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 감시와 관심 사이 (50/88)

50. 감시와 관심 사이

“으아아아!”

괴상한 소리를 낸 수안이 두어 발짝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얼굴에는 순식간에 열이 오르고,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눈은 갈 곳을 잃고 헤맸다.

그런 수안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도훈의 눈썹이 살짝 치솟았다가 내려앉았다.

“매번 반응이…… 꼭 못 볼 걸 본 것처럼 말이야.”

“그게, 머릿속에 있었는데 갑자기 실제…….”

멍하니 중얼거리던 수안이 지레 놀라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그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고 제 입으로 실토한 꼴이라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것 같던 얼굴이 한층 더 달아올랐다.

“술 마셨다는 보고는 받은 적 없는데, 열이 있나?”

불쑥 다가온 도훈이 아무렇지 않게 이마를 맞댔다.

부지불식간에 당한 습격에 놀란 수안이 숨을 멈췄다.

가슴이 터질 듯 두근댔다. 이미 인식해 버린 마음은 어찌해 볼 새도 없이 밖으로 뚫고 나올 기세다.

이거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이상적인 부부, 그거 하기로 했는데.

수안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거세게 도훈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런데 이거야 원, 밀리지를 않네. 대충 밀리는 척이라도 좀 해주지.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눈앞의 어깨깡패는 인상만 들입다 구기고 있다.

“여, 열 없어요. 조, 좀 추워서 볼이 빨개졌나 봐요. 근데 아저씨는 왜 여기…….”

왜 여기 있냐고 묻기도 전에 도훈의 재킷주머니 속에서 애타게 울어대는 휴대폰이 그의 관심을 빼앗아가 버렸다.

수안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도훈을 멀거니 좇으며 열 오른 뺨에 차가운 손바닥을 붙였다.

“잠깐 전화 좀 받을게.”

양해를 구한 도훈이 수안을 살짝 비껴 섰다.

각진 턱선과 목울대가 그녀의 시선 앞에 훤히 윤곽을 드러냈다.

늘 마주하던 턱선이고 목울대인데, 절도 있게 휘고 힘 있게 뻗은 윤곽에 오롯이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저보다 더 멋진 직선도, 저보다 더 아름다운 곡선도 없을 듯했다.

휴대폰을 거머쥔 손도, 어울리지 않게 길고 풍성한 속눈썹도, 꼬리가 살짝 올라간 입술도, 그의 모든 것이 미치도록 근사했다.

수안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핏대가 불거진 목덜미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손끝을 타고 그가 멈칫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좋아서 그러는 것 같진 않았다.

‘손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물건에 손을 댄 것처럼 머쓱해진 수안이 쭈뼛거리며 손을 떼어냈다.

그제야 돌아보는 도훈의 표정에는 그 어떤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직하지만 제법 날이 서 있던 말도 멈춘 상태였다.

휴대폰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넘어왔다.

휴대폰 너머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던 것처럼 도훈은 수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모양만으로 ‘왜?’라고 물었다.

수안은 무엇에 대한 부정인지도 모르면서 냉큼 고개부터 저었다.

진득한 눈길로 꼭 집어삼켜 버리기라도 할 듯 쳐다보던 도훈의 시선이 다시 비껴났다.

“최대한 간소하게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사장단 임직원 포함 최대 500명 정도로 인원 조정해. 나머지는 일일이 컨펌받을 필요 없으니까, 취임식에 관한 건…….”

날이 선 음성이 다시 나직하게 이어졌다.

수안은 숨이 차오른지도 몰랐다가 도훈의 시선에서 놓여나자마자 입술을 모으고 숨을 크게 뱉어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손가락 끝에 물기가 만져진다는 걸 깨달았다.

‘땀? 내가 이렇게 긴장했었나?’

손가락을 비비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좀 전에 손가락 끝을 스쳤던 그의 목덜미로 시선을 옮겼다.

막 어두워지기 시작한 데다, 도훈이 서 있는 곳은 현란한 불빛이 잘 미치지 않는 곳이라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한순간 번들거리는 걸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눈을 살짝 찌푸린 수안이 바짝 다가서서 까치발까지 들었다.

‘어, 땀이다.’

“뭐 하는 거…….”

“히익!”

수안이 목덜미로 다시 손을 가져가려던 찰나, 통화를 끝낸 도훈이 그녀를 돌아봤다.

놀란 수안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려나려다가 그만 비틀댔고, 도훈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왜, 뭐 하는 거야?”

지독히도 낮게 잠긴 음성이 귓전을 둥둥 울렸다. 수안의 심장도 덩달아 둥둥 요동을 쳤다.

“아저씨 목에 땀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녀의 허리를 놓아준 도훈이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아, 잠깐 뛰었더니…….”

이 시간에, 그것도 완벽한 슈트 차림으로 뛸 일이 뭐가 있었을까 하는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럴 일이 있었어.”

더 이상 묻지 못하도록 한마디로 일축해 버린 도훈의 귓불이 어쩐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좀 걷자.”

“차는 어쩌고요?”

“곧 가져올 거야.”

