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난 칭찬에 약한가 봐
흠칫 놀란 수안이 뻣뻣한 고개를 돌리는 사이, 현진이 차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미처 다 돌아보기도 전에 여자가 수안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나는 도훈이 엄마예요. 따로 만나고 싶어요. 연락 줘요.”
빠르게 속삭인 여자가 현진이 닿기도 전에 저택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수안은 손에 쥔 걸 부지불식간에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저 여자 뭐야? 무슨 짓 했어?”
“어, 그, 아무 짓도요. 뭘 하기도 전에 언니가 왔잖아요.”
“그래? 근데 백수안, 내가 전에 뭐라고 주지시켰지?”
현진의 목소리가 위험스럽게 깔렸다.
양손을 공손하게 모아 쥔 수안이 강아지 같은 눈으로 현진을 힐끔 올려다봤다.
“돌발행동 절대금지라고…….”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이런 행동을 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사장님한테 보고할 거야.”
“네에.”
“어서 들어가.”
현진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안은 냉큼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경원 아줌마가 무어라 하는 것도 들은 체 만 체,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현진에게 왜 거짓말을 했는지 자신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훈이 엄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져서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거짓말을 하고 나서야 왜 그랬지 싶었으나, 다시 번복하기가 애매했다.
일단은 여자가 쥐여주고 간 게 뭔지 살펴보고, 의심이건 조치건 그 이후에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간 수안은 문부터 걸어 잠그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약간 구겨진 종이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조금 오래된 듯한 사진 한 장이었다.
손바닥을 맞대어 구겨진 부분을 문질러서 편 수안이 곧 사진에 시선을 집중했다.
가족사진인 듯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낀 남자아이의 활짝 웃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특별할 것 없는 가족사진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이목구비를 섬세하게 조합해 놓은 것 같은 아이는 개구져 보이는 웃음에도 불구하고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수안이 이내 사진을 뒤집었다.
가히 크지 않은 사진 뒷면은 단정하게 써 내려간 글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차도훈의 엄마예요. 믿지 못할 것 같아 내가 가지고 있던 도훈의 사진에 글을 적었어요.
여기까지 읽은 수안이 다시 사진을 뒤집었다.
“어쩐지 드물게 출중하더라니. 이렇게 예쁘게 웃을 줄 아는 꼬마였구나! 울 남편.”
손가락으로 사진을 쓰는 수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지워졌다.
너무 어릴 적 사진이라, 이 아이가 정말 도훈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꼬마 주제에 꽤나 강단 있어 보이는 눈매가 언뜻 도훈인 듯싶다가도, 만개한 꽃 같은 웃음은 영 도훈이 아닌 것만 같았다.
물론 도훈이 어릴 적부터 잘 안 웃었던 건 아니겠지만, 너무나 환한 아이의 웃음에 약간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도훈이 그녀의 앞에서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한 것도 거의 최근이니, 괴리감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입을 살짝 삐죽거린 수안이 다음 내용을 보기 위해 다시 사진을 뒤집었다.
―TV로 도훈을 봤어요. 이제야 엄마라고 나타나는 게 참 뻔뻔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혹시나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용기를 냈어요.
도훈이가 제 아버지 일로 곤란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요.
도훈을 만나서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내 존재 자체가 그 애한테 상처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만나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했으면 해요. 꼭 한 번만 만나줬으면 좋겠어요.
아래 번호로 꼭 연락 줘요.
간절함을 어필하고 싶었는지, ‘꼭’을 두 번이나 사용한 글은 연락을 바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아버지 일? 20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손가락을 입가에 댄 수안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꽤 정성스럽게 또박또박 쓴 글을 다 읽고도 여전히 믿음은 생기지 않았다.
물론, 정체가 불확실한 여자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보다 이걸 도훈이나 현진에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휩싸여 있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수안이 저도 모르게 사진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수안아, 남편 왔다.”
그윽하고 진지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즐거운 듯한 말투에 굳어 있던 수안의 입가에 금세 미소가 감돌았다.
성급하게 돌아가는 문고리를 보며 수안은 재빠르게 문으로 다가갔다.
“어? 문은 왜 잠갔어? 백수안 너, 무슨 사고 쳐?”
