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종일 네 생각만 나
어젯밤, 태성그룹의 회장 자리를 꿰찬 사람치곤 꽤나 맥 빠진 걸음걸이로 수안의 방을 찾은 도훈은 자는 척 꼼짝을 않는 그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주총 결과를 알려줬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고 관자놀이 부근에 입술을 내리누르는 동안, 그녀는 축하한다는 말은커녕 숨소리마저 죽이고 있었다.
잠들지 않았다는 걸 뻔히 알았을 텐데도 도훈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녀의 머리만 부드럽게 쓸었다.
그 손짓이 어찌나 애틋하게 느껴지던지, 수안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걸 꾹 참아야 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문제가 있을 리가 없고, 그러니 걱정거리도…….
“태경이 때문에 그래?”
아! 그래, 한태경이 있었지.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는 그를 걱정했던 게 언제라고, 머릿속이 온통 차도훈으로 가득 차서 다른 건 그만 잊고 말았다.
남자에 미쳐 친구를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평생 은인으로 모시느니 어쩌느니 해놓고 참 몹쓸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어, 그러니까. 오늘은 네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태경이한테.”
“나 뭐?”
“꺄악, 하, 하, 한태경!”
이번엔 진짜 제대로 놀란 수안이 계단을 헛딛고 비틀대자, 태경이 잽싸게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야아, 한태경, 너 뭐야?”
그동안의 걱정이 지나쳤던 탓이었을까. 사나운 물음과는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에 울먹임이 뒤섞였다.
그걸 놓칠 리 없는 태경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한 번 긁적였다.
“너 어쩜 그래? 학교는 왜 안 나온 건데? 전화는 또 왜…… 나미랑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기어코 한 대 툭 치는데도 초조한 기색만 얼굴에 가득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반응이 없기는 한 계단 위에 서 있는 나미도 마찬가지였다.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두 사람의 분위기를 알아챈 건 태경에게 투정 섞인 걱정을 한참 늘어놓고 난 다음이었다.
거의 잔소리나 마찬가지인 말을 듣고 있는 태경은 그렇다고 쳐도, 어디에 시선을 둔 건지 모를 나미의 태도는 좀 의외였다.
나미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며칠간 잠적했다가 나타난 태경에게 수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저렇게 소 닭 보듯 딴청만 부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외면하면서도 죽어라고 의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희들…….”
“수안아, 나 좀 잠깐 봐.”
태경이 미간을 찡그리며 두 사람의 낌새를 살피는 수안을 잡아끌었다.
“어어, 야아∼ 넘어지겠어. 잠깐만.”
태경에게 하릴없이 끌려가며 수안은 나미를 돌아보았다.
물끄러미 이쪽을 보고 있던 나미는 이내 돌아서서 인문관 계단을 올라갔다.
수안을 끌고 한참을 성큼성큼 걸어가던 태경이 멈춘 곳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벤치 앞이었다.
앙상한 가지에 작게 꽃봉오리가 맺힌 벚나무는 조금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강의가 한창일 시간이라 그런 건지 주변으로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저만치 석상 옆으로 평상복 차림의 현진이 다른 경호원과 함께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수안은 손목시계로 시간부터 확인했다. 강의 시작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워낙 착실한 데다 타고난 범생이인 수안으로선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만, 태경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여 차마 강의 시간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나미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
시간은 얼마 없고 맘은 급하고, 수안은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들었다.
“나미랑 먼저 갔던 날 뭐 있었던 거지? 그래서 너 학교도 안 나오고 연락도 안 받은 거야?”
태경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더 일그러졌다.
“그러게 좀 잘했어야지. 나미가 의외로 여린 구석이 있는 거 너도 알면서 매번 말 한번을 곱게 안 하더니 꼴좋다. 뭐 어쨌게 그렇게 심각한 거야?”
“백수안, 내가 부담되냐?”
“어, 어? 뭔 소리야? 나미가 너 부담스럽대?”
“아우 씨, 제발 쫌 백수안. 자꾸 그런 식으로 회피하지 말란 말이야. 우리 문제에 왜 유나미를 끼워 넣는데?”
“우, 리, 문제?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나미랑 썸 타는 중이잖아. 우리 문제가 아니라 너랑 나미 문제…….”
“내가 그렇게 아니야? 그 새낀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수안이 미간을 한껏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뭔가 살짝 핀트가 어긋나 있는 것 같았다.
“우리 같은 얘기 하고 있는 거 맞니? 네가 뭐라고 하는 건지, 나 하나도 모르겠어.”
수안을 사나운 눈길로 쳐다보던 태경은 답답한 듯 입김을 후 불어 앞머리를 날렸다.
“그 반지, 정말 커플링이야?”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수안은 반사적으로 왼손을 등 뒤로 감췄다.
수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태경이 그 모습에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으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흠칫 놀란 수안이 벤치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마, 말하려고 했어. 근데 이게 어디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서, 그래도 진짜 말하려고…….”
