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아무 문제 없었다
주총은 한 시간여 만에 큰 잡음 없이 무사히 끝났다.
박덕규를 위시한 몇몇 주주들의 반발이 있긴 했지만, 기껏해야 도훈의 나이에 대한 지적이 다였다.
그마저도 태성그룹의 청사진에 대한 도훈의 브리핑이 끝났을 시점에서 경험 부족으로 인한 위험성이니 하는 의견들은 모두의 머릿속에서 흐릿해져 버렸다.
도훈이 소유한 지분에 수안의 지분과 대성캐피탈 김 대표의 지지까지 더해지니, 박덕규의 뒷공작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번들거리는 눈초리를 이리저리 쏘아대던 덕규는 도훈의 차기 회장 선임 결의안이 통과되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하지만 그를 따라 자리를 벗어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의안에 동의하는 사람들만 남은 회의장에서는 이내 활기찬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에 답례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이는 도훈은 그야말로 후광을 뒤에 업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짤막한 감사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는 좌중을 압도할 만큼 진중하고 그윽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출중한 그를 눈에 담으며 지희는 어금니를 꼭 사리물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꽉 말아 쥔 손안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아픔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빛나고 있는 저 남자는 앞으로 더 번쩍번쩍 광이 날 터였다.
그 곁을 지키는 건 그녀가 되어야 했다.
누가 뭐라 해도 지희에겐 그만한 자격이 있었다.
평상시엔 나무토막이었다가, 자신이 정한 선을 넘는다 싶으면 시베리아 벌판이 되어버리는 남자 곁에 있기 위해 성질을 죽이고 애끓는 마음마저 죽였다.
그뿐인가.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삼시세끼 끼니 챙기듯 즐겼던 음주가무도 모두 끊고, 심심풀이로 만나던 남자들도 싹 다 정리하고, 코피를 줄줄 쏟아가며 공부에 매진했다.
타고난 외모와 요령 덕에 매사가 쉬웠던 지희에게 유일하게 어려웠던 게 도훈이었다.
도훈을 알게 된 뒤로 그녀의 20대는 온통 그의 뒷모습만으로 채워졌다.
동경이 사랑으로 변해 버리는 건 한순간이었고, 응답받지 못한 사랑이 집착으로 변하는 건 그보다 더 빨랐다.
그녀의 인생에서 차도훈을 빼고 나면 뭐가 남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차도훈을 가져야 했다.
수치심? 차도훈을 완전히 빼앗긴다면 그때 아마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지희의 양심이나 가치의 기준은 차도훈을 가지느냐 가지지 못하느냐, 오직 그것이면 족했다.
“사장님, 아니, 이제 회장님이라고 해야겠네요. 축하드려요.”
“취임 전이니까 그냥 사장님이라고 해. 축하받을 일 아니니까, 그것도 그냥 넣어두고.”
겨우 회의장에서 벗어난 도훈이 축하 인사를 건네는 지희를 지나쳐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갔다.
“그리고 이 시간 이후 스케줄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뭐지?”
“대성캐피탈 김 대표님과의 저녁 약속입니다.”
“그건 내가 이미 양해를 구했으니 됐고. 다른 건, 아니, 다른 것도 내일 처리하도록 하지.”
“사장님, 조금만 천천히…….”
종종거리며 따라붙는 지희는 안중에도 없는 듯, 도훈은 거의 뛰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속도로 사장실에 도착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수안아, 많이…….”
텅 빈 사무실에 멈칫했던 도훈이 간신히 도착해 숨을 몰아쉬는 지희를 휙 돌아봤다.
“어디 갔지?”
“지금 그걸 말하려던 참이었어요. 사실, 백수안을 부른 건 저였어요. 사장님이 놓고 온 서류가 있으니 가져다 달라고 거짓말을 했죠.”
“왜?”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해요.”
지희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도훈의 눈치를 살폈다.
책상에 걸터앉아 재킷 단추를 풀어내는 그에게선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도훈의 저런 표정을 좋아했다. 바람 따위에 일렁이지 않는 그저 잔잔한 바다와도 같은 그의 무표정.
세상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그 표정에 매료되었다가도, 저 표정이 자신만을 위해 감정을 담는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곤 했다.
나무토막 같은 그에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생각했기에 더 욕심이 나고 애가 달았다.
그런데, 며칠 전 외부 미팅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던 도중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집에 들렀다가 나온 날, 도훈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해 있었다.
