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나만 신경 쓰면 돼
“일단은 추이를 지켜봐야지 뭘 어쩌겠어. 동조하는 주주들 명단 정도만…….”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도훈이 수안을 발견하고 하던 말을 멈췄다.
“아니, 됐어. 나머지 얘기는 내일 회사에서 하는 거로 하지.”
도훈이 조금 급하다 싶게 통화를 끝냈다. 그러곤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던진 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쳤다.
“왔으면 얼른 이리 와서 앉지 뭐 하고 섰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도훈은 나른한 눈길을 보내며 수안을 재촉했다.
“무슨 일 있어요?”
“음?”
“회사에 무슨 일 있냐고요.”
다시 한번 다그쳐 물으며 다가앉는 수안의 허리에 단단한 팔이 휘감겨 당겨졌다.
“회사에는 항상 무슨 일이건 있기 마련이지. 그걸 해결하는 사람이 나고.”
수안의 앞으로 바짝 다가든 도훈이 코끝을 맞대어 비벼댔다.
“그러니까, 네가 신경 쓰고 걱정해야 할 일은 없어.”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아! 네가 걱정해야 할 일이 하나 있긴 하네.”
진지한 목소리에 바짝 긴장한 수안이 도훈을 향해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이 어여뻤던지 도훈이 볼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어떤 영화를 볼 건지 정해야지.”
뭔가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수안에게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어떤 말도 해줄 생각이 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도훈의 태연한 표정에 수안은 적잖이 실망했다.
수안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도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고민거리나 어려움을 함께 나눌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에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수안은 여전히 인생의 동반자가 아닌, 보호해야 할 대상인 게 분명했다.
부부라고 해서 모든 부분을 공유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수안만 해도 태경과의 일을 도훈에게 말하지 않고 있으니까.
도훈이 그녀에게 말하지 않는 부분들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것저것 빼고 나면 실상 그와 그녀가 공유하는 건, 간혹 함께하는 식사라든가, 열정적인 잠자리가 전부인 것만 같았다.
확실히, 도훈과 그녀 사이엔 일반적인 부부들에게 존재하는 그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그건 마치, 감정을 공유하지 않고도 더할 수 없이 환상적인 그들의 잠자리와 같았다.
둘이 함께하는 이 순간이 너무 좋지만, 돌아서고 나면 접점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허전함만 남게 되는, 아름다운 허상 같은 관계.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수안은 자신도 모르게 지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도훈과 함께 일하고 같은 관심사로 의견을 나누는 그녀를 향한 날카로운 질투심이 자신을 좀먹는 것만 같았다.
“수안아, 집중 좀 하지.”
도훈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한없이 이어지던 수안의 상념이 뚝 끊겼다.
참 당혹스럽게도 그녀는 어느새 도훈의 탄탄한 허벅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몰라도, 도훈의 입술은 그녀의 귓불과 목, 쇄골 사이를 무람없이 오가고 있었다.
퍽이나 예민한 사람이니, 수안의 생각이 다른 데에 가 있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배고파서 그러나? 피자부터 먹을래?”
“아!”
여태껏 느끼지 못하고 있던 고소한 내가 콧속으로 훅 파고들었다.
그제야 돌아본 탁자 위엔 피자와 와인이 놓여 있었다.
“여태 피자가 있는 줄도 몰랐다는 얼굴이네.”
“아, 뭐, 그, 와인도 있네요.”
“집중 안 하면 너한테는 한 방울도 없어.”
“치, 완전 집중하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 영화 뭐 보기로 했었죠?”
“아직 보기로 한 거 없고. 나는 지금 막 19금 영화를 찍으려던 참이었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훈의 입술이 목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으으. 아저씨, 너무 느끼해요.”
수안이 목을 움츠리며 도훈을 밀어냈다.
“그래서 싫다고?”
원래도 녹록치 않은 눈썹이 더욱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겁주려는 의도였는지 몰라도, 두꺼운 콩꺼풀을 장착한 수안의 눈에는 투정 부리는 아이 같아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뭐, 싫은 건 아닌데 쫌, 아아, 으흣, 하하하, 하지 마요. 간지러워, 흐읏.”
앙큼하게 눈꺼풀을 깜빡이고 있는 수안의 티셔츠 속으로 도훈의 손이 스리슬쩍 미끄러져 들어왔다.
겨드랑이와 그 아래를 매만지는 손길에 간지러워 몸을 비틀어대던 수안에게서 금세 가냘픈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드라운 입술이 깊게 머금어졌다. 섭슬린 숨결이 뜨겁게 달아올라 거칠게 내뿜어졌다.
“수안아.”
