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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부부는 닮는다는데 (51/88)

51. 부부는 닮는다는데

“곱창에 얽힌 말 못 할 추억이라도 있는 거예요? 내가 알면 곤란한 뭐, 그런 거?”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묻자 도훈은 또 설핏 입꼬리만 끌어 올린다.

이 양반, 아무래도 스리슬쩍 넘어갈 심사가 본데. 아무리 무늬만 부부래도 이건 아니지.

“나 그렇게 속 좁은 여자 아니거든요. 아저씨 과거의 여자가 곱창집 딸이었다거나, 아니면 곱창을 너무 좋아해서 매일 곱창 데이트를 즐겼다고 해도 이해할 테니까 그냥 얘기하시죠.”

“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한데, 어릴 때 자주 먹었어.”

“아아, 아아주 조숙하셨나 보네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좋아하셨거든.”

“어, 아, 음, 과거의 남자였군요. 하아! 미안해요.”

갑자기 튀어나온 아버지 얘기에 수안은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대다가 결국 시무룩하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알았으니까 곱창은 그만 난도질해.”

도훈의 말에야 자신이 젓가락으로 곱창을 마구 찔러대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수안이 멋쩍게 웃고 말았다.

“그, 저, 아버님은…….”

수안의 어설픈 아버님 소리에 도훈은 꼭 찡그리는 것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올해로 돌아가신 지 20년째네.”

말문이 막혔다. 20년이나 지난 일에 애도를 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시껄렁한 옛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말 수도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허둥대다가 바짝바짝 타는 속에 콜라를 벌컥 들이켰다.

순간 목구멍을 지나 코까지 들이치는 짜릿함.

수안은 인상을 한껏 찡그리며 코와 입을 동시에 잡쥐었다.

그런 자신의 꼴이 얼마나 웃길지 안 봐도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소만 설핏설핏 짓던 도훈이 짧지만 강렬하게 들릴 정도로 호쾌한 웃음을 토해냈다.

“하하. 아버지가 지금 꽤나 후회하고 있을 것 같네. 이렇게 예쁜 며느리가 아버님이라고 불러주는 것도 못 듣고 가셨으니.”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며느리라는 소리가 그들 사이에 부족한 유대감을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부끄러우면서도 간질간질했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에 대해 거의 모든 걸 알고 있는 도훈에 비해, 그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들자 괜한 욕심을 부려보고 싶어졌다.

“그러면 어머님은요?”

정말 괜한 욕심이었나 보다.

도훈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지는 걸 알아챈 수안이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생사 여부를 묻는 거라면 잘 몰라. 내가 일곱 살 때 집을 나가셨거든.”

일순 질문하기 전보다 더 당황한 수안에 비해 도훈의 목소리는 남의 얘기를 하듯 담백하고 차분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위로가 필요한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났고, 사실 네가 물어보기 전까지 거의 잊고 살았어.”

“내가 다시 생각나게 한 건 맞네요.”

“생각났다고 해서 기분 나쁘거나 달라질 건 없으니까 신경 끄고 어서 먹기나 해.”

도훈이 판 위를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알맞게 익은 감자를 수안의 접시로 올려주었다.

“부부는 닮는다는데.”

감자를 집어 들며 꺼낸 말에 도훈의 젓가락질이 잠시 멈칫했다.

“우린 엇비슷하게 반쪽자리 고아네요.”

없는 게 나은 아버지를 둔 여자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어머니를 둔 남자를 보며 예쁘게도 웃어 보인다.

분명 위로가 필요할 나이는 아니라 했는데, 이제야 뒤늦은 위로를 받은 것처럼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져 온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도훈의 입가에도 온화한 미소가 슬며시 내려앉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맥주 두 병이요!”

도훈의 살벌한 눈빛을 꿋꿋하게 이겨낸 수안은 개강파티 때 착실하게 배워 익힌 황금비율대로 소주와 맥주를 섞어 도훈의 앞에 다소곳이 내려놓고, 자신의 소맥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자아, 차 사장님이 차 회장님 된 걸 축하하며, 건배!”

“아주 술꾼 나셨네.”

도훈은 툴툴거리면서도 수안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수안은 정말 술이 고팠던 것처럼 한꺼번에 반이나 들이켠 뒤 잔을 내려놓았다.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도훈도 술잔을 조금 기울이다가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보고받았다면서요.”

“한태경 그 녀석하고 분위기가 심각했다는 것만.”

