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천생연분 낚아채기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의기소침해져 국이고 밥이고 더 이상 한술도 넘길 수가 없었다.
그저 북엇국만 휘휘 젓고 있자니, 보기가 영 안쓰러웠는지 경원 아줌마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수안아, 내가 우리 바깥양반이랑 어떻게 결혼했는지 말해줬던가?”
“중매결혼 하셨다면서요.”
“그렇지. 중매는 중맨데, 그게 다가 아니란 말이지.”
“아, 네에.”
수안은 뜨뜻미지근하게 추임새를 넣고는 의미 없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아예 내려놔 버렸다.
경원 아줌마가 애정해 마지않는 부군에 대한 얘기는 관심도 없었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미 신난 얼굴인 아줌마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그 양반한테 내가 첫눈에 반했잖아. 호호, 지금 생각하면 눈에 완전히 콩깍지가 씌었지. 몸에 맞지도 않는 양복에,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앞머리가 푹 젖어서는 볼 것도 하나 없었는데 말이야.”
나 선보러 나왔소, 광고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에 다가가면서도 그냥 돌아가야 하나 몇 번을 망설였던 기억이 선했다.
“근데, 최민국 씨하고 부르니까 큰 소리로 대답하면서 벌떡 일어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일어나면서 의자도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난리도 아니었는데, 창피한 줄도 몰랐다니까. 후후.”
“그래서요?”
듣다 보니 또 나름 재미가 있어서 수안은 저도 모르게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자려고 누웠는데 자꾸 생각나는 거야. 그러니 어떡해. 다음 날 바로 만나서 그랬지. 최민국 씨 난 그쪽이 마음에 드는데, 우리 속궁합 한번 맞춰볼까요?”
“에이, 그게 뭐야. 거짓말이죠? 35년 전이면 여자가 먼저 고백하는 일도 드물었을 텐데 그런 말을 막 대놓고 했다고요?”
“놓치고 싶지 않은데 그럼 어째. 최민국 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숙맥이라 땀만 삐질삐질 흘려대는데 나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호호호, 그 말 하기 무섭게 내 손부터 덥석 잡더라.”
“허얼!”
“그 양반도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던 거지. 호호호.”
“허! 완전 천생연분이네요.”
“그러니까. 그때 내가 안 나섰어봐. 최민국 씨 변변찮은 주변머리에 천생연분이고 뭐고 다 놓쳐 버렸을걸.”
그때의 기억 속을 헤매고 있기라도 한 듯 경원 아줌마의 얼굴엔 두근거리는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예순을 코앞에 둔 나이임에도 아줌마는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처럼 얼굴에서 빛이 났다.
“인연이다 싶으면 확 낚아채야 돼. 자존심도 버리고 망설이지도 말고.”
“상대방 입장이나 마음은 생각도 않고요?”
“허이고, 여기 숙맥이 또 하나 있었네. 일단 제대로 낚아채 봐야 이놈이 낚일 놈인지 아닌지 알 거 아니야. 혹시 알아. 덥석 물 준비하고 미끼 던지기만 기다리고 있을지.”
수안이 그럴 리 없다고 고개부터 저으려는데, 경원 아줌마의 휴대폰이 신명난 트로트 한 가락을 요란스레 뽑아내기 시작했다.
얼른 휴대폰을 집어 든 아줌마가 배시시 웃으며 머리부터 매만졌다.
영상통화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활짝 피어나는 아줌마의 얼굴을 보니 누구의 전환지 모를 수가 없었다.
눈 뜨고는 못 볼 광경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수안은 그릇을 정리해 일어났다.
싱크대로 향하는 수안의 뒤통수로 경원 아줌마의 불퉁한 목소리가 쫓아온다.
“등산 간다더니 왜 또 전화야?”
수안이 못 말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좋아 죽겠으면서 꼭 저렇게 안 그런 척 툴툴댄다. 아줌마는 최민국 한정으로 완전 여우였다.
[허허, 진달래가 너무 예쁘게 피었어. 보여주고 싶어서 전화했지.]
“그래?”
[물론 당신보다야 안 예쁘지만, 그래도 볼만해서…….]
“흠흠, 그럼 한번 비춰보든가.”
아줌마의 도도한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최민국의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휴대폰을 뚫고 나와 주방을 가득 물들였다.
수안은 흐뭇함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주방을 벗어났다.
문득, 도훈과 자신에게도 저런 날이 올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영상통화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전화라도 가끔 해주면 좀 좋을까.
바쁘기로는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아주 가끔은 좋은 거 예쁜 거 보고 자신을 떠올려 줬으면.
그러다 아주아주 가끔 전화라도 해준다면 정말 까무러치게 좋을 텐데.
그런 상상을 하며 히죽거리고 있는데, 주머니 속 휴대폰이 잘게 진동을 했다.