“재벌끼리 하는 정략, 그런 거지? 그 새끼랑 결혼까지 할 건 아니잖아. 그치?”
“태경아, 그러니까 이게 그 결…….”
“딱 한 번만 말할 거야. 똑바로 들어.”
수안의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잘라낸 태경이 그녀의 앞에 그늘을 만들며 떡하니 버티고 섰다.
해를 등지고 선 태경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수안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엄청난 말을 쏟아낼 것처럼 폼을 잡아놓고 갸웃하는 수안을 집어삼킬 듯 쳐다보고 있던 태경은 머리칼을 헤집으며 한숨부터 토해냈다.
“한태경, 무슨 말…….”
“종일 네 생각만 나.”
툭 던지듯 한마디를 뱉어놓고는 냉큼 수안의 눈치를 살폈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느리게 깜빡이는 걸 보고 있던 태경이 머리를 잡아 뽑을 것처럼 헤집었다.
“후우! 젠장, 이게 아닌데.”
거친 숨결 사이로 험한 말을 중얼거린 태경이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이리저리 오락가락했다.
그러다가 이내 지쳤는지 수안의 옆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걸쳤다.
“너 담장 위로 끌어 올렸던 날, 그때부터였어.”
세상 모든 게 싫어서 미치겠던 시절이었다.
사업한답시고 옆집 아저씨보다 더 보기 힘든 아버지도, 돈 떨어지면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친모도, 애써 차지한 자리를 잃지는 않을까 전전긍긍 예민하기 짝이 없는 계모도, 얼굴 마주하는 것조차 끔찍하고 짜증이 나던 때였다.
남아도는 힘과 치솟는 울분을 주체하지 못해 허구한 날 싸움질에 반항이니 선생님들도 한태경이라면 일단은 한번 접고 봤다.
그러니 학교생활이라고 오죽했을까.
전교에서 한태경을 모르는 애는 있을지언정, 한태경을 알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애는 없을 거라는 정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수안은 좀 특이한 애였다.
같은 반이라 태경을 알고 있었지만,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두려워하면서도 은근 관심을 보이는 여타 여학생들하고도 달랐다.
솔직히 말하면, 수안은 태경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치 홀로 딴 세상을 사는 듯, 수안의 주변은 공기의 흐름도 더뎠다.
수안은 전혀 시선 끌 만한 짓을 하지 않는데도 절로 시선이 가는 그런 애였다.
당연하게도, 사고를 몰고 다니는 태경과 외딴 세상에 사는 수안 사이에는 접점이 없었다.
반년이 넘게 같은 반에 있었으면서 말 한마디 나눠본 적이 없었다.
“생각나? 내가 던진 가방에 맞아서 이마는 빨개지고 눈은 울 것처럼 찡그리고도 말은 X나 재수 없게 했던 거?”
특별할 것 없던 날이었다. 지각을 밥 먹듯 하던 때라 학주를 피해 담을 넘는 건 그저 일상이었다.
늘 하던 대로 가방부터 담장 너머로 휙 던져 놓고 가볍게 발돋움해서 담장 위로 올라앉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 서서 고개를 쳐든 수안을 발견한 순간, 일상은 특별한 날이 되어버렸다.
“넘어왔으니까, 다시 넘어갈 수도 있는 거지?”
알은체 한 번 않던 애가 늘 얘기를 나누었던 사이처럼 형식적인 인사말 한마디 없이 대뜸 물어왔다.
금방 울 것 같은 눈을 하고도 어찌나 뚫어지게 쳐다보던지, 홀딱 빨려 들어가는 건 아닌지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얼뜨기처럼 대답도 제대로 못 했었다.
아무 답이 없는 걸 못 한다는 뜻으로 오해한 수안은 그의 가방을 내려놓고 담장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엉거주춤 앉은 자세를 취했다가 폴짝 뛰어올랐다.
바닥에서 30㎝나 떠올랐을까. 담장 위에 닿기엔 턱도 없었다. 하지만 수안은 몇 번이고 다시 발돋움을 했다.
벽에 부딪친 팔꿈치가 까지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져 옷이 흙투성이가 됐는데도 멈추지를 않았다.
어찌나 필사적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딜 갈 건데?”
“어디든. 괴물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어.”
“미친. 눈 뜨고 꿈꾸냐?”
“응. 꿈꾸는 중이야. 완전 절박하게. 그러니까 도와주지 않을 거면 잔말 말고 꺼져.”
그때 수안이 말대로 그냥 꺼져 버렸더라면, 이렇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 따윈 없었을까?
그랬더라면 우리 사이에 접점이 생기는 일은 없었을까?
“그랬나? 내가 그렇게 재수 없게 말했어? 근데 그때 얘기는 갑자기 왜…….”
“그 뒤로 여기서, 그리고 또 여기서 네가 떠나질 않았어.”
태경이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차례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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