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둘 다 바보다
“그러니까 그게, 결혼반지라고?”
“어? 어.”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적잖이 놀란 수안이 조금 벙한 얼굴로 나미를 쳐다봤다.
비난 한두 마디쯤은 각오한 채 바짝 긴장하고 있다가 한순간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좀 자세히 봐도 돼? 이거 막 억 소리 나게 비싸고 그런 거 아니야?”
“글쎄, 나는 잘…….”
수안이 쭈뼛거리며 왼손을 내밀자, 나미는 보석감정사라도 된 것처럼 손을 덥석 끌어당겨 자세히 살폈다.
“이거 봐, 이거 봐. 이거 뭐 그런 거야? 진정한 부자는 내 통장 잔고가 얼만지 모른다는 그거? 이런 반지가 얼마쯤이나 하는지 별 관심 없다, 이거 아니야.”
“아, 아니야, 그런 거. 계속 끼고 다니라고 일부러 심플한 거로 골랐다니까 아마 그렇게 비싼 건 아닐 거야. 그보다 너, 괜찮아?”
“응? 뭐가?”
나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건성건성 말을 했다.
“내가 여태껏 말 않고 숨긴 게 아무렇지도 않느냐고.”
그제야 나미의 시선이 수안에게로 향했다.
빤히 바라보는 눈길에 숨이 막혀올 즈음 나미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지.”
“역시, 그렇지?”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지는 수안을 보고 있던 나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누구든 숨기고 싶은 건 있으니까. 후우, 나만 해도 아빠가 바람피우다 들켜서 엄마랑 냉전 중이라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고 싶지 않거든.”
뜻밖의 얘기에 당황한 수안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작년 겨울부터 그 상태라 이젠 좀 짜증스러울 뿐이니까.”
“작년 겨울? 졸업식 때는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 보였는데?”
“그러니까 짜증 난다는 거야. 아빠는 거짓말만 하고, 엄마는 의심만 하고. 매일이 살얼음판인데 이혼은 안 한대. 더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내 핑계 대는 거.”
나미가 치가 떨린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한쪽 입꼬리를 끄집어 올렸다.
“두 사람 이혼이 나한테 흠이 될까 봐 못 한대. 흥, 정말 웃겨. 엄마는 경제력이 없어서 두려운 거고, 아빠는 지금의 안정적인 생활을 잃고 싶지 않은 거면서 왜 나를 끌어들이냐고.”
“아직 애정이 남아서 그러시는 거 아닐까?”
“흥, 애정? 애증이겠지. 세탁하기 전에 아빠 옷 냄새 맡는 엄마 보면 진짜 토할 것 같아. 베란다에 숨어서 엄마 몰래 통화하는 아빠 보면 소름 끼쳐 미치겠어. 두 사람 다 정말 이해가 안 가.”
수안이 안쓰러운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나미의 손을 감쌌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제 딴엔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다는 게 고작 그거였다.
자신의 통통한 손을 덮은 수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미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던 나미는 붉어진 눈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다음 주부터 코끼리에서 알바 해.”
“코끼리? 정문 맞은편에 있는 그 카페?”
“응.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학기엔 기숙사 신청하려고. 아무리 따져 봐도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독립하기는 힘들고, 차근차근 준비하려고.”
앞으로의 일을 구체적으로 늘어놓는 나미는 분명 나미이면서 동시에 나미가 아닌 것 같았다.
밝고 활기찬 데다가 쉽게 흥분해서 조금은 가벼워 보였던 그 유나미가 아니었다.
벌써 알바까지 구한 걸 보면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는 소린데 어쩜 이렇게 하나도 몰랐을까.
이쯤 되고 보니 우리가 정말 친구였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려고 했다.
“우리 진짜 여태 뭘 한 거니?”
“각자 자기 굴만 열심히 판 거지 뭐.”
수안이 한탄하듯 뱉어낸 말의 뜻을 용케 알아들은 나미가 시니컬하게 답하며 피식 웃어 보였다.
“아우! 말만 해도 이렇게 속이 시원한걸.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할걸 그랬어. 안 그러냐? 백수안.”
“그러게. 우리 둘 다 바보다.”
다 털어놓고 나니 왜 그렇게 감추기 위해 아등바등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함께했던 3년 남짓한 시간보다 지금의 30분이 더 각별하게 와 닿았다.
“이제 네가 내 대나무 숲이야.”