되게 빨려 도드라진 입술 위에서 도훈이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너는 나만 신경 쓰면 돼.”
이글거리는 눈으로 애달프게 조르기에 수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미 충분히 신경 쓰고 있다고, 그래서 당신의 모든 게 궁금하다고,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말들을 꾹꾹 삼킨 채, 간절하게 입을 맞추고 절실하게 안겼다.
***
거리가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은 수안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커피를 손에 든 현진이 바로 뒷자리로 가서 앉았다.
“언니, 조금만 더 떨어져 앉으면 안 돼요?”
“수안이 너 좀 수상해.”
“누구 만나는지 다 밝혔잖아요. 그쪽에서 불편해할까 봐 그래요. 돌발행동은 절대로 안 할 테니까 적정거리 좀 유지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할 거 같은데요.”
무슨 속셈인지 꿰뚫어 보듯 유심히 수안을 살피던 현진이 마지못해 대각선에 위치한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피스 정장 차림의 여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수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그녀를 계속 좇고 있었다.
카페 안을 한 번 쭉 둘러본 여자가 수안을 발견하고 반듯한 자세로 곧장 다가왔다.
스틸레토 힐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꽤 거슬린다고 생각하며 수안은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목이 탔다.
자신이 만든 상황임에도 지희를 마주해야 하는 이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맞은편에 자리하는 그녀를 보는 눈이 심란했다.
“나 별로 안 보고 싶을 텐데, 약속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사모님이 만나자는데 별수 있나요. 그래, 물어볼 말이라는 게 뭐죠?”
“임시주총 얘기가 나오는 것 같던데, 아저씨, 아니, 회장님이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고 싶어요.”
어떻게 된 게, 이런 걸 물어볼 만한 차도훈의 최측근이 안타깝게도 이 여자뿐이었다.
김 전무를 만나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는 회장실에서 진행되는 일은 세세하게 모를 게 뻔했다.
그리고 아무리 아군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도훈을 염탐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 회장이 살아생전 수안을 옆에 끼고 다니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지금의 아군은 있어도 영원한 아군은 없는 거란다. 누구도 온전히 믿으면 안 돼. 또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믿지 못해서는 무엇도 할 수 없지.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상황을 믿어야 해. 주어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니까.”
이 회장의 충고대로라면 김 전무도 언제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김 전무는 이 회장의 아군이었지, 도훈의 아군은 아니었다.
김 전무에게 괜스레 자신과 도훈의 사이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건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택한 인물이 이 여자였는데, 질문을 듣자마자 설핏 비틀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정보제공자를 잘못 고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걸 나한테 물어보다니 뜻밖이네요.”
“그러게요. 내가 알게 된다고 해서 장 실장님이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니, 사실대로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뭐, 말해주는 거야 어려울 거 없으니까.”
지희가 수안에게 알려줘야 하는 이 상황이 영 내키지 않는 것 같은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말을 시작했다.
“박덕규 부회장이 회장님의 자질을 문제 삼아 임시주총을 열어야 한다고 주주들을 부추기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자질이라면 어떤…….”
“20년 전 천안공장 공장장으로 있었던 회장님의 아버님이 횡령한 게 들통 나는 바람에 자살을 했다더군요.”
적잖이 놀란 수안은 잠시 숨 쉬는 것도 잊었다.
횡령이라는 말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살했다는 소리만이 그녀의 온 신경을 자극했다.
그저 자연사였다고 해도 어린 나이에 많이 힘들었을 텐데, 아버지의 자살을 받아들여야 했던 도훈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싶어서 가슴이 저려왔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아이와, 아버지가 지금 꽤나 후회하고 있을 것 같다며 웃던 도훈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위로가 필요한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담담한 도훈의 말에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던 그때의 일이 지금에 와서 후회가 됐다.
엄마와 아빠에게 차례로 버림받은 그때의 도훈을 위로해 주었어야 했다는 후회와 함께, 오래된 상처까지 끄집어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이에 대한 원망이 솟구쳤다.
“20년이나 지난 얘기를 왜 이제 와서…….”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가 버린 원망의 말을 간신히 멈추고, 지희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얕게 심호흡을 했다.
“어디서 들은 건지 몰라도 박덕규 부회장이 그때의 일을 꽤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요. 당사자가 자살하는 바람에 사건이 일단락되긴 했지만, 어찌 됐건 횡령을 했거나 아니면 횡령의 오명을 쓴 사람의 아들을 회장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는 거죠.”
“말도 안 돼.”
“글쎄요, 최대 주주인 부인이 미성년자라는 점을 악용해서 태성을 장악한 뒤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다면 얘기가 그럴듯해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