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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프러포즈 (68/88)

68. 프러포즈

태연한 도훈의 모습에 홀로 긴장한 수안이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입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도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말을 꺼냈다.

“회장님은 의지할 곳 없는 열 살짜리 남자아이한테 미래를 줬어. 다른 미래를 꿈꿀 필요도, 이유도 없었지.”

말하는 도훈은 담담한데, 수안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이 준 미래를 착실하게 살아내며 도훈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화나지 않았을까? 답답하거나 억울하진 않았을까?

차마 묻지 못한 말들을 입안에서만 뱅뱅 굴리다가, 목이 따갑도록 삼켜 버렸다.

“그럼 이제라도 해보고 싶은 거 없어요?”

“으음, 요즘 매일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싶은 게 있긴 하지.”

한입에 꼴깍 삼켜 버리고 싶은 듯 쳐다보는 저 눈빛 때문일까? 아니면 낮게 깔리는 목소리 때문일까?

하나하나 짚어보면 별것 없는 그의 말이 수안의 귀엔 무척이나 야하게 들렸다.

“뭔지 안 물어봐?”

은근하게 재촉하는 목소리에 얼굴을 붉힌 수안이 고개부터 냅다 젓고 봤다.

“안 물어볼래요.”

“왜?”

“어, 으음, 그냥요.”

“흠.”

한쪽 팔을 식탁에 괴어 턱을 받친 도훈이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빙긋이 웃었다.

곤란해하는 수안의 모습이 꽤나 재밌는 눈치였다.

“아우, 진짜, 나 엄청 진지하단 말이에요. 왜 자꾸 장난을…….”

“장난 아닌데.”

그래, 장난이라기엔 눈빛이 너무 뜨겁다.

무슨 이상한 거 물어본 것도 아닌데, 왜 말을 하면 할수록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거냐고?

“아, 몰라, 몰라. 아니, 무슨 해보고 싶은 거 물어봤는데, 그게 그렇게 막, 밥 먹다 말고 야해질 일이야. 나 지금 완전 엄청 마아니 배고프거든요. 그러니까, 그 눈빛 좀 그만 넣어두시라고요.”

다다다 쏘아붙인 수안이 밥을 한 숟가락 듬뿍 떠서 입에다 밀어 넣었다.

“내 눈빛이 뭐?”

밥을 부지런히 씹어 삼킨 수안이 적당한 표현을 찾느라 고심하는 것처럼 콧잔등을 찡긋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좇고 있던 도훈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댔다.

“으음, 먹이를 앞에 두고 ‘기다려’ 하고 있는 댕댕이? 딱 그 눈빛이요.”

“허!”

졸지에 개 취급을 당한 도훈이 헛웃음을 뱉어냈다. 덕분에 들끓던 열망이 사라진 눈엔 어이없음이 가득 들어찼다.

“그러지 말고, 진짜로 뭐 해보고 싶은 거 없어요?”

도훈이 ‘뭐지?’ 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말만 하면 뭐든 다 들어주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요. 아니, 할 수 없는 것도 최대한 노력해 볼게요.”

수안은 비장한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넸다.

물끄러미 듣고 있던 도훈이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정도로 살짝 입술을 끄집어 올렸다가 내렸다.

“감동적이네.”

“감동받으라고 한 말 아닌데. 내가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좀 진지하게 받아들여 줘요.”

시무룩해진 수안이 불퉁거리자, 느긋하게 풀어져 있던 도훈의 눈에 금세 날이 섰다.

“너,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저씨한테 있잖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역시나 도훈은 그 어떤 말도 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실망스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도훈이 알리려 하지 않는 일들을 캐고 다닌 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회장님 된 지 얼마 안 돼서 엄청 바쁠 거 아니에요. 그래서 많이 힘들 테니까…….”

“네가 걱정해 주는 거, 기분 좋네.”

도훈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말려 올라갔다.

걱정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정말 기분 좋은 미소에 수안은 어쩐지 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쁘게 웃지만 말고 어서 밥 먹어.”

배는 여전히 고팠지만, 밥이 넘어갈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도훈이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기에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배가 차야 내 순서가 돌아올 거 아니야.”

컥, 콜록, 콜록.

사레가 들린 수안의 앞으로 물컵이 내밀어졌다.

완전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라, 도훈을 바라보는 수안의 눈길이 절로 불순해졌다.

“왜? 뭐? 왜 그렇게 봐? 겨우 밥한테 밀려서 지금 딱 ‘기다려’ 하고 있는데, 뭐가 문제야?”

“으으, 뒤끝 작렬.”

“내가 뭘 잘 잊는 법이 없거든.”

호들갑스레 몸을 부르르 떠는 수안을 힐끗 쳐다본 도훈이 여상하게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할 수 있는 건 뭐든지라고 했지, 아마?”

큭, 콜록, 콜록.

막 물을 삼키던 수안이 또다시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도훈이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쓸어내렸다.

