”

“다른 건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정확해.”

단정적으로 말을 뱉어낸 도훈이 들고 있던 술을 한 번에 삼키고는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느른한 동작으로 다가서는 도훈은 마치 사냥감을 관찰하며 어슬렁대는 맹수와 흡사했다.

“어제 같은 돌발행동으로 수안이 위험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특별한 친구로라도 남고 싶으면, 제발 감정은 혼자 추슬러.”

“수안이 아직도 위험한 상황입니까?”

“그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고. 피곤하다. 그만 가라.”

그를 그대로 지나친 도훈이 뒷목을 주무르며 길게 난 복도 안쪽으로 사라졌다.

“아씨, 재수 없어.”

남자 눈에도 멋져 보이는 남자라니, 재수 없어도 보통 재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수안이 마음을 얻기 위해 무릎까지 꿇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제 의견은 끝까지 말해주지 않을 참이었다.

“백수안 이 계집애,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수안이 들었다면 기함하고도 남을 소리를 구시렁거린 태경이 비척비척 현관문을 나서다가 코를 훌쩍였다.

“아씨, 뭐야? 나 지금 우는 거임? 사나이 가오가 있지, 이깟 걸 가지고, 미친 거 아냐?”

오만 신경질을 다 부려봐도,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쉬이 멈추질 않았다.

첫 짝사랑에 앓는 사내의 눈물이 새벽녘 찬 기운이 감도는 골목길 위로 점점이 얼룩을 그렸다.

***

차 뒷좌석에 정자세로 빳빳하게 앉은 수안이 묵직한 한숨을 뱉어냈다.

“그렇게 걱정되면 그냥 같이 들어가.”

현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보며 말했다.

“이미 다 끝난 얘기 가지고 왜 또 그래요, 언니. 혼자 왔으면 좋겠다잖아요. 나도 언니가 옆에서 지키고 있으면 불편할 것 같고, 혼자 갈게요.”

“근데 왜 자꾸 한숨이야?”

“내가 한숨 쉬었어요?”

“그래, 아주 땅이 꺼져라.”

“아, 이 일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럼 대체 뭐 때문에 내내 한숨인데?”

“부부 싸움 했거든요. 뭐, 제대로 싸운 것 같지도 않지만.”

수안의 입술이 불만스레 삐죽거렸다.

그날, 도훈은 끝끝내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재에서 밤을 새운 눈치였다.

게다가 그날뿐 아니라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가 없는 서늘한 침대에서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수안은 결국 어제 원래 자신의 방에서 훌쩍이다가 잠이 들었다.

완전히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더 못 견디겠는 건, 자신을 무시하는 그가 미우면서도 그리워 미치겠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체온보다 약간 높은 그의 체온에 익숙해진 몸이 시시때때로 추위를 느꼈다.

이런 상태로 계속 시간을 보내다간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도훈과 부딪쳐 볼 참이었다.

“어, 그,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까, 적응이 안 된다.”

“나도 부부 싸움은 처음이라 적응이 잘 안 되네요. 에휴!”

다시 한숨을 내쉬는 수안을 보며 애매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현진이 차가 서서히 정차하자 표정을 굳혔다.

“카페 앞으론 주차할 데가 마땅치 않네. 저기 저 자리가 낫겠다. 최대한 카페에 근접해서 주차해.”

현진이 운전을 하는 경호원에게 지시한 뒤 수안을 돌아봤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어우, 진짜. 귀에 딱지 않겠네요. 아, 시간 다 됐다. 이만 내릴게요.”

얼른 차에서 내린 수안이 카페 안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마주했지만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중년의 여자가 가장 후미진 자리에 앉아 있다가 수안을 발견하고 엉거주춤 손을 들어 보였다.

여자의 몸짓만큼이나 어정쩡한 미소를 지어 보인 수안이 서둘러 그리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일찍 나오셨네요.”

“어서 와요. 나와 줘서 고마워요.”

