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당신은 내 손에 죽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시간부터 확인한 도훈이 소파에 걸터앉는 기석에게 냉랭한 눈길을 보냈다.
“사위가 태성그룹 회장으로 선임됐다는데 축하 정도는 얼굴 맞대고 해야 하지 않겠나.”
“공식 발표도 있기 전인데 아는 걸 보면, 남몰래 쥐새끼라도 심어놓았나 봅니다.”
“아, 기분 나빠 하지 말게. 내가 졸지에 딸을 빼앗겨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면 뭐라도 해봐야 했거든.”
빌어먹을 납치사건 이후로 어찌나 철저하게 가드를 하는지, 백수안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른 방안을 강구해 보는 수밖에.
두 눈 번히 뜨고 제 것을 모두 빼앗기게 생겼는데,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수안이 불러서 저녁이라도 함께하는 게.”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만 일어나는 게 좋겠군요. 알다시피 저녁 약속이나 잡으며 노닥거릴 처지가 아니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훈에게선 그 어떤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종일관 느물거리며 초조한 듯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는 기석과 대조되어, 도훈의 담담함은 더욱 더 돋보였다.
“건방진 놈. 늙은이 뒤나 닦아주고 얻어낸 자리 가지고 거들먹거리기는.”
도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린 기석의 말에도 도훈은 어깨만 으쓱할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 자리를 과연 얼마나 지킬 수 있을 것 같나?”
“필요한 만큼은 지킬 겁니다.”
마호가니 책상 앞에 멈춰 선 도훈이 그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나직하게 말했다.
“흠, 필요한 만큼이라. 그게 뜻대로 될까?”
자리에서 일어난 기석이 도훈의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섰다.
“네놈이 간과한 게 있어. 그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가 왜 끝끝내 나와 주은이를 이혼 못 시켰는지 아나?”
재킷주머니에서 조그만 USB를 꺼낸 기석이 책상 위에 딸깍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태성그룹 이태봉 회장의 은밀한 사생활. 시간 날 때 한 번 봐. 탈세와 비자금 조성, 분식회계를 통한 주가 조작. 흥미진진한 내용들로 가득 채워놨으니까, 아마 지루하진 않을 거야.”
“3년 전에 폐업 수순을 밟은 서영인터내셔널에 관한 얘기라면 새로울 것도, 흥미로울 것도 없습니다만.”
기석이 틀어쥐고 있는 이 회장의 비리에 관한 내용이라면, 태성그룹 내에서 도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도훈이 총괄사장을 맡으며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적폐 청산이었다.
이미 행해졌던 일들을 무마시킬 순 없지만, 그가 이끄는, 혹은 수안이 이끌게 될 앞으로의 태성은 편법과 불법 행위가 통하지 않는 바른 기업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분식회계를 묵인해 온 회계법인과의 관계를 정리했으며, 이 회장이 생전에 유령회사인 서영인터내셔널을 활용해 조성한 3조원대의 비자금은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데 쓰일 예정이었다.
그러니 죽은 사람한테 죄를 물을 게 아니라면, 기석이 의기양양하게 내민 USB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훈의 입에서 서영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이 거론됐을 때 기석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하지만 기석이 틀어쥔 건 그것만이 아니었던 듯, 굳었던 얼굴에 이내 비릿한 웃음이 내려앉았다.
“아, 오해했나 보네. 이건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지.”
기석이 꽤나 위협적인 얼굴로 한 발 다가섰다가, 올려다봐야 하는 키 차이가 영 내키지 않는 듯 이내 다시 물러났다.
“본편은 말이야, 뭐랄까, 좀 더 가족적인 얘기라고 할 수 있지. 가령, 횡령한 게 들통 나서 자살한 네 애비 얘기 같은 거 말이야. 흣, 주주들이 꽤 관심 있어 할 것 같지 않아?”
손가락으로 이마를 한차례 문지른 도훈이 책상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었다.
“대한민국 검사가 이렇게까지 한가한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대영건설에서 받은 돈값 하려면 꽤 바쁠 거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뭐, 뭐야?”
기석의 얼굴이 대번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불법하도급과 불법시공 행위로 대영건설이 검찰에 송치된 건 불과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대영건설 쪽 변호사를 통해 대표를 만난 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차도훈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X발, 누구 앞길을 막으려고 되도 않은 소릴 막 지껄이는 거야? 어린 계집애 치마폭에서 단물 쪽쪽 빨아먹고 있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지? 엉?”
발끈한 기석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도훈의 턱밑까지 다가왔다.
