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 우린 부부잖아요 (57/88)

57. 우린 부부잖아요

한바탕 잔소리가 시작되겠거니 생각하고 있는데, 도훈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린 채 움켜쥐고 있는 수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말 힘들다!”

“피곤하게 해서 미안하게 됐네요.”

“너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아저씨가 그런 고민 안 해도 나는 내가 알아서 잘해요.”

“심술은.”

“아우 씨, 또 코. 어린애한테 하는 것처럼 자꾸 이러지 말란 말이에요.”

자신의 코를 살짝 잡아 비트는 도훈의 손을 쳐내며 수안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래, 그럼 어린애가 아니니 좀 묻자.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허무맹랑한 짓을 벌인 건지.”

의도를 묻는 도훈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미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수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날 괴롭힐 의도였다면…….”

“그런 거 아니에요.”

억울한 오해까지 받게 생긴 것에 울컥한 수안이 얼른 도훈의 말을 끊고 나섰다.

“나는 단지…… 우린 부부잖아요. 부부는 원래 같은 방 쓰고, 같이 자고 그러는 게 당연하잖아요. 아저씨가 내 방으로 안 오니까, 내가 아저씨 방으로 옮기려는 것뿐이에요.”

도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매끈하게 드러난 가슴이 그의 팔에 눌려 탄탄하게 조여들었다.

주섬주섬 말을 늘어놓던 수안의 시선이 자연스레 도훈의 맨가슴으로 향했다.

힘줄이 불거진 팔뚝과 군살 없는 가슴과 배를 탐욕스러운 눈길로 좇던 수안이 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 이제는 도훈의 모든 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도훈에게 매력을 느낀 건 꽤 오래전이었지만, 그것과 지금의 감정은 조금 차이가 있었다.

그때는 좀 더 여유가 있는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조급하고 애가 달았다.

그와 좀 더 긴밀해지길 갈망했고,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욕심이 났다.

손가락 움직임 하나에도 괜스레 가슴이 설레었고, 표정 변화 하나에도 바짝 긴장했다.

허락한 적도 없는데, 그녀의 모든 걸 그가 지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런 느낌이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선을 사로잡고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데도, 그와 조금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나와 같이 자기 위해 그런 차림으로 여기 숨어 있었다?”

도훈의 모습에 매료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수안은 비꼬는 듯한 그의 물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 좋아.”

“네, 나도 좋, 네?”

“정 원하면 그렇게 해.”

“무, 뭐를요?”

“같은 방 쓰고, 같이 자고 싶다며?”

“그래도 된다고요?”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 그렇게 해.”

믿기 힘든 도훈의 허락에 환히 밝아졌던 수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설마, 나랑 같이 자는 게 견뎌내야 하는 끔찍한 일이라는 거야?

내가 끔찍해? 그럼 반지는 왜 줬는데? 키스는 왜 했는데?

도훈은 충격에 빠진 수안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대신, 그런 차림은 곤란해. 잠옷 제대로 갖춰 입고, 내 귀가와 상관없이 때 되면 먼저 자.”

줄줄이 이어지는 기가 막힌 요구 조건에 수안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내가, 끔찍해요?”

“뭐?”

“아니, 그건 됐고. 내가 말한 같이 자자는 sleeping아니거든요. 이 집에 방이 몇 갠데 잘 데 없어서 여기서 잔다고 하는 줄 알아요. 같이 자기 싫으면 싫다고 확실하게 말하란 말이에요.”

“백수안.”

“왜?”

근엄하게 부르는 소리에 수안이 팩하니 쏘아붙이며 얼굴을 치켜들었다.

‘까분다.’ 소리가 열댓 번도 더 나올 상황이건만 도훈은 곤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은 채 거친 숨만 토해냈다. 그러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드레스룸으로 사라졌다.

덩그러니 침대에 남겨진 수안은 잠시 동안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붉어진 눈시울에 고였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완전하게 거부당했음을 눈물이 먼저 알고 앞서간다.

부끄러움과 참담함을 견디지 못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런 모습, 도훈에게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눈물을 훔쳐낸 수안이 침대를 빠져나왔다.

떨리는 양손으로 어깨를 부여잡고 불안정하게 두어 걸음을 떼어놓았을 때, 편안한 실내복 차림의 도훈이 드레스룸 앞에 나타났다.

당황한 수안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거렸다.

그런 수안을 바라보는 도훈의 시선이 타오를 듯 이글대고 있었다.