곧 가져올 차를 왜 타고 오지 않았는지, 왜 땀이 흐를 정도로 뛰었는지, 그리고 대체 왜 여기 있는지, 꼬치꼬치 묻기도 전에 손을 덥석 잡혔다.

수안은 입만 벙긋대다가 그대로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도훈의 커다란 손에 파묻히고 나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 한복판에서 손까지 잡고 보니, 길거리 데이트를 즐기러 나온 것처럼 기분이 살짝 들떴다.

순식간에 변해 버린 자신의 감정이 저조차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뭐 좀 먹자. 배고프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몸은 마음보다 정직했다.

도훈의 말에 잊고 있던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 우리 저기 가요.”

고만고만한 음식점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가장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을 가리킨 수안이 도훈을 잡아끌었다.

도훈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따라왔다.

그리고 잠시 후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도훈과 마주 앉은 수안은 활기차 보이는 주인장에게 호기롭게 외쳤다.

“모듬곱창 한 판하고요, 소주 한 병이요!”

“소주는 됐습니다. 밥하고 탕도 함께 주십시오.”

도훈이 컵에 물을 따라 건네며 단호하게 끊어냈다.

“소주는 좀 그런가? 그럼 맥주 두 병이요.”

“백수아안.”

“소주? 맥주? 어떤 거로 드릴까? 차라리 소맥으로 하는 건 어때요?”

두 사람의 신경전에 주문을 받으려고 서 있던 주인이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네, 소맥, 그거로 할래요.”

“됐습니다. 그냥 콜라 주십시오.”

웃음기 쫙 빠진 도훈의 눈빛에, 제철 맞은 물고기마냥 활기가 넘쳤던 주인장께서도 주춤하고 말았다.

아랫입술이 삐죽 나온 수안의 애처로운 눈길을 마주하고는 덩달아 울상을 지은 주인이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멀어져 갔다.

“나 성인이에요. 술 정도는 내 맘대로 마실 수 있다고요.”

“술 가지고 거창하게 굴지 마. 점심도 안 먹었다던데. 우선 뭐 좀 먹고 난 다음에 그래도 마시고 싶으면 시켜줄게.”

도훈이 타이르듯 건넨 말에 수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것까지 보고받아요?”

“중요한 것만.”

“내가 점심 안 먹은 게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끼니도 거르고 넋 놓고 헤매 다닌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현진은 대체 어디까지 보고를 하는 걸까?

도훈이 그녀의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는 것도, 납치사건 이후로 그에게 매일 보고가 올라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석이 경찰에서 풀려난 직후에 도훈이 이해를 구했고, 그녀 또한 동의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안전과 직결되지 않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보고가 올라가는 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꼭 감시받는 것 같아요.”

“관심이고 걱정이야.”

무미건조하게 떨어진 말에 누구의 관심이고, 누구의 걱정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수안이 불만스레 입을 삐죽거렸다.

“너한테 강박증 같은 거 있으니까, 그 정도는 봐줘.”

양해를 구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이 정도도 많이 봐주고 있는 거니까, 불평은 그냥 집어넣으라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수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닌 애매한 기분에 휩싸였다.

강박증이 있다는 말이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으면서도, 자신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표정조차도 애매하게 일그러져 버렸다.

“그래도 그건 너무…….”

수안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불판에 담긴 모듬곱창과 각종 밑반찬이 날라져 왔다.

곱창에 대한 철학이 남다른 주인장이 맛있게 먹는 법에 대해 한바탕 떠들고 가는 통에 불평이든 뭐든 늘어놓을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수안은 입을 살짝 삐죽이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고소한 냄새를 맡으니 빈속이 쓰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거 먹어보기는 했나?”

도훈이 노릇노릇 잘 익은 곱창 하나를 수안의 앞접시에 놔주며 물었다.

“아니요, 처음이에요. 그 사람이랑 같이 살 때는 외식이란 거 아예 없었고, 할아버지랑 살고부터는 각 잡고 깨작거려야 하는 데만 다녔거든요.”

“그런데 호기롭게 여길 오자 하고, 주문까지 그렇게 거침이 없어?”

“손님 많은 거 보면 맛집인 건 분명할 테고. 나미가 그랬는데, 뭘 모를 땐 메뉴판 제일 꼭대기에 있는 거 시키랬거든요.”

수안이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턱을 치켜들자, 도훈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감돌았다.

한쪽 볼에만 살짝 파였다가 금세 매끈해지는 보조개가 젓가락에 집힌 곱창을 잊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떨어진다. 어서 먹어.”

“예? 아, 네.”

그의 얼굴을 보며 넋을 놓고 있던 걸 들킬세라 얼른 시선을 내린 수안이 곱창을 입으로 쏙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으음, 이거 맛있어요. 아저씨도 얼른 먹어봐요.”

“그래.”

무뚝뚝한 대답을 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도훈은 잘 익은 막창이며 곱창을 연신 수안의 앞접시로 옮겨놨다.

“아저씨는 이거 먹어본 적 있어요?”

“예전에.”

“예전 언제요?”

도훈은 곤란한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채 불판 위만 열심히 뒤적였다.

곱창 먹은 얘기가 곤란한 질문이 될 수도 있는 건가?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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