“거기서 도청까지 하면 완전 사생활 침해예요.”

수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레 투덜댔다.

그럴 리 없었지만, 태경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하루 종일 자신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들이 뭐였는지 다 들켜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가슴이 두근댔다.

“특이사항만 보고하라고 지시했고, 네가 두 시간 넘게 길거리를 헤매지만 않았어도 그런 보고는 올라올 일 없었어. 물론 도청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고.”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끝낸 도훈이 눈빛만으로 그녀의 대답을 종용했다.

“태경이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아서 얘기를 나눴을 뿐이에요.”

고백을 받았다는 소리를 남편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태경의 마음이 가볍지 않음을 알기에 가벼운 말로 늘어놓기에는 태경이나 도훈 두 사람 모두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대충 얼버무린 수안이 도훈의 진득한 눈길을 피하기 위해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이런 상황에 먹을 음식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꼬치꼬치 캐물을 마음까진 없었는지 도훈은 묵묵히 수안과 보조를 맞추어 식사를 이어나갔다.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에 적잖이 안도한 수안도 오직 그게 목적인 것처럼 열심히 배를 채웠다.

그리고 요령 있게 목이 마른 척 중간중간 술도 홀짝였다.

도훈에게 술을 따라 달라 할 용기까지는 없어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제 손으로 조신하게 따른 술을 세 잔째 기울이려던 참이었다.

“백수안.”

“히익, 이거까지만 마시려고 했어요.”

부르는 소리에 놀라 출렁거린 잔에서 술이 흘러넘쳐 손을 적셨다.

탐탁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면서도 도훈은 수안의 손에서 잔을 빼낸 뒤 냅킨으로 닦아주었다.

“이왕 시켰는데 남기면 아깝잖아요.”

괜히 민망해진 수안이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흘린 술은 벌써 흔적도 없는데, 도훈은 지나치다 싶게 꼼꼼히 수안의 손을 닦아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술을 닦아낸다는 건 핑계고, 그냥 잡고 잡힌 채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수안아, 나는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

지금의 상황과는 맞지 않는 말에 잡힌 손으로 향해 있던 수안의 시선이 도훈에게로 옮겨졌다.

그즈음 냅킨을 쥐고 무의미하게 움직이던 손짓도 멈춰서 두 사람의 손은 오롯이 맞잡혀 있기만 했다.

“너한테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고,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무조건 존중해 줄 거야.”

“아저씨, 어디 먼 데 가요?”

너무나 진지한 도훈의 표정에 눈만 깜빡이고 있던 수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번에 울림이 좋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찡그려진 눈으로 보아 어이없어서 웃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웃음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웃음이 잦은 걸까? 무표정의 화신, 웃음이 가장 비싼 CEO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갑작스럽기 짝이 없는 인생 선배의 충고쯤 되는 말과 이례적으로 잦아진 도훈의 웃음이 수안을 불안하게 했다.

자신의 인생엔 없을 줄 알았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깨달음만으로도 너무 벅찬 하루였다.

여기서 무언가를 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 뭐 선택해야 해요?”

“언젠가는 그러겠지.”

알아듣지 못할 도훈의 말엔 이상하게 상실감 같은 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상실감인지 짚어볼 여유도 없이 도훈의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곧 모든 게 정리될 거야. 그땐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돼.”

“지금도 충분해요.”

이상하게 겁이 났다.

도훈은 더 나은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지만, 거기엔 그와의 미래가 빠져 있었다.

마치 이별을 얘기하는 것처럼, 꼭 그렇게 들렸다. 그래서 충분하다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저씨가 싫은 게 아니라면, 나는 진짜 지금도 괜찮아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도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가 수안이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졌다.

“식는다. 어서 먹어.”

도훈의 재촉에 젓가락을 다시 들긴 했지만, 곱창은 좀 전만큼 맛있지 않았다.

몇 번 집어먹는 체하다가 좀 더 먹기 쉬운 술만 여러 번 기울였다.

“수안아, 나 너무 믿지 마.”

젓가락도 놓고 고고한 자세로 앉아 수안만 물끄러미 보고 있던 도훈이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내가 그렇게 착한 놈이 아닌 것 같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네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 관계…….”

너무 낮게 깔려서 잔뜩 집중해야 들렸지만, 그래도 제법 또렷했던 음성이 중간에 뚝 끊겼다.

갑자기 입을 꾹 닫아버린 도훈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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