***

드레스룸으로 들어온 도훈은 벽에 이마를 대고 여러 번 심호흡을 했다.

그러다 도망쳐 온 것이나 다름없는 제 꼴이 우스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도도한 고양이처럼 사납게 치켜세운 눈이 어찌나 예쁘던지,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수안에게 달려들 뻔했다.

게다가 뽀얀 피부와 미려한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던 그 차림새는…… 휴우!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도 온몸에 짜릿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애써 떨쳐 내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두어 번 친 도훈이 옷을 입기 위해 돌아섰다.

집 안에서 입곤 하던 실내복을 코앞에 두고, 좀 더 그럴듯한 옷을 찾아 뒤적거리다가 자괴감에 휩싸여 또 한 번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하는 꼴이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며 셔츠를 집어 들었던 도훈이 한숨과 함께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같은 방을 쓰자는 소릴…….”

수안과 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가당치도 않은 평온함을 꾸며내 그렇게 하자 말했던 몇 분 전의 제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백수안은 차도훈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동시에 가장 차도훈이 아닌 것 같은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냉철한 판단력과 빼어난 추진력으로 대변되는 그의 명성은 수안의 일에서만큼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온전한 마음부터 얻어내자 다짐을 해놓고도, 한태경과의 일을 보고받자마자 질투에 눈이 멀어 쫓아갔으며, 수안의 자그마한 도발에도 자신을 쉽게 제어하지 못하는 얼뜨기가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건데, 마음이 먼저든 몸이 먼저든 무슨 상관이랴 하는 오만한 생각을 품었다가도, 혹시라도 자신으로 인해 수안이 상처받고 후회하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그의 정신세계를 수안이 온통 뒤흔들어놓고 있는데, 그만두게 할 방법도 몰랐다.

평생 겪어본 적 없는 대혼란 속에서 도훈은 정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앙큼한 원인제공자는…….

침실 쪽을 곁눈질하던 도훈이 습관처럼 한숨을 토해내며 수안에게 걸쳐 줄 만한 셔츠를 찾아 들었다.

수안의 몸을 감싸고도 남을 크기니 꼭꼭 여미면 위기상황을 어찌어찌 넘겨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넘겨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는데, 자신의 셔츠에 감싸여질 아담한 체구를 또 떠올리고 말았다.

다시 한번 통렬한 한숨과 함께 자신의 이마를 움켜쥐었던 도훈이 애써 떨쳐 내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드레스룸을 나왔다.

그러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몹쓸 놈의 눈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수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홀한 탐색을 시작했다.

애써 외면했던 좀 전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언뜻 봤을 때도 눈을 떼기 쉽지 않았는데, 침대를 벗어나 이불 방패막이가 없는 수안의 자태는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도훈은 저도 모르게 수안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지옥 불에 타 죽는다 해도 이제는 멈출 수가 없었다.

백수안 한정으로 정말 보잘것없어지는 도훈의 자제심이 파사삭 부서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넌, 이러지 말았어야 했어.”

한숨처럼 토해낸 도훈의 말에는 체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녀를 태워 버리기라도 할 듯 이글거리는 눈빛에 겁을 집어먹은 수안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했다.

“화내지 말아요.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어딜?”

사람을 이렇게 애달프게 만들어놓고 대체 어딜 간다고?

“네?”

하나마나한 도훈의 질문에 벙해진 수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오밤중에 이런 차림으로 갈 곳이라곤 자신의 방밖에 없음을 뻔히 알 텐데 왜 저렇게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방 쓰겠다며?”

도훈이 성큼 다가와 그녀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같이 자겠다며? 그런데 어딜 간다는 거야?”

코앞으로 다가온 도훈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수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더 이상 말도 섞기 싫다는 듯 침실을 나갔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해서 닦달하듯 물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혹시 놀리는 건가 싶어 유심히 살폈지만,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아저씨가 싫다고…….”

“싫다고 한 적 없어. 아니, 이젠 네가 싫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눈꺼풀이 저절로 바르르 떨렸다.

차오른 숨을 뱉어내느라 붉게 도드라진 입술이 예쁘게도 벌어졌다.

“어쩌면 이렇게…….”

못 알아들을 소리를 웅얼거린 도훈의 입술이 눈꺼풀 위로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내가 별로 착한 놈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뜬금없는 고해성사에 이어 이번에는 수안의 입술 위에 보드라운 것이 내려앉았다가 물러났다.

도훈이 내뿜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수안이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자, 어림없다는 듯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늦었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