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피치 못할 사정
수안은 거의 드레스룸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 자신의 방을 초조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지희에게서 도훈의 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수안은 이 사진을 퍼뜩 떠올렸다.
도훈이 아버지의 일로 곤란해지지는 않을까 걱정된다던, 마치 벌어질 일을 예견한 듯한 글귀가 미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그 여자가 뭘 알고 있는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지 알아봐야 했다.
그리고 진짜 도훈의 어머니가 맞는지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만약 진짜 어머니가 맞고, 어린 도훈을 떠나야만 했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거라면, 이제라도 그에게 어머니를 찾아주고 싶었다.
도훈에게서 스몰웨딩에 대해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생겨 버린 욕심이었다.
그 자리에 도훈의 어머니가 참석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긴 망설임을 멈춘 수안이 사진 뒤에 적힌 번호를 지나치다 싶게 꾹꾹 눌렀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무색하게 한 번의 신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백수안 씨?]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 때문에 순간 당황한 수안이 잠시 말을 잃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안 씨?]
“제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 드린 적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아신 거죠?”
적절한 인사도 생략한 채 이것부터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미묘하게 겹치는 얘기들에 예민해진 신경이 더욱 곤두섰다.
[나, 낯선 번호라 혹시나 했는데 수안 씨가 맞았네요. 아, 그, 이름은, 도훈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다 보니, 백수안 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됐어요.]
“…….”
[기분 나빠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도훈이 너무 걱정돼서 뭐라도 해봐야 했거든요.]
“그렇군요.”
어디의 누구에게 도훈에 대해 알아봤다는 건지 미심쩍고 찜찜했지만, 괜히 물고 늘어져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수안은 얼른 본론부터 꺼냈다.
“불쑥 전화 드려서 죄송해요. 뭐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아니, 괜찮아요. 그러라고 연락처 알려준 건데요. 뭐든 물어보세요.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만나서 얘기 나누면 어떨까요?]
“죄송한데 그건 좀 곤란해요. 제가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라…….”
상대편에서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끝내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 우기면 전화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을 때, 처음보다 많이 차분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정이 그렇다니 아쉽지만 할 수 없죠. 그래,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뭔가요?]
“아버님 얘기를 듣고 싶어요.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어떤 도움인지도 궁금하고요.”
[혹시 그 양반 횡령사건 때문에 우리 도훈이가 곤란하게 됐나요?]
일부러 에둘러 얘기했건만 여자는 모든 걸 다 짐작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냉큼 횡령에 대해 말을 꺼냈다.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꺼낸 것에 반가워해야 할지, 너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에 의심부터 해야 할지 복잡한 마음이 되어버린 수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여자는 그걸 다른 의미로 생각했는지 조금 다급하다 싶게 뒷말을 이었다.
[많이 안 좋은 상황인가요? 그이는 횡령 같은 거 한 적 없어요. 그럴 위인도 못 돼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나한테 그 증거가 있거든요.]
“어떤 증거요? 횡령하지 않았다는 증거 말인가요?”
[네.]
여자의 확고한 대답에 수안은 잠시 얼떨떨했다.
“어떻게요?”
[네?]
“아저씨가 일곱 살 때 헤어졌다고 들었어요. 횡령사건이 있기 한참 전인데, 어떻게 그 증거를 가지고 계시냐고요.”
여자가 어린 도훈을 버리고 떠난 사실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라 수안은 중간에 잠시 말을 끊어야 했다.
여자의 입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온 ‘우리 도훈이’라는 말 때문에 횡령에 관한 것보다 이렇게 예쁘게 웃는 아이를 왜 버리고 떠나야 했는지, 그 이유가 더 궁금해져서 답답하고 애가 탔다.
[그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도훈 아빠와 헤어져야 했지만, 간혹 연락은 하고 지냈어요. 그 양반 그렇게 되기 전에 나한테 맡긴 거예요.]
