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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꿈이 뭐예요? (67/88)

67. 꿈이 뭐예요?

넋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자신을 그렇게 엮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런 헛소리를 주주들이 믿는 건 아니겠죠?”

“거기까지는 아직 파악 중이에요.”

지희가 적당히 얼버무렸다.

주주들은 이익을 좇는 집단이었다.

도훈의 스캔들이 주가에 영향을 미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주주들은 쉽게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수안에게 곧이곧대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주주들이 다 돌아선다고 해도 대성캐피탈 김운철 대표님 지분만 확보되면 큰 문제없지 않나요?”

“그렇기는 한데, 박덕규 부회장이 김운철 대표를 협박하고 있는가 보더라고요.”

“협박, 이요?”

“캐피탈로 포장은 했어도, 말 그대로 사채업이잖아요. 그 정도 규모로 키우는 동안 합법적인 일만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김 대표님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닌 거로 아는데, 박덕규 부회장은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은 걸까요?”

“글쎄요, 그런 것까지야…….”

지희가 말을 얼버무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수안은 회사 운영 전반에 걸쳐 꽤 많은 부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고, 지희는 그 점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그러니 괜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 말을 삼가야 했다.

더구나 김운철에 관한 정보를 박덕규에게 제공한 건 기석이었다.

이 일에 상당히 필사적인 기석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잘해주고 있었으며, 지희는 그 점이 마음에 들면서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럼, 김 대표님이 박덕규 부회장 쪽에 붙고, 몇몇 주주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해임안을 상정하고 결의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소리네요.”

수안이 정확히 핵심만을 집어내 중얼거렸다.

지희한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홀로 생각을 정리하는 말처럼 들렸다.

지희는 그런 수안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이번엔 회장님도 좀 버거워하는 것 같아요.”

사실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도훈은 이 모든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예상이나 했던 것처럼 그는 덕규의 행보와 상관없이 이미 예정되어 있던 자신의 일을 해나가고 있었다.

사실, 진행 중인 사업도 만만찮은 데다가,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회장직 업무만으로도 도훈은 눈코 뜰 새 없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예전처럼 회사에서 날을 새우는 일은 없었다. 그건 아마도 앞에 앉아 있는 바로 저 계집애 때문이리라.

“회장님은 책임감 때문에라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조금 아슬아슬해 보여요. 어쩐지 좀 딱하기도 하고.”

수안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걸 유심히 살핀 지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시 회장님 꿈이 뭔지 알아요? 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구나! 예전에 가졌던 꿈이라고 해야 맞겠네요. 아무튼, 뭔지 알아요?”

그런 것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수안이 당황하여 입만 벙긋댔다.

“역시 모르는군요? 회장님은, 도훈 선배는 교단에 서고 싶어 했어요. 선배 논문이 이코노메트리카(Econometrica)에 게재되면서 여기저기서 꽤 많이 컨택을 받았거든요. 아마 돌아가신 회장님이 중간에 불러들이지만 않았다면, 계속 학교에 남는 쪽을 택했을 거예요.”

잠시 말을 멈춘 지희가 염탐하듯 살펴보는데도 수안은 미간을 찡그린 채 아무 말을 못 했다.

수안에게 도훈은 처음부터 그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자신과 도훈을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도 진로에 대해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을 거란 걸 왜 생각조차 못 한 걸까?

그가 자신을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지 않는다고 불만스러워했으면서, 정작 도훈을 항상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 동일시하지 않은 건 자신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충격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언가를 끊임없이 바라고 있었다는 사실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도훈의 꿈을 이야기하는 지희가 밉고 질투나면서도,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그 얘기를 나한테 하는 의도가 뭐죠?”

“나는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갔으면 해요. 아, 오해하지 말고 들어줘요.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만일 해임안이 통과된다면 도훈 선배는 수안 씨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할 거예요.”

지희는 아이를 타이르는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선배는 책임감 때문에 수안 씨를 짐처럼 느끼면서도 절대로 놓지 못하겠죠. 그렇게 되면 두 사람 모두 불행해질 거예요.”

살짝 고개를 숙인 수안은 입술만 짓씹을 뿐, 별달리 반박의 말을 하지 않았다.

