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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왜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해 (42/88)

42. 왜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해

놀란 수안이 다시 물러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뜨끈하게 얽힌 손이 그녀를 조금 더 끌어당겼다.

“너는, 도대체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입술을 꽉 깨물고 숨마저 멈췄던 수안이 뜻 모를 말에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짙게 일그러진 미간 옆으로 자리한 날카로운 눈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고 있었다.

열기에 휩싸여 이글거리는 눈은 화가 난 건지, 아닌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데도 숨이 찼다.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기가 버거우면서도, 보이지 않는 줄에라도 매인 것처럼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겁도 없이, 대체 어디까지 흔들어댈 셈이야.”

씹어뱉듯 흘러나온 말에 수안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젠장,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미, 미안해요. 귀찮게 하려던 건…….”

그에게서 좀체 듣기 힘든 거친 말에 움츠러든 수안이 주섬주섬 사과의 말을 늘어놓는데, 갑자기 입술 위로 따끈하면서 부드러운 것이 와 닿았다.

닿았던 것은 착각이었나 싶을 만큼 금세 떨어졌다.

분명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 도훈이 갑자기 입맞춤을 해온 것에 당황한 수안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두려움 같은 설렘, 설렘 같은 두려움이 마음속에서 멋대로 얽혔다.

“귀찮은 거면 차라리 낫겠어.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로운 듯 중얼거린 도훈이 시야를 가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짙게 일그러진 미간은 화가 났다기보다 곤란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백수안, 나는 남자야.”

뜬금없는 정체성 선언에 동그랗게 뜬 눈을 몇 차례 깜빡거린 수안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으음, 네, 알고 있어요.”

조그맣게 중얼거린 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린 도훈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아니, 너는 몰라.”

수안은 또 애 취급인가 싶어서 짜증이 왈칵 치솟았다.

움츠렸던 순간이 있었나 싶게 어깨를 펴고 고개를 쳐든 그녀가 울컥한 속마음을 숨길 생각도 없이 되바라지게 물었다.

“내가 뭘 모르는데요? 아니, 뭘 알아야 하는 건데요?”

격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할 듯 벙긋대던 도훈의 표정이 한순간 서서히 굳어졌다.

그의 놀라운 자제심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하아! 관두자.”

도훈은 경직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마치 지루한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른한 한숨을 뱉어냈다.

냉정한 표정 뒤에 자신을 완벽하게 숨긴 도훈은 영락없이 떼쓰는 아이를 보는 듯한 어른의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한발 물러서는 것 같은 그의 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이대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는 게 분명했다.

물 한 컵 들이켜는 것처럼 아주 쉽게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그가 놀라우면서도 신물이 날 정도로 짜증이 일었다.

“뭘 관두자는 건데요?”

도대체 뭐 한 게 있다고 관두자는 말을 하는 거냐 마구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수안은 애써 꾹꾹 눌러 참았다.

그가 그러듯 그녀도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이성적이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봐야 그의 눈에 성숙한 여자로 보이진 않겠지만, 최소한 어린애가 떼쓰는 것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너하고 말장난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이만 나가.”

“나도 아저씨랑 말장난하고 싶은 생각 눈곱만치도 없거든요.”

수안이 앙큼하게 눈을 일그러뜨리며 보란 듯이 팔짱을 꼈다.

“아리송한 말만 줄줄이 늘어놓고 관두자고 하면 다예요? 배 좀 만진 게 그렇게 기분 나빠요? 그냥 살짝 닿는 것도 싫으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 되지, 쥐뿔도 모르는 애 취급하면서 왜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 건데. 진짜 부부는 개뿔. 만지는 것도 싫은.”

“백수안 그만!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왜요? 내 입 가지고 마음대로 말도 못, 읍.”

갑자기 뒷덜미가 커다란 손에 감싸임과 동시에 삼켜지듯 입술이 겹쳐졌다.

그리고 어찌해 볼 겨를도 없이 뜨거운 살덩이가 입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가느다란 허리로 굵직한 팔이 둘러지고 맵차게 당겨졌다. 단단한 몸이 적나라하게 맞닿았다.

익숙하다고까지 할 순 없지만 처음도 아닌데, 꼭 처음인 것처럼 당혹스러울 정도로 그의 키스가 낯설었다.

