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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화려한 미끼 (56/88)

56. 화려한 미끼

나미에게 당당히 태경을 떠넘길 때만 해도 의지는 차고 넘쳤었다. 아니, 강의를 마치고 나미와 함께 잠깐 쇼핑을 한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었다.

하룻밤 사이에 만렙을 찍고도 남을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꺾여 버린다고?

빨대가 꽂힌 소주 팩을 들고 앉은 수안이 경망스레 다리를 떨어댔다.

경원 아줌마가 챙겨놓은 저녁도 건너뛰고, 우선 급한 과제부터 끝낸 뒤 공들여서 샤워를 했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숨쉬기가 벅찰 정도로 떨리지는 않았다.

자꾸 손에 땀이 배어나는 정도, 딱 그 정도의 긴장감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미와 함께 구매한 한 세트의 속옷과 실용성보다는 시각적 효과에 중점을 둔 슬립을 입었을 때부터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고조되기 시작한 긴장감은 최종 확인을 위해 거울 앞에 섰을 때 정점을 찍었다.

으아악! 정말 이 모습으로 아저씨를 마주하겠다고?

소리 없는 절규가 그녀를 휩쓸었다. 이렇게까지 헐벗을 필요는 없지 않나 싶다가도, 이 정도는 돼야 화려한 미끼에 어느 정도 부합할 거라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고장 나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뛰어댔다.

원래 계획은 도훈이 들어오기 훨씬 전에 화려한 미끼가 되어 그의 침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너무 긴장하고 흥분한 탓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혹시나 몰라서 준비했던 팩 소주에 빨대를 꽂았다.

가능하면 술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지만,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은 긴장감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

빈속에 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감각이 금세 둔해졌다. 긴장감은 여전했지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대지는 않았다.

수안은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팩이 홀쭉해지도록 빨아 마시고,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10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도훈이 언제 들어올는지 몰라도 어정쩡하게 마주칠 생각이 아니라면 이제 그만 침대로 가야 했다.

팩을 쓰레기통에 버린 수안이 살짝 비틀대며 침대로 걸어갔다.

이불을 걷으려다 멈칫하긴 했지만, 이내 곧 입매를 굳히곤 얼른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잠시 숨을 멈췄다가 얕게 뱉어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끄집어 올렸다.

묵직하면서도 시원한 도훈의 향이 이불에 배어 있었다.

조금 무뎌졌다 생각했던 심장이 다시 세찬 뜀박질을 시작했다.

도훈의 체취가 배인 이불을 덮고 있으니, 마치 그에게 안겨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세차게 두근거리는 가슴이 겁이 나서 그러는 건지, 설레서 그러는 건지 도통 분간이 안 됐다.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게 간질거리는 느낌에 키득거리며 발을 동동거리는데, 어렴풋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도훈이 돌아왔다.

순간, 수안은 이불 속에서 뻣뻣하게 굳어졌다.

잠시 후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지친 듯한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수안은 숨마저 멈춘 채 이불 밖 소리에 집중했다.

부스럭대는 소리, 서랍 여닫는 소리, 그리고 얕은 한숨 소리.

특별할 것 없는 소리에서 도훈의 피로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갑자기 안쓰러움과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안 그래도 피곤한 그를 더욱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샤워를 하는 건지 물 흐르는 소리가 막 시작되었을 때, 수안은 이제라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에 휩싸였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존심도 버리고 망설이지도 말고 확 낚아채라던 경원 아줌마의 말을 되새기며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이불을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1분 1초가 지날 때마다 어찌나 긴장감이 고조되는지, 속이 다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분명 화를 내겠지.

끌어내기라도 하면 어쩌지.

이제 나 같은 건 보기도 싫다고 하면 그땐 어쩌지.

정말 나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할 뿐 이성으로서의 끌림은 눈곱만큼도 없는 거라면, 이러고 있는 내가 소름 끼치도록 싫을 텐데.

그러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는 지금의 관계마저 어그러지고 말 거야.

아니, 그럴 리 없어. 끌리지도 않는데 끌어안고 키스하고 그러진 않을 거 아니야.

수십 번은 더 반복했던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초조함에 여러 번 짓씹은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났다.

이불 속에 숨어서 고민의 늪에 빠져 있는 사이 물소리가 끊겼지만 수안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이어졌지만, 그조차도 알아채지 못한 채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너무도 갑작스럽게 이불이 확 재껴졌다.

헐벗은 수안과 그보다 더 많이 헐벗은 도훈의 눈이 딱 마주쳤다.

