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네가 사랑을 알아?
얼마 없는 용기를 있는 대로 끌어 모아 출근하려는 기석에게 주은을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사정했지만, 돌아온 건 별것도 아닌 일로 수선 떨지 말라는 싸늘한 말뿐이었다.
“솔직히 그때 나 좀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이었어. 엄마 잘못되면 나도 그냥 따라 죽으려고 했거든. 흠, 막상 진짜로 돌아가셨을 때는 살 궁리만 했던 거 보면 정말 죽을 수 있었을까 싶긴 하지만, 그땐 정말 그 정도로 절박했어.”
죽을 각오를 하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머리도 가슴도 차가워지는 듯했다.
기석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가 붙여준 감시자와 함께 순순히 등교를 했다.
감시자가 그녀를 내려준 뒤 계속 교문 앞을 지키고 있는지, 일단 갔다가 수업이 끝날 즈음 다시 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교문으로 나가는 모험은 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분명 기석에게 전해질 테고,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제지를 당할 게 뻔했다.
학교 담장을 넘어 몰래 빠져나가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는 참 쉬운 일이었다.
담장을 넘는 게 그렇게 힘들 거라곤 미처 몰랐기에 가능했던, 정말 어설픈 계획이었다.
“근데 그 담장 진짜 너무 높더라. 너 아니었으면 절대로 못 넘었을 거야.”
애써 드리운 미소는 생각만큼 괜찮아 보이지 않았던지 태경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네 그 아버지라는 작자가 너도…….”
태경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뭘 물어보려는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답을 듣고 싶은 건지, 듣고 싶지 않은 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 같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수안의 기색을 살폈다.
수안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간신히 끄집어 올렸다.
이미 짐작을 했을 텐데도 사실을 확인하는 건 충격이었던지 태경은 입만 벙긋대고 있다가 한숨을 토해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혹시, 얼마 전에 납치됐던 것도…….”
“엄마가 내 법정후견인을 남편으로 지정했거든. 아버지는 자기가 누려야 할 권한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최대한 차분하게 들리도록 단어를 골라 말을 꺼낸 수안은 그간의 사정을 남의 얘기하듯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수안의 얘기가 끝났을 때,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태경은 그녀의 앞을 불안스레 서성댔다.
여태껏 숨기고 있었던 것에 지레 찔린 수안이 사과의 말을 건네기 위해 태경의 눈치를 살폈다.
두어 번 더 오락가락하던 태경이 벤치에 앉아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는 걸 보고 수안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미안해. 숨기려던 건, 아니, 사실 숨기고 싶었던 건 맞지만, 너랑 나미한테만은 얘기해야겠다고…….”
“그럼 네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면 모두 끝나는 거네?”
“어?”
“네 생일 5월 16일이니까 얼마 안 남았잖아. 그때는 네 아버지도 어떻게 못 할 테니까 모두 끝나는 거 아니냐고?”
“글쎄, 그렇게 되진 않을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차도훈과의 결혼을 계속 유지라도 하겠다는 말이야?”
수안의 손목을 낚아채듯 거머쥔 태경이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격한 반응에 놀란 수안이 상체를 조금 뒤로 뺐다.
“나는, 그러고 싶어.”
“왜?”
“나쁘지 않으니까.”
태경의 얼굴이 대번에 확 일그러졌다.
“너 이씨, 결혼이 장난이냐? 나쁘지 않은 정도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서로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해도, 싸우고 바람피우고 별 난리를 다 치는 마당에…….”
“그러니까. 사랑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감정 따위는 필요 없어.”
또박또박 말을 쏟아낸 수안이 갈고리처럼 엉켜 붙어 있는 태경의 손을 강제로 떼어냈다.
“사랑이 뭔지는 알고 그딴 소릴 해?”
어쩐지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을 한 태경이 안 그래도 여러 번 헤집어서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한번 쥐어뜯었다.
“한시도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젠장, 엇비슷하게 생긴 담벼락만 봐도 심장이 먼저 알고 나대고, 폰에 뜬 이름만 봐도 머리가 아찔해져.”
격앙된 목소리로 쏟아내는 태경의 말에 수안의 미간이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네 옆에 다른 놈이 있는 거 보면 아주 미쳐 버릴 것 같아. 통제도 안 되는 이 빌어먹을 감정을 뭐 알기나 하고 필요 없다는 거야?”
태경은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혼란스러운 눈길이 격정이 깃든 태경의 눈에 진득하니 꽂혔다.
“그런 게 사랑일 리 없어.”
중얼거리는 목소리엔 의구심이 가득했다.
“뭐?”