이전의 키스가 얼마나 부드럽고 친절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될 정도로 그는 거칠게 입술을 부비고 혀를 얽고 입안을 헤집었다.

분명 싸우고 있었는데, 아니, 싸움까진 아니래도 분명 화가 나 있었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당황한 나머지 크게 떠진 수안의 눈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시각을 빼앗기고 나니 다른 감각들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해져서 거친 행보를 멈추지 않는 혀의 움직임이 그녀를 고스란히 잠식했다.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찼다. 허방을 디딘 것 같은 부유감에 아찔함을 느낀 수안이 버둥대다가 엉겁결에 그의 허리를 감쌌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기나 한 건지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대로 집어삼켜져 버리는 건 아닌지 겁이 날 즈음, 단단히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고 거친 숨결이 흩뿌려졌다.

“하아, 왜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해.”

긁는 듯한 쇳소리가 섞인 도훈의 목소리가 짧은 입맞춤 사이사이를 채웠다.

“간신히 참고 있는데, 왜 자꾸, 하아.”

도훈의 손에 의해 가려졌던 눈이 놓여났지만, 수안은 눈을 뜰 수도 무어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감당 못 하겠는 거친 숨만 색색 몰아쉬었다.

“이 정도도 감당 못 하면서 관두자고 할 때 말을 들었어야지.”

질책에 가까운 말에 수안의 눈꺼풀이 들리려 하자, 또다시 온기를 품은 손이 눈 위로 내려앉았다.

“눈 뜨지 마라. 너 때문에 지금 내가 엉망이야.”

“어, 엉망이라니. 혹시 수, 수, 수건이 벗겨진 거예요?”

상상할 수 있는 건 그거 하나라 수안은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더듬대며 물을 수밖에 없었다.

멈칫거리며 손이 치워지고 잠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안의 눈은 치워진 손과는 상관없이 아주 질끈 감겨 있었다.

“훗, 흐흐, 흠흠, 풋, 하하하.”

새어 나오는 걸 참으려는 듯 숨죽여 이어지던 도훈의 웃음이 끝내 빵 터지고 말았다.

수안이 감은 눈을 뜨지도 못하고 미간을 짙게 일그러뜨렸다.

“하하하, 진짜 미치겠다.”

그녀의 머리가 격하게 당겨져 웃음으로 들썩이는 가슴에 폭 감싸여졌다.

웅웅대는 웃음소리와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마구 뒤섞여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

수안은 그렇게 더없이 요란스러운 소리들에 파묻혀 더없이 안온함을 느끼는 이상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혀 버렸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웃음 끝에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수안은 이 긴밀한 접촉이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그의 한숨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천천히 좀 가자. 이제 겨우 걸음마 뗐는데 뛰자고 부추기는 건 좀 아니지.”

뜻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말에 수안이 슬그머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내가, 부추기긴 했어요?”

“참기 힘들 정도로.”

“그러니까 그게 나를 으음, 여자로 느낀다는 소리예요?”

“내가 남자라는 사실 만큼이나 분명하게.”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도훈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치솟았다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얕은 한숨과 함께 수안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서 조금 떼어놓았다.

“자제심 하난 자신했었는데 말이야, 내가 너무 과신한 걸까? 아니면, 네가 문제인 걸까?”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수안은 눈동자만 또르르 굴렸다.

도훈도 딱히 답을 들으려던 건 아니었던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고는 한 발짝 더 물러났다.

그러자 화살을 튕겨내기 직전의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자리 잡고 있던 긴장감이 조금 와해됐다.

어느 화보에서나 봄직한 그의 미소까지 설핏 얹어지니 분위기는 한층 가벼워졌다.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는데, 영화나 볼까?”

깊지 않게 건넨 말에 수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럼 나는 영화 고르고 있을게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섹시 화보에서 쑥 빠져나온 것 같은 도훈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의 방을 벗어났다.

따지려고 한 말은 미처 꺼내보지도 못했는데, 뭔가 많은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아니, 엄청난 말을 들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책없이 두근대는 가슴이 반라의 도훈을 본 것 때문인지, 꽤 농후했던 그의 말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와의 키스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어찌 됐건 천천히 가보자 했으니, 어딜 가도 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복도를 걷는 수안의 입가가 자꾸 저도 모르게 실룩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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