의구심이 깃든 도훈의 한마디에 뾰로통해진 수안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진짜,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한다니까. 사고 치냐니, 내가 무슨 어린애예요?”
“그래서, 종일 돈 버느라 고생한 남편을 이렇게 홀대하시겠다?”
“어우. 뭐야아. 멘트 완전 구려.”
“까분다.”
도훈이 습관처럼 수안의 코를 톡 쳤다.
수안의 콧잔등과 미간이 함께 찌푸려졌지만, 기분 나빠 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도훈과의 신체 접촉이 좀 더 다른 의미로 진전되고부터는, 코를 잡거나 볼을 꼬집거나 하는 행동들도 모두 애정 표현처럼 느껴지는 탓이었다.
사실, 도훈과 닿는 것 자체가 좋으니 코가 비틀려도, 볼이 당겨져도 그저 좋았다.
오히려 더 해달라고 마구 들이대고 싶은 마음을 숨기느라, 괜스레 뾰로통한 표정을 꾸며내곤 했다.
다행히 도훈은 수안의 그런 표정을 싫어하지 않는 듯했다.
꼭 다시 손을 가져다 대곤 했으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도훈이 삐죽거리는 수안의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부끄럼 많은 새색시에 빙의한 수안이 얼굴을 붉히며 괜한 헛기침을 했다.
“흠흠,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야릇해지는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꺼낸 말에 비스듬히 웃어 보인 도훈이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문틀에 기대섰다.
“오늘 내 아내가 중간고사 끝나는 날이래.”
“오오, 그래서요?”
“함께 영화를 볼까 생각했지.”
그의 말에 금세 기쁨이 차오른 수안의 입가가 웃음을 참느라 실룩댔다.
“음, 뭐, 괜찮을 것 같네요.”
“좋았어. 저녁은 영화 보면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게 좋겠지. 피자 어때?”
“와우, 울 남편 완전 짱!”
입술을 길게 늘이고 엄지를 치켜든 수안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도훈이 별안간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채더니 입술을 겹쳐왔다.
강렬한 키스가 수안을 집어삼킬 듯 이어지다가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이제야 알았네. 난 칭찬에 약한가 봐.”
자신의 코앞에서 빙긋 웃어 보이는 도훈이 숨이 막히도록 매력적이었다.
“저기, 아저씨?”
“음?”
“우리 혹시 19금 영화 볼 거예요?”
멈칫 굳어졌던 도훈이 멋쩍은 듯 눈썹 위를 쓸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도훈의 얼굴이 사진 속의 아이처럼 환하게 만개했다.
따라서 웃고 싶어질 만큼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어쩌면 사진 속 아이는 어린 도훈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하, 19금 영화를 보든, 찍든, 우선은 좀 씻어야겠지? 어때? 같이 씻을까?”
“아우, 뭐래. 얼른 나가요, 얼른. 좀 이따가 1층에서 봐요.”
도훈은 못 이긴 척 등을 떠밀려 나갔다.
문을 닫고 기대서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던 수안이 주머니 속의 사진을 꺼내서 찬찬히 들여다봤다.
“역변 없이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해야겠네. 흣.”
제가 말해놓고도 실없이 들려서 작게 헛웃음을 흘린 수안이 사진을 맨 아래 서랍에 넣고 닫아버렸다.
사진 속의 아이가 정말 도훈이건 아니건, 또 사진을 주고 간 여자가 도훈의 어머니건 아니건, 일단은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도훈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지 몰라도, 지금의 그는 자신의 곁을 떠났던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불행하지 않았다.
사진 뒷면에 쓰여 있던 대로 그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상처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이대로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니 여자에 대해 알 필요도, 만날 이유도 없었다.
나름의 결론을 내린 수안이 가벼운 마음으로 샤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홈시어터가 갖추어져 있는 방으로 다가가니 이미 문이 살짝 열려 있고, 안쪽에서 도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통화 중인 듯했다.
통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가니, 입구를 등진 도훈의 널찍한 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아버지 일 때문에 회장으로서의 내 자질도 의심스럽다?”
도훈의 멋진 뒤태를 기분 좋게 감상하고 있던 수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래서 기어이 임시주총이라도 열겠다는 건가?”
도훈의 말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들었다.
수안은 실례인 줄 알면서도 통화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에 살금살금 도훈에게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