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질투
데스크의 여직원이 인터폰으로 자신이 방문했음을 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수안은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뜻밖이라 할 수밖에 없는 지희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나오느라 옷도 미처 갈아입지 못했다.
블라우스와 퀼로트 스커트 위에 걸쳐 입은 라인이 들어간 반코트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의 회사를 방문하는 아내의 모습으론 어딘가 좀 부족해 보였다.
뭐랄까, 좀 더 우아하고 위엄 있게 보이면 좋겠지만, 그런 건 옷차림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수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4시 30분.
현진이 바로 퇴근하지 않고 근처에 있었던 덕에 수안은 25분 만에 태성 본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주총회가 열리는 5시까지는 아직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한 20분, 아니, 10분 정도라도 도훈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입가가 절로 치솟았다.
‘이런 핑계 안 대도 되는데. 그냥 보고 싶다고 전화만 했어도…….’
수안이 가슴 앞으로 꼭 끌어안은 서류봉투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희에게서 도훈이 주주총회에 필요한 서류를 두고 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수안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도훈과 함께한 건 몇 개월에 불과했지만, 그가 상당히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아예 몰랐더라면 모를까, 도훈은 한 번 인지한 건 아주 사소한 거라도 잊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별것 아니라 스치듯 말한 것도 기억하고 있는 걸 몇 번 경험했던지라, 주총에 필요한 중요한 서류를 잊고 갔다는 지희의 말이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엊그제 도훈이 중요한 서류를 핑계로 집에 들렀다가 바로 나갔던 게 떠올라서 가타부타 답을 못 하고 수화기만 꼭 움켜잡았었다.
이번에도 그런 유의 핑계가 아닐까 싶어서 괜스레 가슴이 설레었었다.
그런 잠시의 침묵이 지희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혹시 시간이 안 되면 사람을 보내겠다는 사무적인 말이 덧붙여졌다.
주총에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할 것 같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면서.
수안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자신이 가지고 가겠다고 말했다.
급하게 챙겨 나오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서류봉투를 만지작거리던 수안이 봉투를 열어 몇 장 안 되는 서류를 들춰봤다.
사인이나 날인이 없는 서류를 확인하고는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얼마든지 다시 출력이 가능한 자료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보기 위한 핑곗거리라는 그녀의 짐작에 확신이 더해져서 가슴이 한층 더 두근댔다.
그의 거취 문제를 결정하게 될 주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도훈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저런 장면을 맞닥뜨리게 되리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수안이 38층에 있는 사장실에 도착했을 때, 유리문 너머 비서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가자, 문이 살짝 열린 안쪽 사무실에서 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업무적인 얘기를 하고 있다기엔 너무나 나긋한 음성에 수안은 저도 모르게 열린 문 앞으로 발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긴장하지 마세요. 잘될 거예요. 아, 그리고 잠깐만…….”
다정함이 느껴지는 지희의 말과 함께 지나치게 붙어선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안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문을 비스듬히 등지고 선 도훈의 어깨 너머로 매끈하게 정돈된 지희의 눈썹과 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짧은 순간 지희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수안이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잠시 머뭇대는 사이, 지희의 손이 도훈의 뺨을 다정하게 감쌀 것처럼 목 부근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주 느리게 느껴지는 건, 아마 그녀만의 착각일 터였다.
맞춘 듯 차려입은 비즈니스 정장이 두 사람을 연인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한 순간, 가슴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덜컥 내려앉았다.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뒤섞여서 머릿속은 도리어 멍했다.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건지, 그대로 돌아서서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잘못된 공간에 갇혀 버린 것만 같았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숨마저 멈췄다가 지희의 손을 툭 치듯 가로막는 도훈의 손짓에 정신을 차리고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냈다.
“뭐 하는 거야?”
살짝 경직된 것 같은 도훈의 목소리에 굳었던 수안의 몸이 조금 풀어졌다.
“타이 정돈 좀 할게요.”
“됐어. 얼굴 팔아 장사할 것도 아닌데. 긴장은 장 실장이 했나? 왜 안 하던…….”
“어머, 수안 씨.”
별안간 도훈의 말을 끊은 지희가 문틈 새로 보이는 수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나는 수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영락없이 훔쳐본 꼴이었다. 돌아보는 도훈의 미간이 짙게 일그러져 있었다.
수안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좀 전에 내려앉았던 가슴이 그의 표정에 상처받아 온통 따끔따끔했다.
여기로 오는 동안 도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고 또 상상했지만, 그 상상들 중에 저런 표정은 없었다.
“무슨 일로…… 아! 주주총회 때문에 걱정돼서 왔나 보네요. 그럼 들어오지 않고 왜…….”