짜증스레 혀를 차는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토닥이는 손길은 더할 수 없이 다정했다.

식탁을 짚은 채 상체를 숙인 도훈의 눈치를 살피며 수안이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더없이 단정하고 때로는 쿨하기까지 했던 남자가 요즘은 왜 이렇게 시시때때로 야해지고 끈적해지는 걸까?

나이답잖게 근엄하기로 유명한 태성그룹 회장님이 이렇게 능글맞은 구석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느냔 말이다.

자신만이 알게 되는 그의 모습들이 내심 뿌듯하고 좋으면서도, 수안은 간혹 그런 마음을 숨기기 위해 부러 투정을 부리곤 했다.

절제미 넘치는 모습에 완전 사기당했다며 투덜대기라도 하면, 도훈은 여태껏 절제만 하며 산 사람을 잘못 건드린 건 너라고 그녀 탓을 했다.

그러니 좀 봐달라고 사정을 하거나, 네가 끝까지 책임지라고 우기거나, 다시 진득하게 입술을 겹치며 되도 않은 애교를 부리곤 했다.

그 어느 것이건 통하지 않는 건 없었다.

약아빠진 남편께서는 매번 그녀를 자신의 페이스대로 움직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래서 등을 토닥이던 도훈이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을 때, 그것의 전초라고만 생각했다.

“수안아, 우리 결혼할까?”

이렇게 뜻밖의 말을 듣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가, 그만 멍해져서 눈만 깜빡였다.

“어리고 예쁜 신부 데리고 살면서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니냐고 난리 치는 녀석이 있어서…….”

수안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도훈은 멋쩍은 듯 눈썹 위를 매만지며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난리 치는 녀석이 누군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아마도 주인장의 느끼한 입담 빼고는 모든 게 완벽했던 레스토랑 다담의 사장이자 메인 셰프인 조인택을 가리키는 것일 터다.

“내가 그런 건 잘 몰라서, 드레스랑 부케 그런 것들 말이야. 여자들은 평생 섭섭해한다던데.”

도훈에게 수안은 항상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일반적인 여자들의 심리에 관해 묻는 말은 꽤나 조심스러웠다.

“장소는 그 녀석이 제공한다고 했고, 우리 둘 다 참석할 부모님도 없으니까, 정말로 축하해 줄 사람들만 불러서 스몰웨딩 형식으로 하면 어떨까 싶은데……. 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굳이…….”

“아니요, 해요. 하고 싶어요.”

말을 가로챈 수안이 들썩이려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며 그의 손을 덥석 말아 쥐었다.

“아저씨랑 꼭 해보고 싶어요.”

자세를 낮춰서 수안과 눈을 맞춘 도훈이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말하니까 기회가 닿으면 다른 사람과도 해보겠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약간의 불쾌감이 섞인 도훈의 말에 수안은 또르르 굴러가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헤헤, 이거 왠지 프러포즈 받는 것 같아요.”

“무릎 꿇을까?”

“굳이 그러겠다면 말리진 않을게요.”

장난스레 건넨 말에 어정쩡하게 굽히고 있던 도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음 주중에 시간 내서 드레스 보러 가자. 다른 건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할게. 네 생일쯤 맞춰서 하자.”

무어라 말해도 그저 고개부터 끄덕일 것 같은 순간, 도훈은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서 했다.

수안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면 됐다.

“그리고 이건 경곤데, 다른 놈하고는 꿈도 꾸지 마. 모르나 본데, 내가 독점욕이 좀 남달라.”

수안은 또 하릴없이 웃어버렸다. 그러곤 감정을 지워낸 것 같은 도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늘 그렇듯 무감한 표정처럼 보였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지금은 조금 뚱한 표정이었다.

이제는 제법 그냥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생겼다.

그게 어찌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는지, 수안은 참지 못하고 그의 양 볼을 감싸 쥔 채 입술을 겹쳤다.

기다리기도 한 것처럼 금세 질척해지는 키스에 숨결이 거칠어지려는 찰나, 굳혔던 입매를 부드럽게 늘인 도훈이 입술을 거의 맞붙인 채로 웅얼거렸다.

“조금 있다 야식 챙겨줄 테니까, 이제 밥은 그만 먹고,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주면 좋을 것 같은데.”

입술 위에서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전해지는 말은 그 자체로 야릇하고 선정적이었다.

“나, 그 씨, 씻지도 않았는데.”

“그럼 씻는 것부터 시작하지, 뭐.”

갑자기 의욕이 충만해진 도훈이 불쑥 솟구쳐 일어나 수안을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약간은 의도된 비명을 내지른 수안이 이내 까르르 웃어버렸다.

곧, 웃음소리마저 도훈에게 삼켜지고 욕실로 이어지는 복도는 촉촉하고 거친 숨결로 채워졌다.

뭐든 다 해주고 싶은 밤이 새록새록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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