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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너는 뭐 달라? (45/88)

45. 너는 뭐 달라?

돌아서서 사장실을 나서는 그에게선 말랑한 감정 같은 건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지희를 향해 돌아서는 수안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안이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곧게 바라보자, 지희는 어이없게도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어, 음료수 좀 내올게요.”

“음료수는 됐고요, 왜 이런 일을 꾸민 거예요?”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수안은 자신의 손에서 완전히 구겨져 버린 서류봉투를 들어 보였다.

“아, 그거라면 실수였어요. 다른 서류와 착각했지 뭐예요. 안 그래도 올 필요 없다고 전화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미 출발했다고 하더군요.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다는 듯한 지희의 태도에 수안은 잠시 아연해졌다.

“총회가 곧 시작이라 사장님 서포트해야 해서 이만 나가 볼게요.”

“아저씨가, 차도훈이 탐나는 거죠?”

한두 발짝 뒷걸음치다가 획 돌아서서 사장실을 나서려던 지희가 수안의 물음에 그대로 멈춰 섰다.

“그래서 이런 유치한 짓을 한 거예요. 그렇죠?”

“그렇다고 하면 순순히 물러나 주기라도 하게?”

고개만 돌린 지희가 비아냥대듯 물어왔다.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되던 경어마저 사라진 말은 거의 시비조에 가까웠다.

화가 나야 맞는데, 꽤나 날카로운 지희의 모습에 수안은 도리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물러나 주면 차도훈 마음을 얻을 수는 있고요?”

자신조차 완벽하게 얻었다 장담하긴 힘들지만, 적어도 도훈의 마음이 지희에게 있지 않다는 건 알았다.

그의 마음이 이미 지희에게 있었다면, 이렇게 유치한 방법으로 자신을 꾀어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지희에게서 콧방귀를 동반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수안의 도발이 어이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조차도 제게 이런 되바라진 구석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는데, 당하는 입장에서야 어련할까.

“하! 그러는 넌. 너는 뭐 달라?”

치켜든 턱이며 내리깐 눈이 너라고 별다를 것 없지 않나 얕잡아 보는 듯했다.

도도하게 마주 보며 나는 다르다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도 어디에 있는지 확신이 없는데, 하물며 도훈의 마음이야 말해 무엇 할까.

솔직히 사랑 같은 거 아직 잘 모른다. 아니,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불합리한 것들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영 모르고 싶다.

도훈이 좋았다. 그가 남편인 게 나쁘지 않았다.

너무 지나치지도 않게, 너무 모자라지도 않게,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여 오래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함께하는 데 얼마만큼의 마음이 얹어져야 하는 걸까.

아니, 도훈의 마음은 얼마만큼 제게 와 있는 걸까?

“그건…….”

“나는 꽤 오랜 시간 사장님과 함께 일했어. 그럼에도 사장님은 내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는지 몰라. 너는 단숨에 눈치챈 그 감정을. 왜일 것 같니?”

경직된 목소리로 시작된 지희의 말은 수안을 향한 질문에 이르러 약간의 떨림이 섞였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어떤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수안은 그저 묵묵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너무 완벽하게 숨겨서? 아니. 보려고 하지 않으니까. 일 외엔 관심이 없으니까.”

지희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사장님은 누구보다 완벽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더없이 혹독한 사람이지. 사장님한텐 모든 게 의무고 책임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백수안도 마찬가지라는 소리야. 일이고 책임이지. 네가 회장님 손녀가 아니었어도 사장님이 신경 써줬을까? 너한테 막대한 지분이 없었어도 사장님이, 백기석 검사로부터 널 보호해 줬을까?”

내내 남의 얘기를 듣는 듯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던 수안의 표정이 백기석 이름 세 글자에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그 사람은 왜…….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들은 거죠?”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기석이라는 이름이 날카로운 송곳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을 움푹움푹 찔러댔다.

“누구한테 들었겠어?”

일그러진 수안의 얼굴을 살피며, 지희는 한쪽 입꼬리를 설핏 끌어 올렸다.

지희가 백기석 검사에 대해 듣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 점심을 거른 날이었다.

탕비실에서 두통약 한 알을 삼키고 탁자에 기대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을 때, 인기척이 들려오고 법무팀 이재식 팀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자현이 혼자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진단서만으로는 아무래도…….”

“접근금지가처분신청은 힘들다?”

“네. 수안 양의 진술 없이는 더 이상 밀어붙여 봐야 득보다 실이 큽니다. 아시다시피 백기석 검사가 만만한 상대도 아니고, 명예훼손에다 사장님이 수안 양을 억류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이것저것 걸고 들어오면 괜히 시끄러워지기만 할 겁니다.”

도훈과 재식의 나직한 대화는 잠시 더 이어지다가 뚝 끊겼다.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난 것으로 보아 사장실로 이동한 듯했다.