은근한 기대감에 젖어 재빨리 휴대폰을 꺼냈다.
***
왼쪽으로 테이블 하나를 떨어뜨려놓고 자리를 잡는 현진을 바라보다가 카페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나미가 보였다.
이쪽을 쳐다본 나미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어색함이 감돌았던 좀 전의 통화를 떠올렸다.
나미와 친구가 된 이후로 만나자는 약속을 그렇게 조심스럽게 해보긴 처음이었다.
나미한테 할 얘기도 있었고 들어야 할 말도 있었지만, 막상 잠시 후면 마주하게 될 그녀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일찍 왔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전에 왔어.”
“저기 앉아 있으니까 인사를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렇고 애매하다.”
“어? 아아.”
무슨 소리인지 몰라 되물었다가 나미의 시선이 현진에게로 향해 있는 것을 보고 이내 납득한 수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뭐 마실 거야? 내가…….”
“아니야. 내가 갔다 올게.”
수안의 말을 끊고 일어난 나미가 성큼성큼 걸어가 음료를 주문하고 호출벨을 받아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수안은 어찌나 마음이 초조했던지, 나미가 다시 돌아왔을 때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왜 그렇게 바짝 얼었어? 나한테 무슨 죄지은 거 있니?”
“죄는…… 어, 맞아. 너한테 죄지었어.”
조금 머뭇거리다가 토해내듯 말을 쏟아낸 수안이 테이블 아래서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나미는 살짝 눈살만 찌푸렸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좋은 일엔 두 배로 감격하고, 나쁜 일엔 격하게 흥분하거나 슬퍼하던 나미로선 의외로운 반응이었다.
그래서 수안도 덩달아 차분해졌다.
시작이 어려웠을 뿐, 그동안의 사정 얘기를 하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순전히 나미의 몫이니 말을 끝낸 수안은 숨을 죽인 채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열세 살 이후로 수안이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태경과 나미가 유일했다.
그러니까 태경과 나미는 수안의 유일한 숨 쉴 구멍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석이 주은을 폭행하는 장면을 처음 목격했던 그때부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수안의 마음속엔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졌다.
엄하고 냉정하긴 했지만 검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진 아빠와, 자주 아프긴 했지만 항상 다정한 엄마를 가진 평범한 삶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인생이 지각변동을 일으켰는데 멀쩡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엄하고 냉정한 게 아니라 잔혹한 사람이었고, 엄마는 몸이 약했던 게 아니라 허구한 날 폭력에 시달린 것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게 거짓이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정신적인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에게 절대로 떼어내지 못할 끔찍한 오물이 붙은 것만 같았다. 아니, 자신이 그 오물 자체인 것만 같았다.
누군가 자신의 이런 어두운 면을 알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친분을 쌓고 마음을 나누다가, 혹시라도 실망하고 떠나가면, 그 상실감과 상처를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 그녀 스스로 몸을 사리고 의식적으로 주변과의 관계를 차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신이 만든 벽에 스스로를 가두었음에도 정말 한 번씩은 미치도록 외로웠다.
이렇게 남들과 담을 쌓고 살다가, 자신도 나중에 아버지 같은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도 자신의 영역 안에 들여놓지 않으면서, 매순간 그런 자신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다.
그래서 항상 관심이 없는 척 물러나 있으면서도, 곤란한 상황에 처한 애들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주고 그만큼 거리를 두는 일이 거의 습관처럼 굳어졌다.
수안은 그렇게 이중적인 행동으로 끊임없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아무도 듣지 못하고 알아주지도 않는 처절한 아우성.
그 아우성에 유일하게 답을 해준 사람이 나미였다.
정말 별것 아닌 사소한 도움이었다.
생리혈이 밖으로 새서 곤란해하고 있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옷을 빌려준 게 다였다.
그보다 더 큰 도움을 받은 애들도 수안이 냉랭하게 선을 그으면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타고난 성격이 그랬던 건지, 아니면 수안이 호승심 같은 걸 불러일으켰던 건지는 모르지만, 나미는 매번 밀려나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다가왔다.
한동안 나미와 가까워지는 게 두려우면서도, 멀어질까 봐 더 두려운 이중적인 기분에 휩싸여 고뇌했다.
그러곤 결국에 자신의 영역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그녀를 인정해야만 했다.
친구보다는 은인으로 받아들여진 태경과는 달리, 나미는 아주 눈곱만큼 경계를 허물고 받아들인 유일한 친구였다.
정말 눈곱만큼만.
말로만 유일한 친구들이라고 떠들어댔지, 자신에 대한 건 아무것도 내보이지 못했다.
“기분 나쁠 거라는 거 아는데, 솔직히 그런 아버지가 있다는 거, 정말 밝히고 싶지 않았어. 내가 그런 사람의 딸이라는 게 너무나 끔찍해서…….”
수안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