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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아주 지독한 사랑 (63/88)

63. 아주 지독한 사랑

종업원이 안내해 준 방 앞에 멈춰 선 지희가 시간을 확인하곤 입매를 굳혔다.

약속 시간까지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내내 했던 고민을 이제는 그만 끝내야 했다.

이 문턱 너머에 진흙탕이 있었다.

진흙탕이란 게 으레 그렇듯 한 번 뒹굴고 나면 온통 더럽혀질 게 뻔했다.

원래 백옥 같았던 적이 없었으니 더럽혀지는 거야 문제될 게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의구심과 자괴감이 발목을 잡아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익숙한 뉴욕을 뒤로하고 한국행을 결정했던 그때처럼, 차도훈 그 하나를 가지기 위해 뭐든 해볼 참이었다.

마음을 굳힌 지희가 간결한 동작으로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었다.

재킷을 벗은 편안한 모습으로 손을 닦고 있던 기석이 그녀를 힐끔 올려다봤다.

“일찍 오셨네요.”

“누구처럼 문 앞에서 서성이느라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거든.”

비꼬는 게 분명한 그의 말에 지희의 눈꼬리가 좀 더 치켜 올라갔다.

수안의 아빠라는 이유만으로도 비호감이었던 이 남자가 한층 더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이 불편한 만남을 되도록 빨리 끝내야 했다.

“우선, 백기석 검사님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싶습니다.”

기석이 도전적으로 묻는 지희를 힐끔 쳐다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사람은 말이야, 조급해지면 실수를 하게 되거든. 나하고 뭐든 하고 싶은 거라면, 그 싫어 죽겠는 것 같은 표정부터 숨겨. 일단 밥부터 먹지.”

미리 주문을 했는지, 기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음식이 날라져 왔다.

깔끔하게 담긴 음식은 둘이 먹기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짓수가 많았다.

고소한 내가 진동을 하는데도 보는 것만으로도 질렸다.

즐거운 듯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하는 기석을 바라보다가 물을 한 모금 삼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박덕규 회장을 연결시켜 줄게요. 세를 많이 잃기는 했지만, 현재로선 주주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차도훈의 비서가 박덕규를 연결시켜 주겠다? 흠, 재밌군.”

“원한다면 대성캐피탈 김운철 대표와의 자리도 마련해 줄 수 있어요. 당신이 그럴듯한 걸 쥐고 있다면 말이에요.”

“이쯤 되면 의도가 뭔지 궁금해지는군.”

느긋하게 팔짱을 끼는 기석을 주시하던 지희가 입을 살짝 삐죽였다.

마치 자신이 의도한 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차도훈의 추락이요.”

지희의 말이 의외였던 듯, 기석은 잠시 멈칫했다.

“백수안이 가진 지분을 탐내고 있는 거 아니었나요? 그러기 위해선 차도훈이라는 걸림돌을 처리해야 할 테고요. 직접적으로 부딪쳐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거, 이미 알았을 텐데요.”

지희의 말이 맞았다. 오늘도 겁을 주기 위해 찾아갔다가 도리어 협박만 당하고 쫓겨났다.

차도훈을 직접적으로 공략하기보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건 그도 이미 생각한 바였다.

그래서 박덕규와 김운철에 관한 자료도 꽤 많이 확보한 상태였다.

다만,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 골몰하던 차였는데, 그걸 해결해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 여자를 뭘 보고 믿지?

“못 믿겠다는 표정이군요. 근데 당신과 나 사이에 믿음이 필요할까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인 지희가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흠, 하하, 하하하. 믿음이 필요 없는 관계라, 좋군. 그럼 이 관계에서 그쪽이 얻게 되는 건 뭐지?”

“차도훈이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백수안도 떨어져 나가지 않겠어요? 그땐 두 사람 확실하게 분리시켜 주세요.”

“하, 망가뜨려서라도 가지겠다? 아주 지독한 사랑이군 그래.”

“뭔가 잘못 알고 있는데, 차도훈은 잠시 추락한다고 해서 망가지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두지도 않을 거고요.”

말을 끝낸 지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은 내 쪽에서 하죠. 마주 앉아 밥 먹을 사이도 아닌 것 같아서 이만 일어날게요.”

도망치듯 나가 버리는 지희을 좇고 있던 기석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지루할 정도로 느긋하게 음식을 씹어 삼키는 기석의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

[아저씨.]

맑고 경쾌한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그의 귓속으로 또르르 굴러 들어온다.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늘어지는 도훈의 입술을 발견한 김 비서가 흠칫해서는 다른 곳으로 냉큼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디?”

[우리 집. 근데에, 나 지금 완전 우울해요. 미시경제론 리포트 써야 하는데, 이건 경영학 과젠지 문창과 과젠지 알 수가 없다니까요.]

우리 집이라는 소리에 쿵 내려앉았던 가슴이 불퉁한 목소리에 일순 조여든다.

자신의 감정이 이렇게도 쉽게 들쑥날쑥해질 수 있다는 데에 머쓱해진 도훈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쓸었다.

“리포트 주제가 뭔데?”

[열등제의 가격 상승에 따른 대체효과와 소득효과를 현재 자신의 가정에 빗대어 서술하시오.]

