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너 하나 지키자고
급하게 숨을 들이켠 자현이 불안정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모든 사실을 다 꿰고 있는 것 같은 말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사고를 유발했던 트럭운전자의 계좌로 이자현 씨가 거액을 입금한 기록이 있더군요.”
“그건…….”
“백기석과 연인 사이였던 이자현 씨는 그런 식으로 이용될 줄 모르고 계좌를 제공한 것으로 일을 꾸밀 겁니다. 이자현 씨가 이 건으로 인해 처벌을 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브리핑을 하듯 군더더기 없이 말을 끝낸 도훈이 잠시 자현의 반응을 살폈다.
“물론, 선택은 이자현 씨 몫입니다. 이자현 씨의 도움 없이도 일은 예정대로 진행되겠지만, 난 좀 더 확실하게 백기석을 차단하길 원합니다. 하겠습니까?”
자현의 머릿속에 숱한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연기처럼 스러져 갔다.
차도훈이 가진 힘으로 보나 의지로 보나, 이 남자가 말하는 차단이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담고 있을지 얼추 짐작이 가능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기석이라면 인생이 끝장났다고 느낄 수준임에 분명했다.
이미 버림받았지만, 기석은 오랫동안 그녀의 인생을 지배해 온 사람이었고, 그녀의 청춘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결정이 쉬울 리가 없었다.
버림받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는 분명 울분에 휩싸여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지만, 막상 이런 순간이 되니 어쩐지 조금 서글퍼졌다.
뒤틀리고 더럽혀진 자신의 청춘이, 그럼에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기석과의 일들이 아프게 가슴을 후볐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에는 피눈물 날 거라던 엄마의 케케묵은 악담이 아름답지만은 않은 기억 위로 덧씌워졌다.
그래도 피눈물까지는 안 흘렸으니 이 정도면 괜찮다 해야 할까?
자조적인 웃음과 씁쓸한 한숨이 힘없이 다물린 입술 새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자신이 깎고 조립한 톱니바퀴에 의해 돌아가는 세계 속에 갇혀 버린 것만 같았다.
싹 무너뜨리고 깎기부터 새로 시작하지 않는 한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돌아갈 세상이었다. 그러니 이제라도 무너뜨리는 수밖에.
“트럭을 운전한 사람, 연변에서 온 사람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고요.”
나직한 도훈의 말에 자현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자신의 도움 없이도 예정대로 일은 진행될 거란 말이 결코 허세가 아니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도훈에게 협조하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음에도 자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청난 말을 던져 놓고도 여전히 무감한 도훈의 얼굴을 살피던 자현이 얕은 한숨을 토해냈다.
“백기석이 그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 있었어요. 그때도 물론 녹음을 했죠. 그것도 줄게요. 어떻게 활용할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알겠습니다.”
“백기석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의사한테 제대로 된 정신감정을 받게 해줘요. 미친년 소리 이제 아주 지긋지긋하니까.”
“그렇게 하죠. 오늘 논의된 내용은 모두 계약서로 작성될 겁니다. 내일 바로 변호사 보내겠습니다.”
말을 끝낸 도훈이 외모만큼이나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현은 접견실을 나서는 도훈의 일정한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헛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앉아 있었다.
***
밤 11시를 향해 가는 시간의 골목은 한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오후에 자현을 만나고 오는 바람에 퇴근이 늦어져 버렸다.
도훈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한 번씩 꺾다가 뒤를 힐끔 쳐다봤다.
미리 주문해서 받아놓은 케이크가 뒷좌석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전에 없이 늦어진 퇴근에 일순 조급증이 일었다.
저녁은 먹고 일하는지 묻던 수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참 나, 백수안 때문에 이제 야근도 못 하겠네.”
투덜대는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은 조급하게 리듬을 탔다. 느슨하게 풀어진 운전자의 표정만큼이나 부드럽게 코너를 돌던 차체가 별안간 앞으로 불쑥 튀어나갔다.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멈춰 선 차에서 쏜살같이 내린 도훈이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대문 앞으로 달려가 냅다 주먹을 날렸다.
수안의 팔을 잡고 늘어지던 덩치 큰 녀석이 얼굴에 정통으로 주먹을 맞고 휘청대다가 뒤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꺄아! 태경아.”
수안의 비명 소리가 조용한 골목에 울려 퍼졌다.
안타까이 이름을 부른 수안이 냉큼 무릎을 꿇고 앉아 녀석을 감싸 안았다.
