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신경 쓰여서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커튼이 쳐져 있어 어슴푸레한 방 정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장식 하나 없이 정갈한 방 안에 침대에 홀로 누운 자신만이 옥에 티처럼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어쩐지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울컥 설움이 몰려와 이불을 움켜쥐니, 설레는 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른한 한숨 사이로 뜬금없던 설움이 사르르 밀려났다.
깊게 심호흡하며 널찍한 침대 위를 이리저리 굴렀다.
“역시 좀…….”
실망감이 깃든 웅얼거림이 입술 새를 비집고 나왔다.
엄청난 밤을 보낸 뒤에 맞이하는 아침은 무언가 좀 색다르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기대감이 은연중에 수안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혼자 맞는 이 순간이 못내 서운한 걸 보면.
그를 찾는 곳은 왜 그리도 많은지, 주말이라고 쉬는 법이 없던 도훈은 오늘도 제시간에 일어나 출근을 한 게 분명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림 없는 성실하고 능력 있는 남편이라…….
참 고마운 일이긴 한데, 지금은 좀 버림받은 기분이랄까.
폭풍 같았던 밤을 혼자 되짚는 아침은 씁쓸하고 허전했다.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른 수안이 시간부터 확인했다.
오, 이런! 11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장례식 직후 며칠을 제외하곤 이렇게 늦잠을 자본 적이 없는 수안이 당황하여 냉큼 몸을 일으키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다리도 허리도 된통 얻어맞은 것처럼 뻐근하고 욱신거렸다.
진짜 부부가 된다는 건 엄청난 체력을 요하는 일이구나 하는 실없는 깨달음에 실소를 터뜨리며 엉거주춤 침대에서 일어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지만, 뭔가를 걸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비실비실 욕실로 향하면서, 어쩌면 도훈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황홀한 밤을 보내고, 이렇게 엉망인 모습을 보이는 건 좀 아닌 것 같으니까.
머리를 감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끝낸 수안은 욕실 앞에 선 채 협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슬립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민에 휩싸였다.
자신의 방으로 가려면 뭐라도 걸쳐야 했지만, 어제 질릴 정도로 벗었다 입었다 한 속옷과 슬립은 다시 입기가 꺼려졌다.
주말이라 경원 아줌마도 안 오시고 도훈도 출근했으니, 이 큰 집에 오롯이 혼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벌거벗은 채로 집 안을 활보할 수는 없었다.
잠시 더 머뭇대던 수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도훈의 성정만큼이나 깔끔하게 나열되어 있는 셔츠들 중에 하나를 끄집어내며 수안은 작게 키득댔다.
셔츠에 얼굴을 묻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기대했던 도훈의 체취는 맡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입었던 셔츠라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셔츠에 팔을 꿰는 수안의 얼굴이 붉었다. 엄마 화장품을 훔쳐 바른 아이처럼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잠깐만 입고, 들어오기 전에 세탁해 놓으면 괜찮겠지?”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중얼거린 수안이 단추를 잠그고 소매를 두어 번 접어 올렸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민망해지는 속옷과 슬립을 챙겨 도훈의 방을 나섰다.
세탁실에 빨랫감을 내려놓고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서재 앞을 막 지나칠 때였다.
안쪽에서 나직하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도훈이었다. 도훈이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머금은 수안이 노크도 하는 둥 마는 둥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정원을 향해 난 창을 마주하고 서서 통화 중이던 도훈이 수안을 향해 반쯤 몸을 틀었다.
들이치는 햇살을 받은 얼굴이 환하다 생각했는데, 수안을 발견하곤 그의 얼굴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설레는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냉큼 들어갔던 수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걷혔다.
자신을 꺼려하는 것 같은 도훈의 반응에 한껏 부풀었던 가슴이 졸지에 쪼그라들었다.
설마, 어젯밤의 일을 후회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퍼뜩 떠오르자, 위험스레 뛰고 있던 심장이 쿵 하고 곤두박질을 쳤다.
머릿속이 마구 휘저어놓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의 시야에서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만, 팔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안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거주춤 서 있는 사이, 잠시 말을 멈췄던 도훈이 다시 통화를 이어나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최 소장님. ……아니요. 일단은 확보만 해두십시오. ……네, 이만 끊겠습니다.”
짤막한 몇 마디로 이어지던 통화가 끝나고 도훈이 수안을 향해 완전히 돌아설 때까지 그녀는 참담한 기분에 휩싸여 발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백수안, 옷이…….”
나직한 목소리에 흠칫했던 수안이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곤 어깨를 움츠리며 주춤거렸다.
“이건…… 벗고 다닐 순 없어서. 내 방에 가서 얼른 갈아입고 벗어놓을게요.”