너무 놀란 수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런데 소리부터 냉큼 지를 줄 알았던 도훈도 입을 벌린 채 황망한 눈길로 수안을 바라보다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도훈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낮게 잠겨서 거의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차마 못 볼 게 거기 있는 것처럼 침대 쪽을 한사코 외면한 채, 젖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그의 머리칼에서 어깨 위로 떨어진 물방울이 가파른 가슴을 타고 흘렀다.

무심코 그 흐름을 좇고 있던 수안의 눈에 붉어진 귓불과 목덜미가 선명하게 들어와 박혔다.

놀라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있던 수안의 몸이 그제야 서서히 풀렸다.

도훈이 엄청나게 화가 나서 그녀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당황한 거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사라졌던 용기가 아주 눈곱만큼 샘솟았다.

가느다란 슬립 끈 외에는 아무것도 걸쳐진 게 없는 어깨를 쭉 펴고 상체를 일으켰다.

“당장 네 방으로 가.”

상당히 위압적인 말이 들려왔지만, 수안은 겁도 없이 허리춤에 올려져 있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제야 도훈이 그녀를 돌아봤다.

하지만 시선은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멀리로 흘러버렸다.

미간엔 짙게 주름이 지고 입매는 매섭게 굳어 있었지만, 방금 샤워를 마쳐서 물기를 한껏 머금은 그는 정말 미치도록 매혹적이었다.

그를 올려다보던 수안이 목이 타는 듯 침을 꼴깍 삼켰다.

“너 이러는 거…….”

“장난도 아니고 호기심도 아니에요.”

그런 말로는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일단 선부터 그었다.

“백수안, 후회할 짓 하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을 텐데. 대체 그 꼴은 뭐야?”

“제대로 보지도 않아놓고는. 내 꼴이 뭐 어때서요?”

나 좀 제대로 보란 듯이, 떼를 쓰는 아이처럼 그의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마지못해 시선을 돌린 도훈의 미간이 좀 전보다 더 일그러졌다.

정말 끔찍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라 금세 주눅이 든 수안은 자신의 몸을 쓱 한 번 내려다봤다.

너무 깊게 훅 파인 슬립은 뽀얀 가슴골을 여과 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어색하고 부끄럽긴 했지만, 그리 못 봐줄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역시 별로인가?

“나름 최선을 다해 화려하게 꾸며봤는데, 영 아니에요?”

“뭐? 화려하게?”

“화려한 미끼가 콘셉트거든요. 아저씨가 덥석 물고 싶어질 만큼 화려한 미끼.”

도훈이 거친 한숨을 토해냈다.

수안에게 여전히 한 손을 잡힌 채, 빼낼 생각도 못 하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너 진짜, 어쩌려고 이래?”

도훈은 정말 괴로워서 참기 힘든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하찮게 샘솟았던 수안의 용기가 급속히 줄어드는 순간이었다.

도훈을 잡았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어설프게 세운 자신의 계획이 도훈을 유혹하기는커녕 도리어 괴롭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밀려드는 참담함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훤히 드러난 어깨며 노골적으로 두드러진 가슴 윤곽이 새삼 부끄러웠다.

수안은 이불을 슬그머니 끌어 올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재차 씹힌 입술에서 아릿함이 느껴졌지만, 수안은 입술을 질근거리는 걸 그만둘 생각도 못 했다.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아내려는 수안으로선 그 통증이 차라리 고맙기까지 했다.

하지만 도훈에게는 아니었던가 보다.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혀 차는 소리가 들린 뒤, 이내 턱이 잡히고 그녀의 앞니에 물렸던 입술이 강제로 놓여났다.

“그만해. 피나잖아.”

도훈의 손가락이 터진 입술 근처에서 머뭇거리다가,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그 언저리만 두어 번 쓸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인상은 어찌나 험악한지, 터진 게 그녀의 입술이 아니라 그의 것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도훈으로선 수안이 이런 꼴로 침대에 앉아 입술에 피나 내고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게 분명했다.

도훈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괜한 울분이 솟구쳤다.

수안은 고개를 비틀며 그의 손을 툭 쳐냈다.

“내 입술이 불어터지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에요.”

다친 자존심에 부끄러움까지 더해져 뱉어내는 말에는 잔뜩 날이 섰다.

도훈의 입장에선 적반하장이나 다름없을 테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덕지덕지 심술을 묻히고 뾰로통해 있는 수안의 머리 위로 짙은 한숨 소리가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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