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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뭘 모르는 건 너야 (53/88)

53. 뭘 모르는 건 너야

잠깐 사이 훌쩍 벌어진 거리에서 그가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그녀의 팔을 이불 안으로 집어넣었다.

“자꾸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안 참아도 되는데요.”

“안 참으면.”

폭발하듯 터져 나온 목소리에 수안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걸 본 도훈이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안 참으면 어쩔 건데? 내가 뭘 할 줄 알고? 넌 대체 내가 얼마나 더 치졸해지길 바라는 거야?”

“아, 아저씨…….”

“네 장난에 놀아나는 건 여기까지야.”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를 낸 도훈이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다.

당황한 수안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장난, 이라고요?”

“아니면 호기심이든가.”

나직하게 읊조린 도훈이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

잘게 떨리는 수안의 목소리에 서서히 느려지던 도훈의 걸음이 문 앞에 거의 다다라 우뚝 멈춰 버렸다.

“뭘 모르는 건 너야. 괜히 후회할 일 만들지 않는 게 좋아.”

도훈은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침대에 오도카니 앉은 수안은 서운함과 답답함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미 깨달아 버린 마음은 이때다 싶은지 자꾸 크기를 키워가는데, 도훈과의 관계는 다시 뒷걸음질해 버린 것 같았다.

마음만 차고 넘치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쳇, 나만 모르나. 자기도 뭘 모르는 건 마찬가지면서.”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였다. 눈물까지 흘리면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아서 입술을 꽉 물어 삼킨 뒤 이불을 뒤집어썼다.

씻고 과제도 해야 하는데,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았다.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그렇게 10분만 있다가 일어나야지 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부랴부랴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주방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혹시 도훈이 아닐까 두근대며 다가가다가, 경원 아줌마가 흥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줌마 오셨어요?”

“온 지가 언젠데. 강의 없어? 왜 이렇게 늦장을 부려.”

“오후에 있어요. 점심때쯤 나가려고요.”

수안은 시무룩하니 식탁 의자에 앉았다.

곧 그녀의 앞으로 반찬 몇 가지와 밥이 놓여졌다.

마지막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북엇국을 내려놓은 경원 아줌마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수안의 앞에 자리했다.

“차 사장이 챙겨주라더라. 아주 대단한 술꾼 나셨어. 태성그룹 사장이 출근하기 전에 무를 썰게 만드는 술꾼이니 얼마나 대단해.”

도훈이 아침부터 무를 썰고 있었다는 말에 눈이 동그래졌던 수안이 뾰로통하니 입을 삐죽거렸다.

“아저씨가 오버한 거예요. 그렇게 많이 안 마셨어요.”

“좋아할 줄 알았더니 표정이 왜 그래? 혹시 싸웠니?”

“아니요, 싸움이 돼야 싸우죠.”

“그럼 술 먹었다고 잔소리 좀 들었나 보구먼. 그렇다고 그렇게 불퉁해 있어? 다 차 사장이 너 생각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누가 뭐래요.”

또다시 입을 삐죽거린 수안이 국물을 한술 떠서 삼켰다.

청양고추를 넣었는지 국물은 구수하면서도 매콤했다.

숙취는 전혀 없었지만, 경원 아줌마의 북엇국은 언제나 맛있었다.

“크! 역시. 아줌마 음식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수안이 호들갑스레 엄지를 치켜세워 흔들었다.

칭찬 싫어하는 사람 없다고, 수안의 앞으로 두부조림을 밀어주는 경원 아줌마의 입술이 웃음을 참는 듯 실룩댔다.

“우리 최 사장님은 아무래도 아줌마 요리 솜씨에 반해서 지금까지도 애정이 철철 넘치시는 거겠죠?”

스물세 살 어린 나이에 남편인 최민국 씨를 중매로 만나 결혼한 경원 아줌마는 30년이 넘도록 해로하고 있었다.

따지고 들자면, 그런 부부가 한둘도 아닐 텐데 별스러울 게 있을까 싶지만, 경원 아줌마 부부의 애정은 조금 각별한 데가 있었다.

우선, 중매로 만나 3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는 점이 그랬고, 안타깝게도 경원 아줌마가 불임이었다는 점이 그랬다.

더구나 최민국은 5대 독자였단다.

우울해하는 주은을 구슬려 차를 마시면서 늘어놓곤 했던 경원 아줌마의 시집살이는 막장드라마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다.

이혼을 강요받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으며, 첩을 들이라는 요구도 모자라서 아들 내외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시어머니가 잠자리까지 침범해 들어왔다고 했다.

그때마다 남편이 감싸주고 매달리지 않았으면 벌써 헤어지고도 남았을 거란다.

“아유, 나 아니면 죽겠다는데 어떡해.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견뎌야지.”