휴대폰을 움켜쥔 수안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면 어린아이를 버려두고 나갈 수 있는 거냐고 악다구니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그의 아버지와는 연락을 주고받았으면서, 왜 그에게는 한 번도 연락을 안 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도대체 얼마만큼 피치 못할 사정이면, 아들의 입에서 어머니의 생사 여부를 모른다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 수 있는 건지, 정말로 묻고 싶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저의가 뭔지 다분히 의심스럽다고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여자는 제멋대로 인식하고 제 입맛에 맞는 말을 꺼내놓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면 아마 우리 도훈이 곤란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걸 꼭 전달해 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분명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는데, 수안의 귀에는 어쩐지 조금 의뭉하게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휴대폰 너머에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재촉하고 있었다.
수안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다소 불명확하고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도훈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확인을 해봐야 했다. 그러려고 전화도 했던 거고.
“만나야 할 것 같네요. 만나요.”
수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휴대폰 너머에서 이상야릇한 소리가 넘어왔다.
얼핏 환호성을 지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어딘가에 부딪쳐서 내는 앓는 소리거니 짐작하고 말았다.
[아, 그럴까요? 나는 아무 때나 괜찮은데 언제가 적당할까요?]
장소와 시간을 정하느라 좀 더 이어지던 통화가 끝이 난 뒤, 수안은 모든 기운을 소진한 사람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통화를 하는 동안 온갖 감정들이 그녀를 휩쓸고 간 듯한 느낌이었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감정을 견디지 못한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쉽게 갈무리되지 않는 감정을 추스르며 바라본 창밖의 하늘은 뿌옇게 바래 있었다.
창문이라도 열어볼 양으로 일어섰던 수안이 이내 다시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차츰 침착함을 되찾은 얼굴에서 이지를 가진 눈이 밝게 빛났다.
망설였던 순간은 없었던 것처럼 결연한 태도로 휴대폰을 집어 든 수안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저 부탁할 게 있어요.”
***
수안이 누군가와 은밀한 통화를 하고 있던 그때 도훈은 이자현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직접 만나러 와줄 줄은 몰랐어요.”
수의를 입은 초췌한 모습의 자현이 맥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직접 만나러 올 거 아니었으면, 개인 명함을 주지도 않았을 겁니다.”
“흐,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죠? 백기석한테 버려진 내가 연락을 하게 될 줄 알았던 거예요. 그렇죠?”
도훈은 별다른 대답 없이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홀로 격해져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자현이 제 풀에 꺾여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백기석이 백수안의 납치를 지시할 때 녹음해 둔 게 있어요. 흠,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 자현이 이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거 말고도 녹음된 게 꽤 많아요.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엔 습관처럼 굳어져 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된 변호사를 붙여주면 그걸 넘겨줄게요. 재판에서 유용한 증거물이 될 거예요.”
말을 끝낸 자현이 도훈의 눈치를 살폈다.
남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감한 얼굴이었다. 자신으로선 엄청난 걸 제시했는데도 별다른 감흥도 없는 것 같았다.
초조해진 자현이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 소리를 지르기 직전, 도훈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납치에 가담했으니 무죄 선고는 힘들 테고, 집행유예 정도로 가닥을 잡을 겁니다.”
“흠, 그 정도도 감지덕지해야겠죠?”
“또, 재판에 성실히 임해주면 금전적인 보상은 물론, 원한다면 새로운 일자리도 제공하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멍해진 자현이 도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달리 더 원하는 게 있습니까?”
“글쎄요, 지금은 잘…….”
“나중에라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허용 범위 안이라면 바라는 대로 처리해 주겠습니다.”
“저,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필요 있습니다. 이자현 씨한테 더 많은 걸 요구할 거거든요.”
“더 많은 거라니요?”
날카로운 눈빛이 자현에게로 곧장 쏘아졌다.
도훈은 위협적인 행동이나 거친 말 없이도 존재 자체만으로 위압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시시때때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날뛰는 기석과는 근본부터 다른 부류였다.
이래저래 따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백기석은 지금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자현은 도훈의 입에서 떨어질 말을 기다리며 잘 넘어가지 않는 침을 억지로 삼켰다.
“백기석이 이 회장과 이주은의 살해를 지시한 것에 대한 증언도 해줘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