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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밝히지 못했던 얘기 (48/88)

48. 밝히지 못했던 얘기

귀로 듣기는 했는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수안의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게…….”

“아니, 우선 듣기부터 해. 우리 이제 겨우 스무 살이야. 무언가를 결정하기에 아직 이른 나이라고. 너한테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지 몰라도,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머리에 쥐나도록 생각해 보고 결정하면 안 되겠냐?”

말하는 내내 자신의 손끝을 향해 있던 태경의 시선이 수안에게로 옮겨졌다.

간절함이 듬뿍 담긴 눈빛에 수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아, 젠장. 돌려서 말하려니까 머리에 쥐날 것 같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나한테도 기회를 좀 달라고.”

쉼 없이 말을 쏟아낸 태경이 잘못을 저지른 뒤 주인의 기색을 살피는 강아지처럼 수안을 힐끔거렸다.

수안은 태경이 쏟아낸 말들을 곱씹어보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의 안색 같은 건 살필 겨를이 없었다.

고백인 게 분명한 말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태경의 뒤통수를 치며 나쁜 놈이라고 하던 나미의 얼굴이었다.

왜 그때 나미가 그렇게 아픈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뒤늦게 깨달아 버린 마음이 충격으로 버석버석했다.

전혀 뜻밖인 데다 원한 적도 없던 고백은 당혹스럽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에 울상이 되어 돌아본 태경의 얼굴은 그녀보다 나을 게 없었다.

학교에 오지 않는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양 볼은 핼쑥하고 눈 밑은 거뭇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중한 친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수안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도훈에 대해 좀 더 빨리 털어놓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기석에 관한 일을 숨기고 싶은 나머지, 친구들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염증을 느꼈다.

아무래도 고백에 대한 대답보다는 사과가 먼저여야 할 것 같았다.

초췌한 얼굴에 간절함까지 담겨 있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잘 넘어가지 않는 침을 삼킨 수안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태경아, 우선 너한테 사과…….”

“아니, 잠깐. 아직 못다 한 말이 있어.”

급하게 뻗어온 태경의 손이 수안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이런 말 하기 되게 쪽팔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지금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어쩌면 앞으로도 차도훈보다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다고 장담 못 해.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자신 있거든. 그러니까…… 아, 젠장. 뭐 이렇게 없어 보이냐.”

태경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수안은 더욱 막막한 기분이 되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태경아, 나 너랑 나미한테 말 못 한 게 있어.”

조심스럽게 운을 떼어놓고 수안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태경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겁이 나서 가슴이 덜컥댔지만, 더 이상 그를 기만할 수는 없었다.

“사실은, 나 이미 결혼했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태경의 표정부터 살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너무 작게 말해서 듣지 못한 건가 싶을 즈음, 잡힌 손이 꽉 조여졌다가 휙 내쳐졌다.

자신의 무릎 위로 툭 떨어지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수안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이보다 더 화를 낸대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태경의 굳은 표정을 보니, 이해를 바라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 같아 겁이 덜컥 났다.

이대로 소중한 친구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먹먹해 올 즈음, 태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덩치 큰 녀석이 불쑥 솟구치는 것에 놀란 수안은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그런 웃기지도 않는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내가, 후우, 그렇게 영 아니야?”

허리에 양손을 올린 태경이 험악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수안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거짓말, 아니야. 어쩌다 보니, 아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어.”

“말이 되는 소릴 해. 결혼식 같은 거 하지도 않았잖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 하지만 결혼한 건 사실이야.”

“누구랑? 차도훈 그 새끼랑?”

“그렇게 말하지 마.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야. 오히려 나 때문에…….”

그래, 도훈은 오히려 그녀 때문에 희생하고 있었다.

서류상일망정 원치 않는 결혼을 했고, 이제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결혼을 현실화하기로 했다.

5개월 남짓 함께 사는 동안 도훈이 하루라도 온전히 쉬는 걸 보지 못했다.

이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최저치를 찍었던 주가는 그가 총괄사장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 수준을 회복했고, 최근엔 상회하기까지 했다.

도훈은 바쁜 와중에도 그녀를 위해 저녁을 준비했고, 반지를 선사했다.

