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만져도 돼요?
아니, 솔직히 뭘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게 뭐가 됐건, 도훈에게 부담을 주고 구걸하듯 얻고 싶진 않았다.
“흠흠, 아무래도 영화는 담에 보는 게 좋겠어요. 오늘 풀강이었거든요. 게다가 나미 때문에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정말 피곤한 거 있죠.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어요.”
구차하지만 자존심을 챙기는 쪽을 택하며 도훈이 조금이라도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도훈의 표정엔 아쉬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참 무심한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는데도 이상하게 숨이 차올랐다. 가슴 한쪽이 아릿하게 시려왔다.
마음을 배신한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두려움과도 닮아 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이 도대체 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그의 얼굴은 미치도록 근사했다.
자신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도훈에 반해, 수안은 이런 순간에도 그의 남성적인 매력에 설레는 제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고 짜증 났다.
“그럼 먼저 올라갈게요.”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수안은 도망치듯 주차장을 벗어나 제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해 등 뒤로 문을 닫자마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한순간에 축 처졌다.
터덜터덜 걸어가며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겉옷을 벗어버리고는 침대로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맛있게 먹은 저녁이 뒤늦게 얹히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잠시 이리저리 뒤채던 수안은 벌떡 일어나 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그렇게 나랑 둘이 있는 게 싫으면서 그런 소리는 왜 한 건데?”
지난 주말 무릎을 꿇고 반지를 끼워주며 했던 다정한 그의 말들을 되새김질하며 수안은 신경질적으로 침대를 내려쳤다.
“내가 데이트하자고 했어? 자기가 먼저 그랬잖아. 그래 놓고…….”
침대에서 일어난 수안이 짜증스레 방 안을 서성였다.
도훈과 뭘 하고 싶은 건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도 못하면서, 자꾸 거리를 두려는 그 때문에 속상했다.
“내가 잘할게.”
그건 그저 부부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그런 의미였을까?
그럼 키스 같은 건 아예 하지 말았어야지.
뭔가를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나랑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것처럼 그러면 어쩌라는 거야.
나이가 어린 게 내 잘못이야?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데 어쩌라고?
울분에 휩싸여 서성이던 수안이 거울 앞을 지나치려다 우뚝 멈춰 섰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여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섹시 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어린애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쯤 되면 그의 마음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이 차 때문에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 꺼려 하는 건지.
계속 들썩였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조급해졌다.
당장 물어봐야 했다. 아니, 제대로 따지고 싶었다.
그녀를 설레게 했던 그 모든 말과 행동에 진정한 마음이 있기는 했는지 알고 싶었다.
앞뒤 잴 것 없이 아래층으로 내달린 수안은 도훈의 방 앞에서 노크도 하는 둥 마는 둥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저씨, 흡.”
수안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양손으로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훈이 수건으로 머리를 닦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움직이지 못하는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채 꼼짝을 못 했다.
“눈을 가리는 게 맞는 거 아닌가?”
허리에 수건 한 장만 달랑 걸친 도훈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혀 당황하지 않은 것 같은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팽팽한 가슴팍을 지나, 지방을 모조리 깎아낸 것 같은 늘씬하고 탄탄한 복부를 훑고는 허리에 걸쳐진 수건으로 쏙 스며드는 걸 멍한 눈길로 좇고 있던 수안이 입에서 손을 떼어내 눈으로 옮겼다.
“배, 배, 배가 하나도 안 나왔네요. 원래 아저씨들은 배도 나오고 가슴도 축 늘어.”
“하아, 그냥 입을 가리는 게 낫겠다.”
나직하게 깔리는 도훈의 말에 수안이 눈에서 슬그머니 손을 떼어내 입으로 가져가려다 그대로 축 늘어뜨렸다.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고 도훈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도 침착해 보이는 그가 너무 얄미웠다.
“왜, 왜 나만 가려요? 아저씨가 가리면 되잖아요.”
얼굴은 말도 못 하게 붉어지고, 숨결은 거슬릴 정도로 쌕쌕거리면서 수안은 원망스러운 말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본능에 충실한 눈은 잔 근육이 촘촘하게 박힌 도훈의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말이다.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겠지만, 옷 좀 입게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아! 음, 네, 지금 막 나가려고 했어요.”