“어우, 어떡해. 태경아, 괜찮아? 왜 갑자기 애를 때리고 그래요?”
허리에 양손을 올린 도훈의 미간이 짙게 일그러졌다.
“취해서 정신 못 차리는 애를 때리면 어떡해요.”
“백수안, 너 정말…….”
“얼른 얘 좀 일으켜 봐요. 넘어지면서 어디 부러진 거 아니야? 한태경, 정신 좀 차려봐.”
자신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 수안을 살벌하게 노려보던 도훈이 하는 수 없이 태경을 잡아 일으켰다.
“아니, 왜 하고많은 데 놔두고 멱살을 잡아 일으켜요?”
“백수안, 넌 좀 조용히 하고. 한태경, 말짱한 거 아니까 그만 눈 떠.”
멱살을 잡혀 휘청대던 태경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르케 말짱하지느은 않은데여. 내가요오, 백수안이랑 할 말이 있거어우읍.”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말을 하던 태경이 사색이 되어 입을 틀어막았다.
“어어, 얘 토하려나 봐요. 화장실, 빨리빨리. 야, 한태경, 조금만 참아.”
크게 한숨을 몰아쉰 도훈이 한 팔을 태경의 등 뒤로 돌려 끌어안다시피 부축했다.
“수안이 넌 떨어져.”
반대편에서 부축을 하려던 수안을 슬쩍 밀어낸 도훈이 휘청거리는 태경의 다리를 툭 걷어찼다.
“꽉 틀어막아라, 응? 너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죽는다.”
“술 취한 애한테 왜 자꾸…….”
“백수안, 너는 지금 이 녀석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에 드디어 수안의 시선이 도훈에게로 향했다.
“아저씨 설마, 화났어요?”
“그럼 안 나?”
“왜요?”
“우읍.”
“좀 있다 얘기해. 너 이 새끼, 다리에 힘 못 줘!”
도훈의 호통에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금세 울상이 됐다.
그래도 도훈의 호통이 제대로 먹히긴 했는지, 입을 양손으로 꽉 틀어막은 태경은 무사히(?) 화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경을 화장실로 밀어 넣은 도훈은 문을 닫아버리고 수안을 향해 돌아섰다.
“왜, 왜 그러는데요?”
도훈은 아무 말도 없이 수안을 끌어다가 거실 소파에 앉혔다.
“아니, 왜…….”
“주차하고 올 테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도훈이 뭐가 못 미더운지, 갑자기 획 돌아봤다.
“움직이기만 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썩이던 수안이 냉큼 소파에 딱 붙어 앉았다.
평상시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분명 화가 난 얼굴이었다.
나직하게 깔린 목소리에도, 일자로 쭉 뻗은 눈썹에도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태경이 때문인 줄은 알겠는데, 억울함이 울컥 용솟음쳤다.
“내가 술 마시랬냐고? 왜 나한테 화를 내는데?”
수안이 불퉁하게 투덜거리면서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간간이 웩웩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화장실 쪽을 목을 쭉 빼고 쳐다봤다.
“쟤는 뭔 술을 저렇게 많이, 휴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도훈이 주차를 마쳤는지 주차장으로 난 입구로 들어서서 곧장 수안에게로 다가왔다.
수안이 바짝 긴장해서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잔소리를 쏟아낼 것처럼 바짝 다가들었던 도훈이 다시 두 발짝 물러나더니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최현진 씨는?”
“더 이상 외출 안 할 거라고 퇴근하라고…….”
“그래 놓고 혼자 대문 앞에 나와 있어? 너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너 하나 지키자고 내가……. 하아!”
도훈이 화가 난 게 태경이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그래서 더 긴장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수안을 비껴간 도훈의 시선이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열락에 잠기는 순간이 아니면 좀체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던 도훈의 표정이 성기게 쌓은 모래성처럼 살금살금 허물어지는 걸 보는 수안의 가슴이 달그락댔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태경이가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대문 밖에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어요. 얼굴만 보여주면 간대서 그래서 나간 건데, 애가 막 쓰러지는 바람에……. 잘못, 했어요.”
“저 자식은 왜 자꾸…….”
버럭 내지른 소리에 흠칫 놀란 수안의 눈이 동그래지자, 도훈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답답한 듯 한숨을 토해낸 도훈이 기운을 소진한 사람처럼 소파에 털썩 몸을 내맡겼다.
“친구가 더 좋을 나이인 건 알겠는데, 이건 아니야, 수안아.”
의미가 모호한 도훈의 말에 수안이 느낀 건 옅은 불쾌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