고개를 숙인 채 궁색한 변명을 중얼거리며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던 수안이 이내 몸을 돌렸다.
다급하게 서재를 벗어나려는데, 별안간 단단한 팔이 어깨를 휘감았다.
숨 한 번 들이마시는 사이 더운 품에 폭 파묻혔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곤두박질쳤던 심장이 불쑥 솟구쳐 위험한 곡예를 시작했다.
이놈의 주책맞은 심장은 자존심도 없었다.
그의 언짢은 표정 하나에 풀이 죽었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포옹 한 번에도 얼씨구나 춤을 춘다.
이렇게 마구 휘둘리는 제 자신이 싫으면서도 한 몸인 듯 달라붙은 도훈을 밀어내지도 못했다.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약자라더니.
“어울려.”
무미건조하게 들리는 이런 말 한마디에도 가슴은 울렁거릴 정도로 뛰어댄다.
남의 심장 사정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도훈은 정수리와 관자놀이에 연이어 입맞춤을 한 뒤 가녀린 어깨 위에 머리를 툭 얹었다.
마치 커다란 개가 주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애교를 부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도훈의 행동에 수안은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 수안을 대하는 게 껄끄러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붙어 있고 싶어 몸이 단 것처럼 내뿜는 숨결마저 달짝지근했다.
“잘 잤어? 몸은? 괜찮아?”
도훈이 은근하게 물으며 셔츠 깃을 살짝 들췄다.
수안의 머리 위로 고개를 숙여 셔츠 속을 힐끔대는 도훈에게서 ‘끙’ 하는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도훈이 ‘몸은?’ 하고 묻는 순간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일들이 고스란히 떠올라 버린 수안은 그의 사정 같은 건 살필 겨를이 없었다.
“추, 출근한 줄 알았어요.”
“흠, 출근하길 바랐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아니, 그냥… 토요일에도 항상 출근했으니까…….”
“신경 쓰여서 갈 수가 있어야지.”
“뭐가요? 뭐가 신경 쓰…….”
의미가 모호하면서도 어쩐지 설레는 말에 냉큼 고개를 돌렸다가, 도훈의 얼굴을 코앞에 맞닥뜨렸다.
하던 말은 물론이거니와 숨쉬기도 여의치 않아졌다.
눈만 동그래져서 올려다보니, 도훈은 사람을 미소로 홀리려 든다.
정말 이 남자가 미소 한 움큼도 박하다는 그 차도훈이 맞을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거기다 살짝 겹쳐지는 입술은 또 어찌나 달달한지.
맹하니 눈만 깜빡이던 수안은 하릴없이 입술을 내어주고 말았다.
도훈의 손이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그녀의 머리칼 속을 헤집고 들어와 목덜미를 감싸 쥐자, 입술이 더욱 깊게 맞물렸다.
어깨를 안고 있던 손이 느릿하게 얇은 셔츠 위를 더듬어 내려갔다.
헐렁한 셔츠 안에 감춰진 말랑한 피부가 금세 뜨겁게 달아올랐다.
밤새 그녀를 지배했던 날카로운 감각들이 일시에 되살아났다.
이보다 더 중한 일은 없는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거칠어진 숨결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도록 끊임없이 계속되던 격정적인 키스가 갑작스레 들린 이질적인 소리에 멈춰 버렸다.
“어, 이건…… 내가 소리 낸 거 아니에요.”
발그레한 얼굴로 곤란한 듯 머뭇대던 수안이 뻔뻔하게 시침을 뚝 뗐다.
하지만 자신의 뱃속에서 난 ‘꼬르륵’ 소리를 제가 낸 게 아니라는 말을 곧이 들을 사람은 없었다.
놀림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라며 한숨을 삼키고 있는데, 도훈이 찡그린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만…….”
멋쩍게 사과의 말을 건넨 도훈이 수안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두 개나 더 풀려 버린 셔츠의 단추를 잠가주었다.
“우선, 뭐 좀 먹자.”
두 번이나 접었음에도 수안의 손을 거의 반쯤 가리고 있는 셔츠의 소맷자락을 야릇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도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자그마한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아침부터 사람 심란하게, 도무지 안 예쁜 데가 없네.”
“네?”
거의 입속에 담고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수안이 냉큼 물어왔지만, 도훈은 말해줄 생각이 없는 듯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저씨, 뭐라고 했어요? 나 못 들었는데.”
“갈비찜 있더라. 그거 먹자.”
갈비찜 어쩌고 하는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수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서 걷고 있는 도훈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봤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다정하게 잡힌 손의 감촉에 뭐든 아무려면 어떠랴 싶어졌다.
어색하고 민망할 것만 같았던 순간이, 평범하면서도 특별하기만 한 것들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