“너나 그 계집애나 주제를 몰라. 내가 마음이 너무 약했지. 그 계집애 목을 비틀어서라도 사인으, 컥!”
눈 깜짝할 사이에 멱살이 틀어 잡혔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뒤꿈치가 치켜 올려지고 숨통이 조여든 뒤에도, 기석은 잠시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다.
강제로 마주한 도훈의 눈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경직된 몸에서 내뿜어지는 위압감이 기석을 호되게 짓눌렀다.
갑작스럽게 표출된 분노는 담담하고 냉랭했던 모습과의 간극이 너무 커서 도리어 현실감이 없었다.
모든 것에 초연했던 맹수가 이제 막 내면 깊숙이 자리한 살의를 자각한 것처럼 그의 눈빛엔 자비란 없었다.
대체 무엇이 이놈을 이토록 자극한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껏 비꼬았던 제 아비에 관한 얘기에도 태연했던 녀석이 갑자기 왜…….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그의 본능이 도훈을 강자로 인식하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기석은 극도의 긴장감으로 숨을 헐떡이며, 도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댔다.
“컥, 이거 놔, 이 새, 윽.”
무지막지하게 힘이 들어간 손목을 잡고 벌벌 떨면서도 일말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기석이 씹어뱉듯 말을 토해내다가, 그마저도 미처 끝을 맺지 못했다.
“이 목을, 그때 꺾어버렸어야 했어.”
분노로 다져진 것 같은 말이 도훈의 입새로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그때 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라도 실행에 옮기려는 것처럼 멱살을 움켜쥔 손목에 핏줄이 터질 듯 불거졌다.
“상식선에서 움직일 때 자중하셔야지. 감히…….”
붉게 달아올라 숨이 넘어갈 듯 컥컥대는 기석의 얼굴을 보면서도 도훈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수안의 목을 비틀었어야 했다는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을 찔러댔다.
맞아서 엉망인 수안의 얼굴을 보고도, 그녀의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석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순순히 경찰로 넘겼던 그 순간이 뼈저리게 후회가 됐다.
“하나만 명심해. 수안이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당신은 내 손에 죽어.”
살벌하게 경고의 말을 날린 도훈이 기석의 멱살을 팽개치듯 놓아줬다.
휘청거리는 기석을 바라보는 도훈의 눈이 채 가시지 않은 분노로 뜨겁게 일렁였다.
기석이 잡아 뜯듯 할퀴어댄 손등에 군데군데 핏기가 맺혀 있었지만, 그는 그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 이 새끼, 감히 나를 협박해! 네가 그러고도 무사…….”
“보안요원한테 끌려 나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만 돌아가시죠.”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는 도훈을 잡아 죽일 것처럼 바라보던 기석이 이를 부득 갈며 사무실을 나섰다.
문이 부서져라 열어젖힌 기석을 지희가 가늠해 보는 듯한 눈길로 쳐다봤지만, 그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화풀이할 대상을 찾지 못한 기석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무슨 수를 쓰든 오늘 당한 수모를 반드시 갚아주고 말리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갔다.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깊이 골몰하던 기석이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네놈이 그렇게 흥분한 이유가 백수안 때문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그걸 십분 활용하는 수밖에.”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기석이 막 연락처 하나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할 때,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바로 끊어버렸을 기석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망설였다.
항상 자신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그의 예민한 촉이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끊어지지 않고 울려대는 휴대폰을 톡톡 치던 기석이 마침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제야 받으시네요, 백기석 검사님.]
약간 높고 또랑또랑한 여자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에 기석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대체 누군데 나를 알고 있는 겁니까?”
[비서실장 장지희라고 합니다. 좀 전에 만났는데, 기억하시려나요?]
좀 전에 만났다는 말에 차도훈 앞에서 앙큼한 짓을 서슴지 않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무슨 용건이지?”
[좀 만났으면 합니다.]
“왜?”
[오늘 저녁 7시 석정으로 오세요. 장지희 이름으로 예약해 놓겠습니다.]
기석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끊어진 휴대폰을 쳐다보는 기석에게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차도훈의 비서실장이 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 이 여자 음식점 이름을 대면서 거기가 어딘지 아느냐 묻지도 않았다.
석정은 깔끔한 음식과 프라이빗한 룸이 마음에 들어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져야 할 때, 그가 주로 애용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이 여자가 알고 있다는 건, 차도훈과 정보를 공유한다는 건가?
“흠, 의도가 뭔지 확인은 해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