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도발하지 마
무엇이 담겨 있는 건지 모르겠는 그의 표정에서 답답함을 느낀 수안이 저도 모르게 술잔을 들어 홀짝홀짝 기울였다.
“그만 일어나자. 그러다 너 취하겠다.”
갑자기? 아까 하려다 만 말은?
“아니에요, 안 취했어요. 그렇게 많이 안 마셨어요. 그런데 무슨 말 하려고…….”
손으로 무릎을 한차례 탁 친 도훈이 불쑥 솟구쳐 일어났다.
수안이 동그래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어서 안 일어나고 뭐 하냐는 듯 유려한 눈썹이 살짝 치솟았다가 내려앉았다.
“하려던 말 있었잖아요. 그렇게 말하다 말면 무지 궁금하단 말이에요.”
미적거리며 일어나는 수안의 입술이 뾰족 튀어나와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입가로 그의 손이 쑥 뻗어왔다. 부드러운 입술 위로 그의 손가락이 닿았다.
당황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도훈이 더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뜨겁게 닿아 있던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톡 치고 미끄러지더니 입가와 볼을 부드럽게 쓸고 멀어졌다.
마치 그대로 닿아 있고 싶은 걸 참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마 그녀만의 착각일 터였다.
그녀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어놓고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칼같이 돌아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불쑥 돋아난 심술에 따라가지 말아버릴까 망설이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몇 발자국 앞서간 도훈이 그녀를 돌아봤다.
빨리 따라오란 고갯짓에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면서 수안은 가슴께에 손을 꾹 누르며 길게 숨을 토해냈다.
계산을 끝낸 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음식점을 나오자, 왼쪽에 위치한 주차장에서 차 한 대가 시동을 걸더니 곧 그들 앞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차가 바로 앞에서 멈춰 서자, 뒷좌석 문을 연 도훈이 수안이 타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옆자리로 올라탔다.
“댁으로 가십니까?”
운전석에 앉아 있던 현진이 도훈에게 물었다. 도훈의 짧은 대답에 차는 곧 출발했다.
도훈은 피곤한 듯 좌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곱창집에서 그가 하려고 했던 말이 뭔지 묻고 싶었지만, 현진이 듣고 있는 데서는 아무래도 조금 곤란할 듯했다.
‘대체 내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 관계를 어쩌겠다는 거야? 사람 안달 나게 왜 말을 하려다가 마느냐고.’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되뇌며 좌석에 머리를 묻고 가파른 선을 그리는 도훈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짙고 긴 속눈썹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눈 아래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속눈썹 개수를 셀 수도 있는 거리. 묵직하면서도 시원한 그의 향기가 날아온다.
이제야 술기운이 몰려오는 건지,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하루여서인지, 그도 아니면 도훈의 향기 때문인지 자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몇 번을 힘겹게 깜빡거리다가 도훈의 얼굴을 그대로 담은 채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몸이 위로 둥실 떠올랐다. 규칙적인 흔들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은 서늘한 바람에 실려 온 그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몽롱한 기운에 사로잡혀 향이 짙은 곳을 찾아 얼굴을 묻고 코를 문질렀다. 앓는 것 같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꽉 잠겨서 제대로 들렸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만있어.”
도훈의 목소리도 그다지 괜찮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수안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만큼 정신이 또렷하지 못했다.
혼곤하고 나른한 감각에 사로잡힌 가운데, 오로지 뚜렷한 건 도훈의 단단한 팔이 선사하는 아늑함뿐이었다.
수안은 놓치고 싶지 않은 향기와 온기를 좇아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다시 한번 앓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사실, 수안은 오늘 종일 그녀를 몸살 나게 했던, 절대로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갖게 되어버린 감정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은 조급증에 휩싸여 있었다.
“아저씨, 사랑을 해봤어요?”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말에 그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에 대답을 듣기는 틀렸다고 생각할 즈음 낮게 잠긴 목소리가 가슴을 타고 전해졌다.
“그래.”
예상 못 한 대답이 아닌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여전히 단단한 팔에 안겨 있는데도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것만 같았다.
