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 미치도록 욕심나는 (71/88)

71. 미치도록 욕심나는

수안이 나이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도훈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뭐가, 뭐가 아닌데요? 잘했다곤 못 해도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요. 그럼, 취해서 인사불성인 애를 그냥 내버려 둬요?”

“내 말은……. 하아! 관두자.”

“하고 싶은 말 해요. 왜 관두는데?”

“이런 일로 다투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해. 저 녀석은 내가 알아듣도록 타이를 테니까, 앞으론 네 안전…….”

“아저씨가 뭔데 쟤를 타일러요?”

“뭐?”

“왜 내 친구를 아저씨가 타이르느냐고요. 이럴 때마다 내가 무슨 말썽꾸러기 애가 된 것 같다고. 친구가 더 좋을 나이라서가 아니라, 태경인 나한테 특별한 친구라서 그러는 거고,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타일러야 할 필요는 없다고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나중에는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마구 떠들어댔다.

도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지만, 제 감정에 겨워 살필 겨를이 없었다.

“우리, 둘?”

도훈의 중얼거림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뭔가 잘못 말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네 남편이야.”

변하지 않을 명제를 읊듯 떨어진 말에 수안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도훈의 눈길이 오목조목한 수안의 얼굴 위에서 오래도록 헤매었다.

저렇게 냉담한 눈빛은 처음이라 수안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 알아요. 나는 그저, 그러니까 태경이는…….”

“백수아안, 나랑 얘기 조옴, 으윽.”

화장실에서 비틀대며 튀어나온 태경이 제 발에 걸려 앞으로 푹 꺼꾸러졌다.

어물거리며 말을 이어가던 수안이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났지만, 태경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도훈의 눈치만 살폈다.

태경은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수안의 이름을 계속해서 중얼댔다.

그런 태경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던 도훈이 성큼성큼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어쩌려고요?”

“왜, 내다 버리기라도 할까 봐?”

비꼬는 듯한 말에 마음이 상한 수안이 뾰로통하니 쳐다보자,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올린 도훈이 태경의 몸을 추슬러 걸음을 옮겼다.

수안은 안절부절못하고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게스트룸 문을 열고 들어간 도훈은 침대로 다가가 태경을 거의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러곤 엉거주춤 서 있는 수안을 본체만체 지나쳐 방을 나가 버렸다.

서늘했던 가슴에 세찬 바람이 지나갔다.

저렇게 매몰찼던 적이 없었기에, 어찌하면 좋을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취기에 몸을 뒤채는 태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수안이 서둘러 방을 나섰다.

도훈과 이대로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났다.

그들의 침실로, 원래는 도훈의 방이었던 곳으로 내달렸다.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욕실 앞에 섰다.

잠시 후 물소리가 그치고 허리에 배스 타월을 두른 도훈이 욕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잠든 동안 사라졌던 엄마를 간절히 찾아 헤매다 만난 아이처럼 설운 마음이 울컥 솟구친 수안이 주춤주춤 도훈에게로 다가섰다.

바로 수안을 맞닥뜨리게 되리라곤 예상을 못 했던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도훈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좀 전의 냉랭함을 되찾은 도훈은 수안을 그대로 지나쳐 드레스룸으로 향하며 귀찮은 듯 ‘왜?’라는 말을 툭 던졌다.

“나한테 화났어요?”

드레스룸 깊숙이 들어가 보이지도 않는 도훈을 향해 수안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수안이 드레스룸으로 들어서려고 할 즈음 편안한 차림의 도훈이 불쑥 나타났다.

“내가 한 말 때문에 화난 거죠?”

“아니.”

“오해할 수도 있는데, 태경이가 아버지한테서 도망칠 때 도와줬거든요. 걔는 내 은인이에요. 그러니까 특별하다는 말에 다른 의미는 없어요. 그저 보통의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뜻이었어요.”

양손을 모아 쥔 채 조심스럽게 말을 늘어놓는 그녀의 뺨 위로 도훈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너무…….”

무언가에 억눌려진 것 같은 목소리가 말을 맺지 못하고 끊겨 버렸다.

아무리 애타게 올려다봐도 뒷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전에 같으면 왜 말을 하다 마느냐, 답답하다 조르기라도 했으련만, 갑자기 생겨 버린 거리감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감정의 합일 없이 이루어진 육체적인 교감은 결국 이런 것이었다.