살짝 상기된 귓불이라든가,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 같은, 다른 사람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변화를 그녀만은 캐치해 냈다.
무엇을 보고 나왔는지, 누구 때문에 그러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느꼈던 참담함과 배신감이 그녀의 마음을 날카롭게 몰아세웠다.
도훈의 그런 변화는 들인 노력으로 보나 시간으로 보나 그녀의 차지여야 맞았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거들먹거리기나 하는 애송이 계집애에게 돌아갈 몫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아와야지.
“사장님이 계속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 주총 전에 잠깐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이 그만 수안이, 사모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요.”
“그래서?”
“네? 아, 화가 나서 집에 그냥 가겠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정말 죄송해요.”
포악하게 벼려진 마음은 꼭꼭 숨긴 채 곱게 포장된 말들만 늘어놓고, 살짝 내려뜬 눈으로 묵묵히 걸터앉은 그를 훔쳐본다.
여전히 감정 없는 얼굴에서 날카로운 눈길만 빛을 발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제 스스로는 지극히 정당하다 결론을 내렸대도, 그리 예뻐 보일 것 같지 않은 속마음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눈길에 숨통이 조여올 즈음, 도훈이 걸터앉은 자리에서 툭 털고 일어났다.
“알았어. 이만 나가 봐. 아! 퇴근시간도 지났는데 바로 퇴근하지.”
별일 아니라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드는 도훈을 보며 지희는 잠깐 얼빠진 얼굴로 서 있었다.
“뭐 더 할 말 있어?”
“어, 아니…… 네, 있어요. 저, 이왕 주제넘은 김에 하나만 물어볼게요. 백수안 보모 노릇은 언제까지 할 거예요?”
도훈의 눈썹이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치솟았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표현이라는 걸 알았지만, 지희는 애써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선배가 어떤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지 몰라도, 거기에서 백수안은 빼셔야 할 거예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는 심정으로 당돌했던 그때처럼 은근슬쩍 호칭도 바꿨다.
“나는 솔직히 선배가 걱정돼요.”
“장 실장.”
나직한 음성이 짙게 깔렸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책상 위를 톡톡 쳐댔다. 경고의 뜻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진짜로 화가 난 도훈이 얼마나 냉해지는지 아는 지희로선 심장이 졸아드는 것 같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사적인 얘기는 다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정말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백수안은 선배를 이용하는 거라고요. 아까도 쓸데없이 불렀다고 어찌나 화를 내던지. 하아. 선배가 그걸 직접 봤어야 해요.”
“장 실장, 그만하지.”
“선배와 깊게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짓 꾸미지 말라고 하더군요. 이제 겨우 스무 살이니 그럴 만해요. 복잡한 일은 선배한테 맡겨놓고 아직은 인생을 즐기고 싶겠죠. 그러니까 선배도…….”
쾅!
책상을 내려치는 무지막지한 소리에 지희가 어깨를 흠칫 떨며 말을 멈췄다.
“정신 못 차려! 여기 사무실이야.”
“나, 나는 선배가 걱정돼서…….”
“나를 선배로 대하고 싶으면 사표부터 써. 그런 여지를 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자꾸 선을 넘지?”
냉정하고 시린 시선 속에 갇혀 지희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을 참느라 입술을 짓씹었다.
“정말 사표 낼 거 아니면 이만 퇴근해.”
단호한 축객령에도 미련이 남은 듯 머뭇대던 지희는 피로에 전 도훈의 눈이 이마를 짚은 손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문을 나섰다.
눈두덩이 화끈거렸다. 쪽잠을 자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요 며칠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대는 도훈에게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인문관의 계단을 앞에 두고 멈춰 선 수안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한숨을 토해냈다.
서른 개 남짓한 계단이 무너지고도 남을 수준이라, 곁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힐끔거리기까지 했다.
“야!”
“헉, 나, 나미야.”
“이건 뭐, 놀란 것도 아니고 안 놀란 것도 아니고, 반응이 뭐 이래. 혹시 어디 아파?”
나미가 어깨를 툭 쳤던 손으로 수안의 이마를 짚었다.
“어? 열은 없는데.”
“아프긴 무슨. 안 아파.”
나미의 손을 슬쩍 밀어낸 수안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세상 다 산 듯한 한숨을 내쉰 애치고는 한 계단 한 계단 꾹꾹 밟는 모양새가 제법 야무졌다.
“그럼 뭐, 걱정거리 있어?”
걱정거리? 그런 게 있을 리가.
No problem. 아무 문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