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이제 막 신혼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사장님.”
주로 운전이나 외부 미팅 쪽 일을 도맡고 있는 김 비서가 도훈의 안색을 살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래 보입니까?”
사실, 도훈의 표정은 평상시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표정의 화신답게 정갈하고 냉엄했다.
그럼에도 김 비서가 그에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쓸데없는 말을 건넨 건, 30분 전에 도훈의 자택 주차장에서 목도한 장면 때문이었다.
어린 사모님이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온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더 놀라웠던 건 도훈의 태도였다.
이른 아침부터 빛이 나는 얼굴로 상큼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와이프를 시종일관 무감한 표정으로 지나칠 때만 해도 역시 차도훈이지,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뒷좌석 문을 열고 기다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돌아갈 때만 해도 무언가 잊고 왔겠거니,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잊고 온 게 설마 백수안과 관련된 일일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김 비서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이 수안에게로 곧장 다가간 도훈은 무어라 말을 건네는 그녀에게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뒤에 서 있는 김 비서에게는 도훈의 널찍한 어깨와 비스듬하게 숙여진 고개가 보이는 것의 전부였지만, 두 사람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김 비서는 그야말로 침이라도 흘릴 기세로 입을 떡 벌린 채, 보고도 믿기지 않는 장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 출근인사를 마친 도훈이 이내 돌아서서 다가오는데도 김 비서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흐트러진 표정으로만 치면 아침부터 진한 입맞춤을 나눈 사람은 도훈이 아니라 김 비서라고 해도 믿을 상황이었다.
너무 쉽게 현실로 돌아온 도훈에 비해 김 비서는 회사로 운전해 오는 내내 다른 데로 흘러가 버리려는 생각을 애써 붙잡아둬야 했다.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 두 사람이 아직 신혼인 걸 감안하면 그 정도의 스킨십은 그리 유난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스킨십의 장본인이 차도훈이라는 데에 있었다.
차도훈이 누군가.
쉽게 흥분하는 법도 없고, 얼굴에 감정이 나타나는 법도 없어서 감정이 아예 없는 게 아니냐는 소문마저 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키스를 끝내고 돌아서며 어린 사모님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는 도훈의 표정에는 남자인 그의 가슴마저 설레게 할 만큼의 감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니 무감한 저 표정이 언뜻언뜻 기분 좋은 얼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네, 그래 보이십니다.”
“흠흠, 아무래도 이제 막 신혼이다 보니, 자제한다고 하는데도 표시가 나나 봅니다.”
막 신혼?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그나저나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저거 귓불 붉어진 거 맞지? 이거 진짜 실화냐?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뜬 김 비서가 까치발을 들고 도훈과 거리를 좁혔다.
힐끔 돌아보는 무감한 눈길에 놀라 뒤로 물러나면서도 붉어진 도훈의 귓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김 비서도 신혼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아, 네, 뭐, 이제 10개월 됐습니다. 근데 신혼이라기엔 좀……. 흐흐, 제가 속도위반을 하는 바람에 2개월 된 아기가 있습니다. 이 녀석이 밤낮이 뒤바뀌다 보니 신혼은 벌써 물 건너갔지 뭡니까. 하하하.”
“아!”
머리를 긁적이며 웃던 김 비서가 너무도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도훈의 감탄사에 슬쩍 눈치부터 살폈다.
그를 보좌한 지 6개월째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사적인 얘기를 이렇게 길게 나눠보긴 처음이었다.
혹시 자신이 너무 주제넘게 군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회장실로 영전하는 즉시 비서실 증원부터 해야겠군요.”
“네?”
“육아가 보통 힘든 게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김 비서는 당분간 야근 없는 거로 합시다.”
“예? 아,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니, 회장님.”
“좋아하는 거 보니 내가 야근을 많이 시키긴 했나 봅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뭐라 하는 거 아니니 됐습니다. 그리고 호칭은 일주일 후에나 바꿉시다. 아직은 사장이니까.”
도훈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장실로 성큼 들어서며 경쾌하게 말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지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일정 브리핑은 5분만 미룹시다.”
도훈은 지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사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지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히 변한 건 없는데, 이상하게 뭔가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늘 똑같던 간결한 말투며 걸음걸이에 오늘따라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싸하게 불안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김 비서를 향해 여상하게 물었다.
“아, 뭐, 신혼이시지 않습니까. 그맘때야 매일이 특별한 법이죠.”
“김 비서님, 사장님 사생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삼가는 게 좋겠군요. 듣기 거북하네요.”
날을 세우는 지희를 보는 김 비서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원래도 김 비서는 지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나이로 보나 연차로 보나 비서실장 자리는 자신의 몫이어야 맞았다.