“이목형 교수님 강의지? 흣, 그 양반 여전하시네.”

[어, 이 교수님을 알아요?]

“그래.”

도훈의 대답에 탄성을 지른 수안이 소나기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하나의 질문에 미처 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대충 ‘어’나 ‘그래’ 정도의 답으로 얼버무리는 도훈에게서 나직한 웃음이 샜다.

고무공처럼 통통 튀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몸속 어딘가가 자꾸 간질간질했다.

완전 음악 소리나 다름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홀려 있는 사이, 수안은 두 사람이 직속 선후배 관계라는 데에 놀랐다가 이내 뾰로통해졌다.

[근데, 아저씨 웃어요? 난 완전 심각한데.]

“집 앞인데, 나올래?”

김 비서에게 이만 들어가 보라 손짓한 도훈이 차에서 내렸다.

“요 앞에 벚꽃 보러 가자.”

[이거, 데이트하자의 다른 버전인 거죠?]

“백수안 똑똑하네.”

[근데 어쩌죠? 나 리포트…….]

“수안아, 우리 학번에서 유일하게 이목형 교수한테 A+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네 남편이다.”

[와! 그 교수 짠돌이라고 선배들이 난리도 아니었는데. 내 남편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내 남편 소리에 또 실없이 웃음이 샜다.

말도 어찌나 예쁘게 하는지, 옆에 있었으면 아무 데나 꽉 깨물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과제하는 거 도와줄 테니까 얼른 나와. 벚꽃도 보고 까까도 사줄게.”

[흐흐,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나가, 으악.]

휴대폰 너머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도훈이 다급하게 외쳤다.

“수안아! 괜찮으니까 천천히…….”

간절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표정을 굳힌 도훈이 저택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비번을 눌러 대문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동안,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느리게 열리는 대문을 확 밀어젖힌 도훈이 돌계단을 두 개씩 뛰어올라 정원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 머리를 나풀거리며 달려오던 수안이 냉큼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헉! 아까 그 소리 뭐야? 이렇게 해봐. 어디 다친 거야?”

말캉하게 겹쳐오는 몸을 꽉 부둥켜안았던 도훈이 이내 살짝 떼어놓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아, 발에 걸려서 의자가 넘어졌는데, 괜찮아요. 근데 아저씨 얼굴 완전 사색이야. 나 다쳤을까 봐 걱정했어요?”

“그럼 안 해? 정말 다친 데 없어?”

“응. 없어요.”

세심하게 살피는 도훈의 눈길에 가슴이 빵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래서 되게 부딪친 발가락의 욱신거림 따위는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우리 벚꽃 보러 가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와락 팔짱부터 끼고 봤다. 당연한 듯 정수리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이내 팔을 빼낸 도훈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한걸음을 내딛다가 우뚝 멈춰 섰다.

영문을 몰라 의아한 눈길로 올려다보는 수안의 입술이 탐스럽게 빛났다.

무엇엔가 굴복하듯 고개를 내저은 도훈이 나른한 한숨과 함께 입술을 겹쳐왔다.

쑥 밀려들어 온 혀가 달짝지근하게 얽혔다.

그의 키스는 매번 이렇게 뜬금없고도 열정적이었다.

첫날밤을 보낸 이후로 계속 이런 패턴이라,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놀랍지 않다고 해서 익숙한 것도 아니었다. 어쩜 이렇게 매순간 황홀하고 아득한지.

뭐든 완벽을 추구하는 울 남편은 키스조차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게 분명했다.

수안은 아찔한 쾌감에 전율하며 그의 품에 아예 파묻히고 싶은 듯 몸을 밀착시켰다.

어디에 있는지, 뭘 해야 하는지, 모두 까마득하게 잊혀져 간다.

오직 그와 그녀, 그리고 입술과 혀가 만들어내는 선정적인 감각만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운 듯한 느낌에 도취되어 수안은 가냘프게 앓았다.

“하아! 이렇게 예쁘게 엉겨 붙으면, 너 오늘 벚꽃 보러 못 가.”

도훈이 깊게 침잠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열망에 휩싸인 도훈은 매혹 그 자체라, 수안은 하마터면 벚꽃 안 봐도 된다는 소리를 할 뻔했다.

절대로 안 될 소리.

도훈과 처음으로 함께 보는 벚꽃이었다.

너무나 화려하게 만발했다가 순식간에 져버리고 말아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 어쩐지 슬퍼지기도 하는,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벚꽃을 도훈과 함께 눈에 담고 싶었다.

냉큼 한 발 떨어진 수안이 그의 손을 잡았다.

“가요, 얼른. 아저씨랑 맞이하는 벚꽃은 처음이니까, 꼭 보고 싶어요.”

“그래.”

제 의지가 아니면 꿈쩍을 않는 도훈이 살랑거리듯 잡아끄는 힘에 못 이기는 척 그대로 몸을 내맡겼다.

대문을 넘고 비탈진 길을 지나, 자그마한 공원 입구에 즐비한 벚꽃 무더기를 향해 한데 엉긴 두 사람이 그림인 듯 스며든다.

포근하고 달짝지근한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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