참혹한 기분에 사로잡혀 수안이 머뭇대고 있는 사이, 지희가 문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수안의 입에서 작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의문이라는 듯 꾸며낸 지희의 가증스러운 표정에 기가 막힌 수안은 도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의식중에 양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던 서류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도훈의 핑곗거리가 아니라, 지희를 위한 용도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 버렸다.
지희가 자신에게 뭘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 몰라도, 가슴을 헤집어놓을 목적이었다면 성공이었다.
표출하기보다 억누르는 게 더 익숙했던 분노가 스멀스멀 비집고 올라왔다.
네가 이 서류를 가져오라지 않았느냐, 지희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꼭 저 여자를 비서실장으로 써야겠느냐, 도훈에게 투정이라도 부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중 무엇도 할 수 없었다.
행여나 유치해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건 차후 문제였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 도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웃는 것까지는 무리겠지만 심상한 표정 정도는 얼추 가능하겠다 싶은 순간 고개를 들었다.
“허억!”
“뭐야, 왜 놀라?”
도훈이 열어젖힌 문을 잡고 그녀의 코앞에 서 있었다.
지희를 먼저 마주하게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압도적인 체격의 그와 맞닥뜨리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언제 여기까지 왔어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가, 갑자기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보다 더 놀랐을 것 같진 않네. 더 가까워져도 이젠 안 놀라볼 테니까, 들어와.”
도훈이 고갯짓을 하며 수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장 실장, 10분 정도 괜찮을까?”
하릴없이 끌려간 수안이 의미가 모호한 도훈의 말을 곱씹는 사이, 그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미간을 접었다.
질문에 답해야 할 지희에게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장 실장?”
“네? 아, 대성캐피탈 김운철 대표님이 소회의실에서 자료 확인 중이십니다. 총회 들어가기 전에 인사 나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바로…….”
“자료 확인하는 중인데 인사가 왜 필요해. 돈 냄새라면 귀신같이 맡는 사람이니 그거면 충분하겠지. 따로 아부할 필요 없잖아.”
“이번 총회가 아니더라도 김 대표님과 친분을 공고히 해두는 게 좋습니다.”
“박덕규 회장한테 괜히 협잡질했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친분 쌓기는 총회 끝난 뒤로 미루는 게 낫겠어. 그러니까 10분, 아니, 5분만.”
지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장님, 이번 주주총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잖아요.”
“장 실장, 대체 뭐가 문제야?”
내내 수안을 좇고 있던 도훈의 시선이 지희에게로 옮겨갔다.
방향을 튼 도훈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절박함마저 느껴지던 지희의 표정이 서서히 평정을 찾아가는 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지희가 뭘 의도했건 도훈의 반응은 그녀가 원했던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의도에 놀아난 게 억울해서라도 통쾌해야 맞는데, 수안은 어쩐지 조금 울적해졌다.
왜, 어째서, 그의 아내라는 자신의 위치보다 비서실장이라는 지희의 위치가 더 공고해 보이는 걸까.
도훈과 지희가 공유한, 수안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세계가 못내 탐이 났다. 날카로운 질투심이 폐부를 찔러댔다.
5분이 아니라 그의 모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저씨?”
얕은 한숨을 토해낸 수안은 도훈을 불러 사무실에 감도는 뭉근한 긴장감을 흩어놓았다.
“어서 가보세요.”
“잠깐은 괜찮아.”
“총회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래도 괜찮다면.”
“괜찮지. 근데, 좀 늦어질 수도 있어.”
“나도 괜찮아요.”
“그래, 좋아. 근데 너, 뭘 들고 있는 거야?”
멈칫대며 수안의 손목을 놓아준 도훈이 반대편 손에서 처참하게 구겨지고 있는 서류봉투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이건 음, 장 실장님 거예요. 그렇죠?”
수안의 물음에 지희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치솟았다.
“나는 이거 장 실장님 보여주고 기다릴 거니까, 아저씬 얼른 가세요, 얼른.”
수안이 커다란 도훈의 몸을 돌려세워 등을 떠밀었다.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어 보인 도훈이 책상에서 태블릿을 챙겨 사무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장 실장은 수안이 마실 것 좀 챙겨주고 천천히 와. 되도록 빨리 끝내볼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말썽꾸러기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에 수안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대답을 기다리는 도훈에게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안이 만들어내는 표정에 한쪽 눈을 찡그려 보인 도훈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그리듯 쓸어내렸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
손가락 끝에 덧그려진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쉬움과 격렬함이 뒤섞인 것 같은 그의 눈빛 때문에 격한 포옹이나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설레었다.
수안도 덩달아 아쉬움에 사로잡혀 그의 재킷 끝자락이 됐든 소매 끝자락이 됐든 어디라도 붙잡고 싶어졌다.
서로를 향해 진득하게 붙어 있던 시선을 먼저 걷어낸 건 도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