안 그래도 부당하게 제 자리를 빼앗겼다 싶어서 기분 나쁜데, 이 여자 간혹 건방지고 대체로 싸가지가 없었다.
한마디로 비호감이다. 그러니 저런 말들이 곱게 들릴 리 없었다.
“사장님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는데 실장님은 왜 듣기 거북하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만.”
“이보세요, 김 비서님. 사장님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이미지 관리가 중요한 시기입니다. 사장님 업무 능력과 상관없는 그런 말들이, 특히나 비서실에서 나가는 건 좋지 않습니다. 아시겠어요?”
“글쎄요, 사장님 내외분 사이가 좋다는 말이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진 않은데요.”
“확인도 안 된 사실이 회자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뭐, 별 상관없겠네요.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사실이니 말입니다.”
“네? 그게 무슨…….”
지희의 말을 끊고 인터폰이 울렸다.
[5분 지났는데, 브리핑 안 합니까?]
인터폰을 거쳤음에도 더없이 경쾌하게 들리는 도훈의 목소리가 비서실 안에 울려 퍼졌다.
김 비서가 어서 들어가지 않고 뭐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지희는 하는 수 없이 태블릿을 챙겨 사장실로 들어갔다.
그 뒤로 바쁘게 하루가 흘러갔다.
김 비서의 얘기와 도훈의 미묘한 변화가 영 신경에 거슬렸지만, 확인해 볼 여유 같은 건 좀체 생기지 않았다.
도훈의 어마어마한 업무량 때문에 안 그래도 바빴던 비서실은 취임식을 앞두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아침의 그 찜찜함은 그대로 묻어둔 채 하루를 거의 다 보냈다.
신혼 어쩌고 떠들어대던 김 비서의 말이 다시 떠오른 건, 1층 안내데스크에서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실장님, 서울중앙지검의 백기석 검사님이 찾아오셨는데 방문자 명단에 없어서요. 어떻게 할까요?]
“명단에 없는 방문자 대응매뉴얼 몰라요?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하나요?”
지희가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한심하다는 투로 냉랭하게 말을 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는데요, 너무 막무가내라…….]
안내데스크 여직원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소곤거렸다.
아침부터 기분이 다운되어 있던 터라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럼 보안요원 불러서 끌어내면, 잠깐, 지금 누구라고 했죠?”
[서울중앙지검의 백기석 검사님이요.]
백기석이라는 이름을 입속에서 굴리며, 비어 있는 김 비서의 자리를 힐끔거리는 지희의 눈빛이 기민하게 빛났다.
“올려 보내세요.”
[네?]
“백기석 검사 연락처 반드시 받아놓고, 올려 보내라고요.”
문을 밀고 들어선 기석은 거만한 눈길로 자리에 앉아 있는 지희를 쳐다봤다.
쌍꺼풀 없이 시원한 눈매에 오뚝한 콧날이 꽤 잘생긴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한쪽으로 비틀린 입술 때문인지 기석은 그다지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백수안은 엄마 쪽을 더 닮은 건가?’
은연중에 기석과 수안의 닮은 부분을 찾고 있던 지희는 또릿한 눈망울에 도톰한 입술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차도훈인 안에 있나?”
‘흠, 건방진 건 아주 쏙 빼닮았네.’
속으로 콧방귀를 뀐 지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균을 살짝 넘는 키에 제법 큰 체격인 기석이 그녀를 얕보듯 내려다봤다.
아주 잠깐 이 남자를 이용해도 괜찮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도훈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어차피 그녀에게 과정 따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를 지배하는 건 언제나 확실한 결과물이었다.
“왜 답이 없어? 차도훈이 안에, 아니, 그냥 내가 알아서 들어가지.”
예의도 없고 참을성도 없고. 흠. 뭐, 바라는 바지만.
성큼성큼 사장실로 향하는 기석을 좇던 지희가 문이 열리는 타이밍에 맞춰 얼른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렇게 막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제법 앙칼지게 소리치자, 잠시 어이없는 눈길로 바라보던 기석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밀쳤다.
지희가 과하게 휘청거리며 얕은 비명을 내질렀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흠, 얼굴 한 번 마주하기 힘 드는군.”
비꼬는 듯한 기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얼굴을 굳힌 지희가 냉큼 돌아서서 도훈을 마주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안내데스크에서 멋대로 올려 보내는 바람에. 얼른 내보내도록 하…….”
“됐어. 그만 나가 봐.”
사장실을 나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 지희의 눈에 별다른 인사말 없이 무감한 얼굴로 소파에 앉는 도훈의 모습이 진득하게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