도훈이 발을 빼버리면 금세 거리가 벌어지고 마는 그런 불안한 관계.

요 근래 누구보다 가깝다고 느꼈던 도훈은 작은 다툼 한 번으로도 남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자신이 사랑하니 그걸로 됐다 생각했는데, 돌려받지 못하는 사랑이 이리도 아플 줄은 미처 몰랐다.

“처리해야 될 일이 있어서 서재에 있을게. 먼저 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울먹임이 밖으로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한 침대를 사용한 뒤로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서는 도훈을 차마 잡지 못했다.

***

“수안이 걱정한다. 아침이나 먹고 가라.”

“허억!”

널찍한 거실을 고양이처럼 가로지르던 태경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빛이 닿지 않는 창가 쪽에 기대선 길쭉한 인영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냥, 가겠습니다.”

“그래? 그러든가.”

이쪽을 향해 있는 것 같았던 인영이 창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도훈의 관심에서 멀어진 태경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다가 못내 미련이라도 남은 듯 우뚝 멈춰 섰다.

이대로 발걸음을 돌리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수안에게서 어떤 답이 나올지 뻔히 짐작했기에 비겁하게도 몇 날 며칠을 피해 다녔다.

하지만 낮부터 마셔서 취한 술에 그리움이 담겨 버렸다. 수안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찾아온 길에 후회와 창피함만 남기고 갈 순 없었다.

버릇처럼 머리를 헤집은 태경이 도훈을 향해 돌아섰다.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도훈은 그대로 술잔을 기울일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짙은 음영에 싸인 그의 실루엣은 고독한 남자의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치기에 한 번쯤 흉내 내보고 싶다 생각했던 그런 모습을 도훈이 완벽하게 연출해 내고 있었다.

이래저래 싸워보지도 않고 진 것 같은 느낌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린 태경이 퉁명스레 말을 뱉어냈다.

“수안이와 이혼할 건가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일차원적인 물음이라 낯이 화끈거렸지만, 지금은 숙취 때문에라도 에둘러 말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달아오른 낯이 보이지 않을 저기와 이만큼의 거리를 고마워하며,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는 정도가 태경이 지금 당장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의젓함이었다.

“특별하다는 게 그런 의미였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군.”

“네? 무슨…….”

“안 해.”

“네?”

“이혼 안 한다고.”

“왜요? 수안이 가진 주식 때문에요?”

“하나만 물어본다고 하지 않았나?”

핑퐁같이 이어지던 대화가 단호하게 들리는 도훈의 질문을 마지막으로 뚝 끊겼다.

안 그래도 골이 쑤시는 판에 제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있을 리 없었다.

괜스레 짜증이 일어 험악한 말을 구시렁거린 태경이 한순간 이판사판이 되어버렸다.

“수안이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긴 해요? 그 애를 그냥 이용하는 거라면 너무 비겁한 거 아닙니까? 수안이의 미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냐고요.”

두서없이 마구 말을 쏟아낸 태경이 제 분을 삭이지 못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흥분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 X발. 이런 순간에도 고상한 척은.”

“경솔한 건 그렇다 쳐도, 머리 나쁜 건 문제가 있네.”

“뭔 개소리야.”

“한잔할래?”

“누구 죽일 일 있습니까? 됐습니다. 지금도 머리에 구멍 나기 직전이구만.”

태경의 엄살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도훈이 티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기울여 다시 잔을 채웠다.

“나는 뭘 욕심냈던 적이 없어.”

어릴 땐 욕심을 낼 만큼 탐이 많지 않았고, 부모님을 차례로 잃은 뒤로는 아무리 욕심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아 의식적으로 무엇도 욕심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생애 처음 미치도록 욕심나는 게 생겨 버렸어. 너라면 어쩌겠나?”

“뭘 어쩝니까.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가져야지.”

“그게 사람의 마음이라도?”

껄렁하게 눈을 굴리던 태경이 욕설을 토해내며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에이 씨,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전에 말했는데, 뭘 또 물어.”

“뭐, 뭘요?”

“이러니까 너더러 머리가 나쁘다고 하는 거다, 인마. 말했잖아. 중요한 건 수안이 원하는 거라고. 수안이 원하지 않는 한 이혼은 없어.”

“그럼 수안이가 원한다고 하면 이혼하는 겁니까?”

수안이 절대로 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태경은 심사가 뒤틀려 되바라지게 물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