납치사건이 있었던 뒤로는 그녀의 경호에도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지분에 대한 권리를 대신 행사하고 있긴 하지만, 회장 자리에 오르고도 별로 기뻐하지 않았던 어제의 그를 생각하면, 도훈이 정말 그걸 원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결국 그녀는 그에게 받기만 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고 있어.”

“시X. 웃기는 소리하지 마. 너희 할아버지 자리를 차지하고, 한참 어린 애랑 결혼까지 한 사람이 희생을 했다고? 지나가던 개새끼가 웃겠다.”

“아저씨가 원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니야.”

“그럼, 네가 원했냐?”

“그건…… 그래, 어떤 의미로는. 아저씨와 나 둘 중에 누가 더 원한 건지를 따진다면, 그건 아마도 내 쪽일 거야.”

수안은 자신조차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힘없이 중얼거렸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한 태경이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잡아낼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수안은 착잡한 마음으로 태경의 시선을 마주하며 옆자리를 톡톡 쳤다.

“앉을래? 조금 하기 힘든 얘기라 길어질 것 같은데. 올려다보려니까 목 아파.”

언제부턴가 수안이 불편한 걸 못 견뎌했던 태경이 목이 아프다는 그녀의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벤치에 앉았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음, 역시 나도 그날 얘기부터 해야 할까 봐. 그날, 내가 말했던 괴물은 내 아버지야.”

최대한 담담하게 들리도록 꾸며낸 말투엔 작은 떨림이 섞여 있었다.

4년을 훌쩍 넘어버린 과거의 일이니, 말로 꺼내놓는 건 쉬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는 것처럼 답답해져 왔다.

주은의 맹목적인 사랑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수안은 차라리 외면하는 쪽을 택했고, 모든 것에 냉담해지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평상심을 유지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번 가슴을 졸였고, 매번 두려움에 떨었다.

그즈음 기석의 폭력은 거의 습관적이다 싶을 정도로 잦아졌었다.

주은이 필사적으로 막아준 덕에 수안이 폭력에 노출되는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아무리 횟수가 적다고 해도 폭력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고, 자존감은 야금야금 바닥을 드러냈다.

수안은 지옥과도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거의 자포자기 상태인 주은을 기회가 될 때마다 설득했다.

주은은 자신이 잘하면 기석의 태도가 나아질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번번이 고개를 내저었다.

보다 못한 수안은 이 회장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그 뒤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이 회장은 수안의 구원 요청을 부부싸움을 한 부모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어린애의 투정쯤으로 치부해 버렸다.

당연히 수안이 전화로 떠들어댄 얘기들은 이 회장에 의해 기석의 귀로 들어갔고, 그건 오롯이 폭력으로 되돌아왔다.

집 전화와 핸드폰 사용이 금지됐고, 등교 외의 외출도 금지됐다.

기석은 사람을 고용해 자신이 집을 비우는 동안에 주은과 그녀를 감시하게 했다.

게다가, 보호라는 명목하에 등하교마저 감시자와 함께해야 했다.

견디기 힘든 나날들이었다.

마음은 날로 피폐해져 갔고, 다음 날 다시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곤 했다.

희망은 실낱같이 옅었고, 암흑은 너무나 짙고 선명했다.

무언가를 도모해 보려는 의지마저 서서히 사그라들어 갈 즈음, 아주 쥐똥만큼 남은 수안의 오기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생겨 버렸다.

“그 전날, 아버지한테 맞을 때 머리를 벽에 부딪친 엄마가 밤새 앓았어.”

이 회장이 약속한 금전적 지원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것에 화가 난 기석이 쓸데없는 소릴 이 회장에게 전한 수안을 탓하며 날뛰었다.

주은이 필사적으로 막아서며 기석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밤새 앓아야 했던 사람은 수안이었을 것이다.

“아침엔 힘도 없이 축 늘어져서 나는 정말 엄마가 어떻게 되는 줄 알고…….”

그때의 막막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실제인 것처럼 되살아나는 바람에 수안은 울컥하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지옥 같은 나날에서 엄마마저 잃게 될까 봐 애간장이 녹았더랬다.

엄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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