목이 타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켠 나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한마디로 지뢰밭 밟은 거지. 나한테 발목 잡혔다고. 대신에 나도 네 대나무 숲 해줄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
“너야말로. 부모님 얘기 말고도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잖아.”
“내가? 그런 거 없…….”
“한태경.”
헛짓한 건 3년으로도 충분했다. 아예 시작을 안 했으면 모를까, 이제 겨우 턱 하나를 넘었는데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감추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드러내는 순간 서로에게 더 상처가 된다고 할지라도.
“정말 할 말 없어?”
“언제, 알았어?”
부모님 얘기를 할 때는 그렇게 시니컬하더니, 짧은 질문 하나에도 나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개강파티 때 어렴풋이.”
“참 빨리도 눈치챈다.”
나미가 입을 삐죽거리며 타박부터 했다.
“내가 그런 데에 좀 둔하잖아.”
따지고 보면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수안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변명을 늘어놨다.
“그래, 너 둔한 건 알아줘야겠더라. 한태경이 죽어라 해바라기하는데 어쩜 그렇게 몰라. 나는 얘가 진짜 여우 중의 상 여우라 알면서도 시침 뚝 떼는 거 아닌가 의심까지 했다.”
“태경이가 나, 좋아하는 것도 알아?”
“그렇게 철철 흘리고 다니는데 그럼 몰라? 3학년 때 우리 반 애들 거의 다 알았다.”
“나는 정말 몰랐어. 어제 진짜 너무 당황해서…….”
“한태경 어제 실연당한 거야?”
“내 얘기 다 들었으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안 그래도 태경만 생각하면 답답해 미치겠는데, 실연이라느니 하는 말 같은 건 정말 듣고 싶지 않았다.
조금은 싸늘하게 들리는 수안의 말에 나미는 시무룩해졌다.
“하긴, 네 생일이 지난 다음엔 상황이 달라질 테니까 아직은 유예 정도로 봐야 하나?”
“허! 너희들, 은근 천생연분인 거 아니?”
“뭐? 누가? 나랑 태경이?”
“그래. 어쩜 그렇게 생각하는 게……. 그리고 넌 태경이 좋아한다면서 나랑 잘됐으면 좋겠니?”
수안이 따지듯 물어놓고는 흠칫 놀랐다.
긴 시간을 친구로 보냈지만, 이렇게 눈을 흘기고 불만스레 말을 하는 건 전에 없던 일이었다.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했다. 말다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며, 간식 메뉴 정할 때조차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친구 간에 그런 배려와 존중이 당연해서가 아니라, 항상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단지 서로 밝히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공유했을 뿐인데 무언가 아주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미와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누가 그렇대.”
나미가 날을 세우며 톡 쏘아붙였다.
그런 나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수안이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 뭐야? 왜 웃어?”
“나미야, 우리 진짜 친구 같다.”
감격으로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수안의 말에 잠시 멍해 있던 나미가 곧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듯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미친. 언제는 친구 아니었나.”
불퉁대는 나미의 말이 어찌나 듣기 좋은지, 잠시 더 키득대던 수안은 따가운 눈총을 받고나서야 웃음을 멈췄다.
“흠흠, 결론을 말하자면, 내 생일이 지나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아니, 없게 만들 거야.”
“사장님이랑 이혼 안 한다고? 왜?”
“목소리 좀 낮춰.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주변을 한 번 휘둘러본 나미가 수안을 따라 테이블 위로 상체를 낮췄다.
“사장님이 그러재?”
“그건 아니고.”
“그럼?”
나미의 물음에 수안은 답도 못 하고 얼굴만 붉혔다.
“너 뭐야, 혹시 사장님을…….”
수안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헤맸다.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지기 힘들겠다 싶을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와아, 맙소사!”
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안의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사장님도?”
잠시 멈칫했던 수안이 얕은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만들 거야.”
“백수안 용기는 가상하다만, 그게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그랬으면 내가 미쳤다고 1년 넘게 짝사랑만 하고 있었겠어.”
“유나미, 그렇게 뭐든 쉽게 포기했으면, 난 아직까지 아버지한테 맞으면서 살고 있었을 거야. 뭐든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잖아.”
자존심도 버리고 망설이지도 말고 확 낚아채라던 경원 아줌마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덥석 물고 싶어지도록 엄청나게 화려한 미끼를 준비할 거야.”
결연하게 다짐하는 수안을 보며, 나미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나미의 손을 잡은 수안이 눈에 힘을 팍 줬다.
“그러니까 유나미, 한태경은 네가 책임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