도훈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거리던 수안이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허둥지둥 돌아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내 방을 나설 줄 알았던 수안은 문을 마주하고 선 채 머뭇대다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문고리를 붙든 자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속에서 울분이 왈칵 치솟았다.
벗고 있는 사람은 침착하기 그지없는데, 자신만 당황하고 설레고 진땀까지 빼며 벌벌 떠는 꼴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저에게서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대도 그렇지, 저런 자태로 사람을 맞닥뜨렸으면 당황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도훈에겐 아무래도 이런 건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한 게 분명했다.
어쩌면 뉴욕에서 상당히 자유분방하게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변에 지희 같은 여자들이 수두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짜증이 확 솟구쳤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강아지처럼 내빼고 싶지 않았다.
결심을 굳힌 수안이 비장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목에다 수건을 걸친 채 수안이 나가기만 기다리고 있던 도훈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안 나갈 거야?”
수건이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긋고 있는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린 도훈이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물기를 머금은 채 흐트러진 머리 때문에 지나치게 섹시해 보이는 얼굴에 머물러 있던 수안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허리 부근으로 흘렀다.
수안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다.
반라의 남자를 실제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마주한 것만으로도 아득할 지경인데, 도훈의 몸은 지나치게 고퀄이기까지 했다.
완벽한 조각품이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도훈을 조금이라도 흔들어보리라 결심했던 마음은 아득한 정신 저 너머로 이미 훌쩍 날아가 버린 뒤였다.
선명하게 선이 그어진 복근과 미끈한 허리, 힘 있게 도드라진 장골에 시선을 빼앗긴 수안은 그의 가슴이 조금 전부터 심하게 들썩거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안 나갈 거냐고 묻잖아, 백수안.”
살짝 잠긴 것 같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수안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제야 흠칫 정신을 차린 수안이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고 있었다.
“네.”
“뭐?”
“어, 그러니까 물어볼 게 있어서요.”
“하아, 거실에 가 있어. 옷만 입고 바로…….”
“아니, 지금 물어볼 거예요. 여기서.”
그가 미간을 한층 더 일그러뜨리며 불만스레 팔짱을 꼈다. 탄탄한 가슴 앞을 가로지른 팔뚝에 힘줄이 불거졌다.
절제된 슈트에 가려져 있던 남성미가 이래저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엄습하는 긴장감에 다시 한번 침을 꼴딱 삼킨 수안이 자신을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는 도훈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돼요?”
“뭐? 안 들리잖아. 제대로.”
“만져 봐도 되냐고요.”
“뭐, 뭘?”
적잖이 당황한 듯 도훈이 말을 더듬었다.
“그, 흠흠, 우리는 부부고, 앞으로 잘해보기로 했고,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띄엄띄엄 늘어놓는 수안의 말에 도훈이 조급하게 다그쳤다.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벙긋대던 수안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러고는 도훈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을 질끈 감고 쫙 펼친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매끈하면서도 탄탄한 근육이 손바닥에 닿았다. 제가 가져다 대놓고도 놀란 수안이 움찔거리며 떼었다가 다시 살그머니 내리눌렀다.
“여, 여기 만져도 되냐고요.”
그의 복근이 손바닥 아래에서 더욱 딱딱하게 경직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안이 눈도 뜨지 못하고 도훈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어라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말은커녕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마음대로 만졌다고 화가 나서 그러는 걸까?
너무 맹랑한 짓을 저질러 버렸다는 자각이 뒤늦게 찾아왔다.
난생처음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 어떤 상황을 초래하게 될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기석과 도훈이 절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수안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두려움은 이성적인 판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멈칫거리며 손을 떼어낸 수안이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차마 도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아래로 향한 그녀의 시선에 옆으로 내려져 꽉 움켜쥔 그의 주먹이 보였다.
수안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나, 나는 그저, 헉.”
도훈이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만큼 다가섰다. 그러곤 수안의 손을 덥석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