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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덧그려지는 기억, 그리움 (43/88)

43. 덧그려지는 기억, 그리움

수안이 위압적인 대문 앞에 다다르자, 멀찍이서 느릿느릿 따라오던 차가 멈춰 섰다.

내려간 차창 사이로 현진이 얼굴을 쏙 내밀며 어서 들어가라 손짓했다.

그녀가 버스를 타는 순간 퇴근했으리라 생각한 현진 일행은 줄곧 미행을 하듯 수안을 따라붙었다.

저렇게 번거롭게 만들 줄 알았으면 그냥 차를 타고 오는 건데 하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들었다.

오전 강의만 있는 날이었다. 원래라면 점심식사 후 태경과 함께 복싱동아리에 있었을 터였다.

바득바득 우겨서 가입해 놓고는 무진장 창피한 일이었지만, 사실 태경이 없인 복싱동아리 근처에도 못 갔다.

낯선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홀로 이방인처럼 끼어 있을 용기도 없었던 데다, 자신조차도 미처 몰랐는데 수안은 주먹질을 보는 게 영 힘들었다.

복싱동아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학생 회원에 흥분한 선배들이 자랑삼아 선보인 스파링 장면을 보는 동안, 수안은 태경의 팔을 아플 정도로 움켜쥔 채 벌벌 떨었다.

주먹질이 오갈 때마다 절로 눈이 질끈 감겼고, 사정없이 말아 쥔 손에는 진득하니 땀이 고였다.

그게 폭력이 아니라 스포츠임을 이성적으로는 인식했지만, 그 장면 위로 다른 장면들이 겹쳐지는 데는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간신히 버티다가 완전히 새파랗게 질려서 체육관을 벗어났다.

그 뒤로 이어진 태경의 잔소리는 끔찍할 정도였다.

복싱동아리는 그때 당장 때려치웠어야 옳았지만, 순간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이 정도도 참아내지 못하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기석에 대한 두려움을 영영 떨쳐 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염치없지만, 딱 한 달만 다녀보자고 태경에게 사정을 했다.

험한 말로 투덜대긴 했지만, 태경은 언제나처럼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태경이 나흘째 등교를 하지 않고 있었다. 전화는 아예 받지도 않았고, 문자도 톡도 모두 씹혔다.

게다가 나미마저 무언가 아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전에 없이 우울해하며 말을 아꼈다.

도훈이 학교에 왔던 날, 태경과 나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태경의 집에 가보자는 그녀의 제안을 나미가 딱 잘라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태경이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며 어찌나 단호하게 잘라내는지, 수안은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일까지 태경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녀 혼자라도 그의 집에 가볼 참이었다.

나름 결심을 굳히며, 서서히 열리는 묵직한 문틈 새로 들어서던 수안은 문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기석에 대한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 때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돌이켜보자면 그들 사이에 갈등이 전혀 없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그런 갈등들을 깊게 인식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친구들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석의 일 외에는 어디에도 깊게 마음을 쏟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수안의 생각과는 달리 이 회장은 모녀에게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평생 사업가로 살아온 이 회장은 그 세월만큼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석은 누군가의 약점을 이용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회장은 모녀에게서 백기석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니 수안은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도 기석이 위협적인 존재인 건 여전했지만, 수안은 그전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았다.

언뜻언뜻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경호원들이 아니라면, 기석의 존재를 완전히 잊을 때도 있었다.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그녀로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런 변화는 모두 차도훈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몇 개월, 차도훈은 너무도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해 버렸다.

문득문득 겁이 났다. 이렇게 믿어버려도 되는 걸까. 이렇게 많이 내줘 버려도 되는 걸까.

그런 의문들이 그녀를 못내 불안하게 했다.

한숨을 토해내며 정원을 터벅터벅 가로지르던 수안은 불현듯 멈춰 서 꼭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시선을 던졌다.

사그라들기 시작한 햇살이 깃든 정원 위로 겹쳐지는 장면에 하릴없이 또 맘이 설레었다.

이렇게 불쑥불쑥 떠올라 버리면, 이제는 정원도 마음 놓고 못 지나갈 듯했다.

특별할 것 없는 장소에 기억 하나가 덧그려지자, 햇살 내린 정원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고, 덩그러니 놓인 벤치엔 편안한 복장을 한 그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감쌌던 단단한 손의 온기와 마치 듣기 좋은 음악처럼 퍼져 나가던 그의 웃음소리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선연하게 떠올랐다.

정작 집중해서 쳐다봤던 영화는 도무지 기억나는 게 없는데, 고작 20분 남짓 가볍게 바람을 쐬며 정원을 어슬렁거렸던 그 순간의 기억은 너무도 짙었다.