수안은 사근사근 말을 건네는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

수안의 시선은 도훈을 연상시키는 콧방울과 입매에서 유독 오래 머무르다가, 그녀의 차림새를 살피듯 아래로 툭 떨어졌다.

수안의 시선이 불편했던지 여자가 머리며 옷매무새를 주섬주섬 매만졌다.

“내가 꼴이 좀 그렇죠?”

“아니요, 미인이시네요. 제가 불편하게 해드렸죠? 죄송해요. 저는 그저…….”

찾고 싶었을 뿐이다. 아들을 향한 그리움의 흔적, 아들을 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 같은 것들을.

하지만 화려하진 않아도 적절하게 멋을 낸 그녀에게선 그런 감정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눈웃음이 매력적인 눈은 무언가를 가늠해 보는 듯한 느낌이 짙었고, 미소가 덧그려진 채 지워지지 않는 입매엔 얼핏 초조함이 묻어났다.

“아, 괜찮아요. 어때요? 도훈이랑 닮은 구석이 있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분명 닮은 구석이 있음에도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건, 두 사람의 본질이 처음부터 달랐던 것 같은 이질감이었다.

“하하, 그래요?”

“옛날 일 여쭤봐도 될까요? 왜 아버님과 헤어지셨는지, 왜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나셔야 했는지.”

여자의 입가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걷혔다.

곤란한 듯 잠시 머뭇대던 여자는 통화할 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다시 중얼거렸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그 피치 못할 사정이란 게 뭔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요? 도훈이 아빠 횡령사건에 대해 알아보려던 거 아니었나요?”

말을 가로챈 여자가 상당히 신경질적으로 물어왔다.

“네, 그랬죠. 하지만…….”

“나는 그 얘기만 했으면 좋겠네요.”

무어라 더 물어봐야 여자는 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수안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면 그 증거라는 것 좀 볼 수 있을까요?”

“그게, 지금 여기에 없어요. 아니, 가져오긴 했는데, 차에 두고 왔거든요.”

이해할 수가 없는 말에 수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증거 자료를 빌미로 사례를 바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쳐 갔다.

“수안 씨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수안 씨를 무작정 믿을 수 없었어요. 직접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군요. 그럼, 지금 가져오시겠어요?”

“그럴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가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수안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게 아니라 우리 차에 같이 갈래요?”

“네?”

“왔다 갔다 하느니 그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어서요. 같이 가요, 네?”

여자가 별안간 수안의 손을 잡았다.

달갑지 않은 살가움에 수안은 마지못해 어정쩡하니 몸을 일으켰다.

“차가 어디 있는데요?”

“앞쪽에 주차할 데가 마땅치 않더라고요. 이 건물 뒤쪽으로 주차장이 있어요.”

손을 놓지 않은 여자가 수안을 카페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이 카페에 뒷문이 있나 봐요?”

“네, 이쪽이에요.”

“바깥쪽에서 카페 뒤쪽으로 들어오는 길이 있나요? 저는 못 본 것 같은데.”

“카페 바로 옆 건물 끼고 돌면 되는데, 못 봤나 보다. 여기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주차장이에요.”

카페 화장실을 지나 조금 더 들어가자 철제 여닫이문이 보였다.

아마 카페 직원들이 이용하는 출입구인 듯했다.

여자는 거침없이 그 문을 열어젖혔다.

산란한 빛이 예고도 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저만치 앞쪽에 세워진 검은 차가 유독 빛을 발했다. 차를 향해 끌어당기는 여자의 손길이 우악스러웠다.

“잠깐, 잠깐만요. 조금만 천천히 가요.”

아무 일도 일어난 게 없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겁이 난 수안이 손을 뿌리치려 하자, 여자의 손이 더 강하게 조여왔다.

“아파요. 손 좀 놔주세요.”

수안이 버티며 애원하자 여자의 힘이 더욱 드세졌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수안이 온 힘을 다해 여자를 뿌리쳤다.

여자가 휘청대며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차 문이 벌컥 열렸다.

냉큼 자리를 벗어나려던 수안의 발이 못 박힌 듯 딱 멈춰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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