“계속 생각나고, 그 사람이랑 연관된 것만 봐도 가슴 설레고, 폰에 이름 뜬 것만 봐도 아찔해지는 그런 게, 사랑일 리 없다고.”
요즘 그녀가 도훈을 상대로 하고 있는 게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사랑이면 안 됐다.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사랑은 좀 더 특별한…….”
“이보다 더 얼마나? 내 인생이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이보다 더 특별한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태경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흘러넘치는 마음은 묵직하기만 한데 수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절절한 태경의 고백은 귓전을 맴돌다 흩어져 버리고, 정의 내리지 못했던 제 감정에만 온통 휩쓸리고 말았다.
정말 잘난 사람이니, 진흙 속에 파묻어놔도 빛이 날 사람이니 단순히 이성적으로 끌리는 거라 생각했다.
기석 때문에 항상 불안에 떨다가, 이제 조금 숨통이 트이니까 다른 곳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생긴 거라 그렇게 생각했다.
도훈이 곁에만 있어도 긴장되고 설레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라 여겼다.
부부로서의 시간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사그라들 떨림이라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백수안, 내 말 듣고 있어?”
“어?”
“나는 네가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태경아, 나 어떡하지?”
그게 진짜 사랑이라면,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무, 뭘?”
갑자기 울상이 된 수안이 묻는 말에 태경은 당황해서 버벅댔다.
“다, 당장 뭘 어떻게 하라는 거 아니야. 네가 날 봐주기만 한다면 난 뭐라도.”
“미안.”
태경의 말을 자른 수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잘 못 알아들을 거야.”
“…….”
“그러니까 우리 얘기는 다음에, 다음에 하자.”
태경을 쳐다보지도 않고 웅얼거리듯 말을 끝낸 수안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멍한 얼굴에 불안해진 태경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다음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태경을 조급하게 몰아쳤다.
붙잡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팔을 뻗었다가 차마 잡지 못하고 되돌렸다.
헤매는 사람처럼 휘적휘적 걷다가 결국은 멈춰 서 멀거니 바닥을 바라보는 수안의 옆모습이, 어쩐지 멀게 느껴져서 쉽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아프게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내 가버린 빈자리에서 선득한 가슴만 부여잡았다.
***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앞질러 간다.
부딪친 어깨가 제법 아파서 쳐다보니, 팔짱을 낀 연인이 서로에게 빠져 지나친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마주 보고 웃는 연인의 얼굴이 어스름 저녁 빛에도 화사했다.
괜한 심술에 수안의 콧잔등이 살짝 일그러졌다.
터벅터벅 걷는 사이 어느새 봄볕은 사위어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움츠러드는 어깨를 감싸 안고 주변을 휘둘러봤다.
정신이 다른 데 팔린 와중에도 범생이 근성을 어쩌지 못해 수안은 마지막 강의까지 모두 출석을 했다.
아니, 그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강의 내용은 물론이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나미가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에 없었다.
아마 수안과 헤어진 뒤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태경에 관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대답을 하긴 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고개만 끄덕이다 말았을지도…….
강의가 끝나자마자 나미가 부르는 것도 무시하고 그대로 학교를 벗어났다.
그 뒤로 쭉 정처 없이 사람들 속을 헤집고 다녔다.
현진이 두 번인가 다가와 차에 타라고 했지만,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뻐근해오는 종아리만큼이나 과부하가 오기 직전인 머릿속도 묵직했다.
부정하려고만 했던 마음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어서, 몇 시간 혹사당한 발과 다리보다 마음이 더 버거웠다.
결론을 말하자면, 바란 적도 없고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차도훈은 어느새 백수안의 중심축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그래, 백수안은 차도훈을 사랑한다.
보통 이렇게 인정하고 나면 홀가분하다든가, 벅차다든가,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게 뭐람. 얕은 개천인 줄 알고 발을 담갔는데, 갑자기 쑥 빨려 들어가 목까지 잠긴 듯한 기분이었다.
아차하면서 살펴봤을 때야 비로소 그곳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강이라는 걸 깨달아 버린 황망함이 엄습했다.
그래서일까? 되게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하고, 봄바람이 훑고 가는 어깨가 시렸다.
아무래도 그만 돌아가야 할까 보다.
수안은 시린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 비비며, 어딘가에 있을 현진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근처에 있을 텐데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전화를 하는 게 낫겠다 싶어 가방을 뒤지는데, 어깨 위로 포근한 외투가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좀 춥다 했는데. 고마워요, 언…….”
“추운데 왜 헤매고 다녀?”
큼직한 외투 때문에 몸은 금세 따뜻해졌는데, 수안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한 뼘보다 훨씬 더 위쪽에서 무심한 표정의 차도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