푸념처럼 쏟아내던 경원 아줌마의 말엔 은근한 뿌듯함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절절한 사랑을 쏟아주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주은을 안타까워하며 혀를 차곤 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만, 다행히 고혈압이 있었던 아줌마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괴롭히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아줌마가 결혼한 지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1년만 더 늦게 돌아가셨으면 내가 먼저 죽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그 양반 버리고 도망갔거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민국 씨를 만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줌마, 나도 요리 배울까?”

“아이고, 아서라. 주은이 닮아서 완전 똥손이면서 요리는 무슨.”

“제대로 배우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왜 시도도 안 해보고 희망을 싹둑 잘라내요?”

수안이 두부조림을 신경질적으로 잘라내며 툴툴거렸다.

“사람한테는 각자의 역할이 있는 거야. 우리 수안이야 예쁘지, 똑똑하지, 노래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지, 거기다 마음씨까지 고운데 뭘 더 바라. 더 이상 바라면 욕심이 지나친 거야.”

경원 아줌마의 말에 수안은 한정 없이 시무룩해졌다.

그런 수안을 유심히 살피던 경원 아줌마가 쿡쿡거리다가 결국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호호호, 아직 앤 줄 알았더니, 언제 이렇게 여자가 됐을까?”

“뭐예요, 아줌마. 놀리지 마요.”

새침하게 눈을 흘기는데도 경원 아줌마의 웃음소린 한동안 잦아들 줄을 몰랐다.

아줌마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찔끔찔끔 닦아낸 뒤에야 웃음을 멈췄다.

“우리 새색시, 남편한테 사랑받고 싶으셨쎄요?”

법무팀의 이재식 팀장을 제외하면, 도훈과 수안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경원 아줌마였다.

그러니 어깨까지 들썩이며 건넨 이 말엔 수안을 놀리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건 없었다.

“아줌마! 최 사장님은 아줌마가 이렇게 못된 구석이 있는 거 아세요?”

“그러엄. 자그마치 35년을 살 부대끼며 살았는데 그걸 몰라. 내가 가끔 못됐게 굴면 그 양반 아주 귀여워 죽겠다고 난리라니까.”

“아, 진짜 뭐래. 으. 닭살!”

“닭살이면 어때. 서로 좋으면 그만이지.”

경원 아줌마가 뻐기듯 하는 말에 수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그제야 너무 심했나 싶었던지 헛기침 한 번에 표정을 갈무리한 아줌마가 괜스레 반찬 그릇을 이리저리 옮겼다.

“마저 먹어. 안 그래도 너 요즘 마른 것 같다고 차 사장이 걱정하더라.”

그 한마디에 마음이 또 사르르 녹아 머쓱해진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입술 끝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위로 치솟았다.

“차 사장이 좋아?”

경원 아줌마의 은근한 물음에 젓가락을 든 채 굳어졌던 수안이 입가를 늘리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좋을 때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나 혼자만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 그거 아주, 놀랍구나!”

경원 아줌마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엄마는 날 보호해 줄 사람으로 왜 아저씨를 선택한 걸까요?”

“글쎄다. 도통 말을 안 했으니 그 속을 어찌 알겠어.”

웃음 많고 말 많고 사랑스러운 변덕쟁이였던 부잣집 외동딸 주은은 결혼 생활 16년 만에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자식이 없다 보니 주은이 결혼하기 전까지 정을 듬뿍 쏟았던 경원 아줌마는 우울증을 앓는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지만,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웃음소리는커녕 목소리도 듣기 힘든 날이 대부분이었으며, 수안은 간혹 주은이 해 질 녘 창가에 앉아 눈물짓고 있는 걸 보기도 했다.

마음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보다 훨씬 더디게 나았다.

어설픈 미소일망정 가뭄에 콩 나듯 보여주기 시작한 것도 기석에게서 벗어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던 때였다.

주은은 시들어서 떨어지기 직전의 꽃 같았다.

사고가 있기 전까지 주은은 묻는 말에만 간신히 답을 했었다.

그러니 무슨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가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바깥출입도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던 주은이 도훈에게 먼저 연락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기석에 대한 공포와 수안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을 보냈던 것은 아닐까, 그저 짐작만 했다.

“그래도 다행이지 뭐야.”

“뭐가요?”

“이번 선택은 틀리지 않았잖니.”

“나한테만 그렇죠. 아저씨는 아마 아닐걸요.”

“글쎄, 그럴까?”

경원 아줌마의 의미심장한 말이 수안에겐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수안을 보호하려던 주은의 목적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도훈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선택이라는 건 분명했다.

어제 도훈이 냉정하게 그녀를 떨쳐 내고 방을 나가 버렸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주은과 이 회장에 대한 의리로 수안을 보호하고는 있지만, 그 이상은 내키지 않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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