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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그의 집중력 (64/88)

64. 그의 집중력

더없이 초췌한 몰골로 꼿꼿하게 앉은 자현이 마주 앉은 변호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서류를 넘기는 변호사의 얼굴이 하품을 참는 것처럼 느른하게 일그러졌다.

“기석 씨는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변호사가 안경 너머로 수인복 차림의 자현을 힐끔 쳐다봤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그렇지, 잠깐 얼굴도 못 보여준대요?”

몇 번이나 면담 요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부당했다.

그가 붙여준 변호사는 대충 시간만 때우고 가기 일쑤였다.

그런 사람이 재판이라고 제대로 임할 리 없었다.

도훈이 예고했던 대로 모든 상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조사랄 것도 없이 최단시간에 검찰에 송치됐고, 담당 검사는 기석과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한 검사로 배정됐다.

거기다 보석 신청은 아예 하지 않기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으며, 이 같잖은 변호사는 그녀를 정신 나간 납치범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당신, 나를 변호할 마음은 있는 건가요?”

비아냥거리듯 물은 말에 되돌아온 건 짧은 비웃음뿐이었다.

어떤 의미인지 모를 수 없었다.

“기석 씨한테 얼마나 받았어요?”

“이거 읽어보고 숙지하세요. 첫 공판 들어가면 이대로 진행할 겁니다.”

묻는 말에는 답도 없이 ‘사건 개요’라 쓰여 있는 종이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분량만큼이나 참 성의 없는 내용을 읽다가, 자현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짓씹었다.

“백기석한테 전하세요. 나를 버리려는 거면 실수하는 거라고.”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토해낸 자현이 변호사가 건넨 종이를 잡아 뜯듯 찢어버렸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할 거야. 납치하라고 시킨 것도, 내가 아니라 백기석이 그 계집애 때린 것도 다 불어버릴 거라고. 나 혼자만 죽을 것 같아. 내가 끝까지…….”

“이자현 씨, 그냥 정신감정을 받는 게 어떻겠습니까?”

“날 미친년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스토커? 웃기지 말라 그래.”

“흠, 그걸 누가 믿어줄까요?”

“뭐?”

“이봐, 이자현 씨. 설사 이자현 씨가 백기석 검사를 물고 늘어져서 형이 감량된다고 칩시다. 그 뒤엔 어떻게 살 건데? 백기석이 그냥 둘 것 같아? 정신 똑바로 차려, 이 여자야.”

버릇인 듯 안경을 치켜 올린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려다보는 자현의 눈이 처참하게 붉어졌다.

하기 싫은 숙제를 끝낸 사람처럼 홀가분한 걸음걸이로 접견실을 나서는 변호사를 쏘아보고 있던 자현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차도훈이라는 이름과 개인 연락처가 찍힌 명함을 매만지는 자현의 눈에 회한을 품은 악의가 일렁이고 있었다.

***

중간고사와 리포트에 시달리는 동안, 극성스럽게 화려했던 벚꽃은 모두 져버렸다.

도훈과 손을 맞잡고 벚나무 아래를 걸었던 열흘 전이 까마득한 옛날인 것만 같았다.

그사이 도훈은 회장에 취임했다.

학업과 회사 업무로 두 사람 모두에게 바쁜 나날들이었다.

도훈은 바쁜 중에도 수안과 함께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남은 업무를 집에서 처리할지언정 퇴근은 8시를 넘지 않았으며, 귀가하면 서재에서 혹은 침실에서 그녀와 붙어 있다시피 했다.

다시 한번 느낀 거지만, 도훈의 집중력은 정말 대단했다.

업무에 한 번 몰두하면 다른 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때때로 일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에 매료되어 넋을 잃는 자신을 생각하면, 그의 탁월한 집중력이 얄미워질 때가 있었다.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약자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그에게로 자꾸 신경이 쏠리는 통에 시험 공부하는 내내 애를 먹었던 수안에 비해, 도훈은 업무가 끝날 때까지 그녀 쪽으론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업무가 끝난 뒤에 도훈의 집중력은 예외 없이 수안에게로 향했다.

그 집중력이란 업무를 볼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서, 수안이 뭘 하고 있건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아저씨, 나 이거 마저 해야 해요.”

“그래.”

“그렇게 보고 있으면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나만 하려고. 나도 참았으니까, 너도 참아봐.”

“네에? 아저씨, 설마 내가 조금 쳐다봤다고 지금 복수하는 거예요?”

“30분 정도는 견뎌볼 테니까, 어서 빨리 집중이나 해.”

거의 이런 식이었다. 그러면 수안은 30분이 아니라 5분도 더 못 버티고 책을 덮어버리곤 했다.

어쩌랴. 도훈을 사랑하는 그녀는 천하의 둘도 없는 약자인걸.