꽤 흡족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멋모르는 철부지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려 놓은 건 확실했다.

“주제넘은 것 같지만, 그래도 몇 년 더 산 인생 선배로서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네요. 도훈 선배 인생에 편승해서 자신을 잃지 말아요. 한창 꽃필 나이잖아요. 자신의 인생을 찾아야죠. 안 그래요?”

좀 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손이라도 잡아줄까 하는 마음에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던 지희가 갑자기 고개를 드는 수안의 행동에 놀라 움찔했다.

“오늘 만남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주제넘은 건 맞지만, 충고도 고마워요. 덕분에 중요한 걸 깨달았거든요.”

“그거 다행이군요.”

“먼저 일어날게요.”

회심의 미소를 머금은 지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안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늦어지면 남편이 걱정해서요.”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하는 계집애의 도발에 지희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수안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냉큼 옆으로 다가오는 현진을 보는 순간, 지희의 미소는 싹 걷히고 말았다.

도훈의 아낌없는 관심과 보호를 받는 사람은 백수안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이 순간이 정말 짜증 났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다고 해도 자신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제 스스로가 비참했다.

그럼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모든 게 다 저 계집애 때문이었다.

뉴욕에서 도훈과 그녀는 나쁘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그의 허용 범위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여자였다.

저 애송이 계집애만 아니었어도, 도훈과 그녀는 분명 이상적인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다.

현진과 함께 카페를 나서는 수안을 바라보는 지희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낸 지희가 재빨리 문자를 입력하고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차도훈의 아버지 얘기 백수안에게 전달했으니, 다음 조치 빨리 시행하세요.

잠시 후에 바로 답문이 들어왔다.

―성질 급한 아가씨로군.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불친절한 문자를 읽고 난 지희가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가방에 쑤셔 넣어버렸다.

***

“왔어?”

길쭉한 다리가 돋보이도록 현관 옆에 기대선 도훈에게서 참 멋없는 한마디가 튀어나왔을 때, 수안은 그만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말았다.

“뭐지, 요 강아지는? 이렇게 다짜고짜 엉겨 붙으면 곤란한데.”

“그래서 싫다고요?”

품에 파묻혀 고개를 쳐들자마자 도훈의 입술이 불쑥 가까워졌다.

“그럴 리가.”

그윽하게 잠긴 목소리가 얼굴로 퍼지더니, 이마 위로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저녁은?”

“아직요.”

“그럼 밥부터 먹자. 손만 씻고 와.”

도훈이 주방 쪽으로 향하며 수안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수안은 그런 도훈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욕실로 들어가 손을 씻고 나왔다.

“요즘 바쁘지 않아요?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어요?”

국을 뜨는 그의 옆에서 국그릇을 받아 들며 수안이 넌지시 물었다.

여러 가지 상황들로 바쁠 거 뻔히 아는데, 반지를 건네며 했던 잘하겠다는 약속 때문에 무리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의 이른 귀가가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7시가 일찍은 아닌 것 같은데. 오늘은 네가 늦은 거야.”

심드렁하게 들리는 그의 말에 적잖이 안도한 수안이 없던 애교까지 끄집어 올려 도훈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나 기다렸어요? 막 보고 싶어서?”

“또 까분다. 어서 밥이나 먹어.”

입을 삐죽거리던 수안은 이내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말만 엄근진이면 뭐 하나. 귓불 빨개지는 건 어쩔 건데.

바른 성정만큼이나 젓가락질하는 모습도 단정하기 그지없는 남편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수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저씨, 아저씨는 꿈이 뭐예요?”

젓가락질을 멈춘 도훈이 수안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냥 궁금해서요. 태성그룹 회장님이 꿈은 아니었을 거니까.”

“글쎄, 열 살 이후론 장래희망 같은 걸 가져본 적이 없어서…….”

“에이, 말도 안 돼. 최근에 없어졌다면 모를까, 열 살 때부터 장래희망이 없었다는 건 좀 그렇잖아. 창피해서 그러는 거면 비웃지 않을게요. 그냥 말해봐요. 응?”

수안의 재촉에 도훈은 피식 웃음부터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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