지희는 그러고도 한참을 탕비실에 숨어 그들의 대화를 되짚어보았다.

도훈이 그저 수안이 사고를 당했다고만 했던 일의 전말을 그제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걸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어찌 됐건 도훈에게 들은 건 맞으니까.

“왜, 아니, 뭘…….”

어설픈 합리화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누르고 나니, 내내 침착했던 수안이 혼란스러운 듯 말을 잘 잇지 못하는 걸 보는 기분이 꽤나 괜찮았다.

“사장님 일 중에 내가 모르는 건 없어. 결국 백수안도 사장님한테는 일이란 소리지.”

수안은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꾹 다물어 버렸다.

찡그렸던 얼굴은 한 번에 싹 지워낸 것처럼 무표정해졌다.

우기거나 칭얼댈 거라는 예상을 빗나간 것도 그렇지만, 감정을 지운 것 같은 그 표정이 어쩐지 도훈을 닮아 있어 지희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조금 더 흔들어보고 싶은 마음도 싹 가셔 버렸다.

“나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혼자 있을 수 있겠냐며 챙겨주는 것처럼 들리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어 지희는 뒷말을 얼버무리고 돌아섰다.

“장 실장님.”

수안의 부름에 멈춰 선 지희는 돌아보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스무 살, 그 또래들의 행동이야 뻔했다. 자신이 그맘때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철없음과 당돌함으로 무장하고 세상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화를 내고 투정을 부린다.

수안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투정을 부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뭐, 겁날 건 없는데, 투정을 받아주기엔 자신의 인내심이 그리 대단치가 않은지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짜증스러운 표정을 갈무리한 지희가 핑계를 댈 요량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돌아섰다.

“곧 총회 시작이라 정말 시간이 없는데 어쩌지?”

“장 실장님은 수치심도 모르고 기억력도 형편없네요.”

“무, 뭐?”

“유치한 방법으로 사람 마음을 어떻게 해볼 심산이었으면서 그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데다, 나한테 반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그새 잊었네요.”

“허!”

지희에게서 어이없는 헛웃음이 새 나왔다.

백수안이 마냥 만만한 애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것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장 실장님이 진짜 유능한 비서가 맞는지 의문이 드네요.”

이번에 말문이 막혀서 하릴없이 입술만 달싹이는 쪽은 지희였다.

게다가 금세 표정을 수습했던 수안과는 달리, 어정쩡하니 애송이 같은 표정을 쉽게 되돌리지도 못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지금 중요한 건 주주총회죠. 일밖에 모르는 사장님 생각해서라도 장 실장님도 부디 집중해 줬으면 좋겠네요.”

반박은 생각도 못 하도록 수안의 말은 차분하면서도 매서웠다.

“뭐 하세요? 얼른 가봐야죠.”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수안을 보고 있던 지희가 마지못해 돌아섰다.

“아, 그리고 아저씨가 신경 쓸 것 같아서요. 집에서 기다릴 테니 일 마치고 천천히 오랬다고 전해주겠어요?”

“그러죠, 사모님.”

잠시 머뭇대던 지희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지못해 씹어뱉듯 대답을 건넨 뒤 문을 나섰다.

등 뒤로 문을 닫는 지희의 손이 분노와 낭패감으로 인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힌 지희는 어깨까지 이른 수안의 떨림은 미처 알아채지도 못했다.

사장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수안은 바닥으로 스르륵 무너지고 말았다.

기석의 이름을 들을 때부터 울렁거리던 가슴은 이제 매스껍기까지 했다.

당혹스러움과 실망감, 분노를 감추기 위해 바짝 긴장해 있던 몸이 풀어지면서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얕은 수인 줄 알면서도 지희에게서 나온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서로 사랑으로 시작한 관계가 아니니, 도훈에게 그녀가 그저 일이라 해도 이해 못 할 건 없었다.

머리로 이해를 했으니 마음 시린 거야 대충 눌러 버리면 그만이다 싶으면서도 자꾸 무언가 울컥울컥 치솟아 목이 멨다.

몰랐던 사실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요 근래 그와 주고받았던 야릇한 감각들에 젖어,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단단히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게 분명했다.

혼란만 일으키고 이성을 상실케 하는 감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아마도 그건 도훈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니까 자꾸 이런 기분이 들면 안 되는 거였다.

뭘 어쩌고 싶은 건지도 모르면서, 지희가 그의 곁에 있는 게 싫었다.

그가 자신의 얘기를 지희와 공유하는 게 싫었다.

알맹이가 빠진 것 같은 그와의 관계가 정말 싫었다.

이런 비틀린 감정으로 도훈을 마주했다가는 하지 말아야 할 말들까지 줄줄이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자격이나 있는지 의문이었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수안이 쪼그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을 벗어났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사무실이지만 얼결에 한 번 둘러볼 만도 하건만, 애써 외면하듯 시선은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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