자꾸 떠올리고 싶은, 자꾸 떠올리게 되는 그런 기억이 생겨 버렸다.

매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벤치가 별안간 특별해지고, 제시간만 되면 꼬박꼬박 불을 밝히던 전등이 갑자기 그리움이 되는 건 도무지 무슨 조화 속인지 알 길이 없었다.

도훈과 진짜 부부가 되리라는 자신의 의지에 너무 심취했기 때문일까?

정확히 무어라 딱 꼬집을 순 없었지만, 그를 생각할 때의 마음이 예전과 달라졌다. 아니, 다른 걸 떠나 그에 대한 생각을 너무 자주 했다.

얄궂은 남편께선 한집에 살면서도 제대로 얼굴 보여주는 일이 드물어, 그녀의 이런 마음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주주총회 때문에 눈코 뜰 새 없다는 건 알지만, 나흘 동안 5분 정도 마주한 게 다면 해도 너무한 거였다.

그 5분을 위해 자신이 기울였던 노력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고도 남았다.

새벽이 올 때까지 졸음을 참으며 기다려 보기도 했고, 새벽에 일어나 졸음을 쫓으며 그의 방문을 두드려 보기도 했다.

도대체 언제 나가고 들어오는지, 집에 들어오기는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 일은 혼자 다 하나 보다, 정말 해도 너무한다, 원망이 새록새록 샘솟을 즈음, 도훈은 도깨비처럼 나타나 그녀를 놀라게 했다.

하필이면 머리도 안 감고 늘어져 있는데 불쑥 들어와서, 잊고 갔다는 중요한 서류는 챙길 생각도 않고 그녀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비싼 남편 얼굴 한 번 보자고 그렇게 애를 태워놓고는, 너무 갑작스레 맞닥뜨린 것에 놀란 수안은 얼굴을 붉힌 채 입만 벙긋댔다.

자그마한 흠이라도 찾아낼 듯 너무 빤히 쳐다보니 수안은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마 이혼 직전의 부부도 그보단 덜 어색했을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 시선을 슬그머니 비끼는데, 갑자기 시커먼 것이 눈앞으로 와락 다가왔다.

대충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가슴에 안긴 상태였다.

오직 그게 목적이었던 것처럼, 그는 수안을 품 안에 가둔 채 나른한 숨결을 토해냈다.

도훈은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기 시작할 때에야 그녀를 마지못해 놓아주고 집을 나섰다.

“치,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누가 뭐라 하나. 괜히 서류 핑계는…….”

“안 들어오고 뭘 그렇게 중얼대고 섰어?”

“허억. 아줌마, 갑자기 말 시키면 어떡해요? 놀랐잖아요.”

“하이고,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이제 대학생 됐다고 말도 허락받고 시키랴?”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힌 경원 아줌마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그녀를 꼬나봤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수안이 재빨리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입술 양끝을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정도 많고 눈물도 많지만, 잔소리도 남부럽지 않게 많아서 불같은 성미의 이 회장도 이겨먹었던 양반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잔소리가 싫거나 무서운 건 아니고, 행여나 미움받을까 그게 겁날 뿐이었다.

천하의 이 회장도 분노로 떨기만 하고 어찌하지 못했던 백기석에게 찬물과 소금 세례를 대차게 안겨 쫓아냈던 여장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냉큼 경원 아줌마 곁으로 다가간 수안은 생긋 미소를 머금으며 팔짱을 꼈다.

“에이, 놀라서 그랬죠, 놀라서. 우리 집 대장님이신데, 무슨 허락이건 제가 받아야죠. 헤헤.”

“종일 집만 지키고 있는데 대장은 무슨 대장? 집주인들은 얼굴 한 번 마주치기도 힘든 데다, 도대체가 뭘 먹고 사는지 음식을 해놔야 생전 줄지도 않으니 원. 오죽했으면 내가 청소도우미들 모아놓고 잔치를 벌였을까.”

“누구라도 맛나게 먹었으면 된 거죠 뭐.”

“뭐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어?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요?”

막 시작되려는 경원 아줌마의 폭풍 잔소리를 끊은 수안이 집 안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거 전화 소리 아니에요?”

“그런 거 같구나.”

경원 아줌마의 목소리는 미처 하지 못한 잔소리 때문에 영 떨떠름했지만, 수안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전화 받는다는 핑계를 대며 냉큼 집 안으로 내달렸다.

“여보세요?”

제법 활기차게 전화를 받았던 수안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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