뭐 하나 모자란 것 없는 남자니 대쉬하는 여자들도 있었을 테고, 그럼 사랑하고 이별하고 한두 번쯤은 그랬겠지, 생각했음에도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그럼, 그러면 계속 생각나고,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 봐도 화나고, 그러는 게 사랑 맞아요?”
“그래.”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통제가 안 되고 그러는 게 사랑 맞아요?”
“그래.”
“폰에 이름 뜬 것만 봐도 설레고, 보고 있어도 그리워지는 그런 게 사랑, 맞아요?”
짤막하지만 바로바로 들려오던 대답이 이번엔 없었다. 대신 그녀의 몸이 푹신한 침대에 내려앉았다.
수안이 웅얼웅얼 질문을 늘어놓는 사이 어느새 방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도훈이 자신의 목에 감긴 그녀의 팔을 풀어내고 이마를 뒤덮은 머리칼을 정돈해 뒤로 넘겨주었다.
“그런 게 진짜 사랑이에요?”
“그래, 그런 것 같다.”
한숨 섞인 대답을 토해낸 도훈이 그녀의 외투와 양말을 벗겨낸 뒤 이불을 덮어줬다.
꼼꼼하게 이불을 다독이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방을 나가 버릴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한집에 사는 게 무색할 만큼 얼굴 마주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이 남자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얼결에 깨달아 버린 감정을 내보일 만한 용기는 없어서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가 곁에 있어줬으면 했다.
혼자만의 감정이라 너무 억울하고 화나고 비참했지만, 그래도 그가 곁에 없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자라.”
그래서 이불 끝자락을 매만지다가 멀어지려는 그의 손을 재빨리 움켜잡았다.
좀 더 옆에 있어달라고 말을 하려 했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비참한 마음 때문인지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가 버렸다.
“난 과거 있는 남자는 싫어.”
“뭐?”
“나는 과거 같은 거 만들 시간도 없었는데 너무 불공평하잖아.”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스스로 놀란 것도 잠시, 수안은 사랑을 해봤냐는 물음에 도훈이 수긍할 때부터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술주정을 하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바쁜 남자도 싫어. 너무 잘난 것도, 나보다 어른인 것도 정말 싫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수안아, 눈 떠봐.”
다정하게 들리는 도훈의 말에도 수안은 눈을 더욱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네가 신경 써야 할 과거 같은 건 없어.”
수안이 슬며시 눈을 떴다. 예의 무표정한 도훈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사랑은 해봤다면서 그녀가 신경 쓸 과거는 없다고 말하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도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바쁜 것도, 잘난 것도, 어른인 것도 내 의지하곤 상관없는 건데, 그래도 내가 싫은가?”
제 입으로 말하기가 영 낯간지러운지, 말하는 중간중간 도훈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자세히 보니 귓불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시큰둥하게 물을 땐 언제고, 간절하게 답을 기다리는 표정이 마치 밥 앞에서 때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눈매는 매섭기 짝이 없는 데다 어깨깡패인 이 남자가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나가는 걸 미처 막지 못했다.
제대로 인식을 했을 때는 이미 그녀의 입술이 도훈의 뜨거운 입술에 맞닿아 있었다.
세상 가장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것이 촉촉하게 맞물렸다.
몇 번을 반복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감촉에 수안은 더욱더 담대해져서, 좀 더 깊이 맞물릴 수 있게 얼굴 각도를 살짝 틀었다.
도훈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먼저 시작하지만 않을 뿐, 그녀가 조금만 자극해도 도훈이 대담하게 진도를 뺀다는 걸 알기에, 수안은 겁도 없이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당겼다.
혀를 조금 내밀어서 그의 입술 새를 파고들며, 수안은 이러다 심장이 터지는 것은 아닌지 그 걱정만 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던 생각들은 벌써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뒤였다.
오직 그가 안겨줄 찐 키스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을 즈음, 단단한 손에 양팔이 잡히고 그의 입술에서 가차 없이 떼어졌다.
“왜…….”
수안이 당연한 걸 빼앗긴 것 같은 얼굴로 의문을 표하자, 도훈이 눈매를 짙게 일그러뜨렸다.
“도발하지 마.”
꽉 잠겨서 껄껄한 목소리가 그녀를 을러댔다.
영문을 모르겠는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자니, 입매를 굳힌 도훈이 굽히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