그다음은 뭐, 뻔했다.

도훈은 침실로 향하는 잠시 잠깐도 참기 힘든 것처럼 대뜸 수안의 입술부터 머금고 봤다.

그렇게 입술을 빼앗기고 나면 거의 게임 끝이었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지고, 심장은 쫄깃하게 조여들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며 오직 도훈만이 선명하게 각인됐다.

수안은 키스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려 그에게 온몸을 내맡기곤 했다.

그렇게 흐트러져서 가늘게 신음하면 도훈은 더 흥분하는 것 같았다.

오로지 그녀에 대한 열망만이 그를 지배하는 듯, 도훈은 수안의 온몸을 뜨겁게 어루만지고 맛봤다.

그의 손이 닿는 모든 곳이 아플 정도로 달아올랐다. 두 사람이 한 몸인 듯 뒤엉켜 극한의 절정에 신음하며 앓았다.

너무도 황홀하고 소중한 그 순간, 수안은 때때로 서글퍼졌다.

그녀가 세상의 전부인 양 집중하는 도훈의 모습이 업무를 볼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느껴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너도 결국은 차도훈에겐 일이라는 지희의 말이 아프게 와 닿았다.

남편으로서 더없이 다정하고 듬직한 그에게 더 이상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임을 알면서도, 마음 그 하나를 몰라 문득문득 가슴이 저렸다.

그런 자신의 불안함을 도훈은 끝끝내 몰라야 했다. 그가 그녀의 사랑에 대해 책임을 느끼길 원하지 않았다.

진짜 부부로 살자는 요구를 결국엔 수긍하고 받아들여 줬던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수긍하는 선에서 일종의 의무감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나미는 할 거 다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며 핀잔을 줬지만, 할 거 다 한 마당이라 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도훈은 자신의 감정보다 그녀에 대한 책임을 우선으로 할 게 뻔했다.

그런 식으로 도훈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암튼, 이런 복잡한 감정들을 안고 밤마다 남편과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는 데에 열을 올리면서도, 무사히 시험을 치러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용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휴우!”

“차 주저앉겠네. 왜? 시험 못 봤어?”

조수석에 앉아 있던 현진이 수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요, 잘 봤어요.”

“그럼 뭐, 그 친구 한태경 때문에 그래?”

“그게 그렇긴 한데,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매일 붙어 다니다가 요즘은 통 같이 다니질 않잖아. 한태경 그 친구는 완전 죽상이고. 그날 얘기가 잘 안 된 거지?”

그날, 꽃도 채 피지 않은 벚나무 아래에서 기약했던 다음은 꽃이 모두 다 져버린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태경은 그녀를 피해 다니는 중이었고, 수안은 줄곧 그의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둘 사이에 끼인 나미마저 짜증이 극에 달한지라, 그들은 친구가 된 이래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미는 어떤 식으로건 빨리 결판을 내라고 닦달을 했지만, 수안은 태경이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대로 태경과의 인연이 끝나 버리면 어쩌나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휴우, 사람 감정만큼 힘든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 그것만큼 힘들고 복잡한 건…….”

갑자기 말을 멈춘 현진이 저택 담장 앞을 서성이는 중년여자에게로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어, 저분 어제도 저기 있었던 것 같은데?”

수안이 작게 중얼거리자, 현진이 운전을 하고 있는 경호원에게 차를 멈추게 했다.

“언니.”

“잠깐 있어. 확인 좀 하고 올게.”

수안을 안심시킨 현진이 다른 경호원에게 눈으로 사인을 보낸 뒤, 차 문을 열었다.

차가 멈추기 전부터 힐끔거리고 있던 여자가 차 문이 열리자마자 재빠르게 몸을 돌려 저택 담장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감춰 버렸다.

쫓을까 말까 망설이던 현진이 뒷좌석의 수안을 곁눈질하더니, 다시 차에 올랐다.

“아마 도우미 아주머니일 거예요. 경원 아줌마가 오늘 봄맞이 대청소한다고 사람 부른다고 했거든요.”

“그래?”

수안의 말에도 현진은 기민하게 주변을 살피고는 주차장 안까지 들어가 수안을 내려주었다.

“곧장 들어가.”

“여기서 다른 데로 새기가 더 힘들겠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경쾌하게 인사를 건넨 수안이 주차장 계단을 올라 거실로 들어서자, 경원 아줌마가 현관문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근데 아줌마, 거기 서서 뭐 해요?”

“아니, 좀 전에 어떤 여자가 여기가 차도훈 사장님 집이 맞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가버리더라니까. 뭔지 모르게 찜찜하네.”

수안도 옆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냉큼 가방을 내려놓고 현관문을 나섰다.

정원을 내달려 대문을 열었을 때, 막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현진의 차가 보였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어깨 위로 손이 턱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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