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부부의 특권
“하하, 놀라게 했나 보네요. 다담의 사장이자 메인 셰프인 조인택입니다. 아무쪼록 제 요리는 취향에 맞았으면 좋겠군요.”
먹어 없애기엔 아까울 정도로 예쁜 음식이 담긴 접시 두 개를 우아한 동작으로 내려놓은 인택이 수안을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낯선 이의 등장에 수안은 어깨를 움츠렸다.
본의 아니게 뒷담화를 한 꼴이 되어버린 터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 그, 기분 상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해요. 제 취향은 아니지만, 정말 아름답고 멋진 곳이에요. 사장님 안목이 높으시네요.”
“와우, 꽃다운 미인한테 칭찬을 들으니 가슴이 마구 설레는데요.”
한껏 허리를 숙인 인택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오뚝한 콧날과 깨끗한 피부가 인상적인 그는 귀티가 흐르는 미남이었다.
하지만 매끄럽게 흘러나온 느끼한 멘트 때문인지, 수안은 온화한 표정을 띠는 그의 얼굴이 조금 느글느글하다고 느꼈다.
“간만에 연락해서는 밥이나 차려내라기에 이걸 죽여 살려 한껏 벼르고 있었는데, 이런 즐거움을 선사해 주니 제대로 실력 발휘 좀 해봐야겠네요. 그래, 우리 아가씨는 뭘 제일 좋아하나?”
아, 역시 느끼해.
아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생글거리며 바짝 얼굴을 들이대는 인택 때문에 수안은 얼굴을 뒤로 물리며 어정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 두 분 아는 사이예요?”
“뉴욕에 있을 때 내가 이 친구의 끼니를 책임졌었죠.”
수안의 시선이 도훈에게로 옮겨갔다.
친구가 운영하는 데라고 진작 말해주지 않은 것이 얄미워 수안의 입술이 살짝 삐죽이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도훈은 간만에 만난 친구에겐 관심조차 없는 듯, 무감한 표정으로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을 받은 그는 새삼 반하고도 남을 만큼 근사해 보였다.
“꽤나 오래 붙어 있었는데 워낙 과묵한 녀석이라 속을 모르겠더니, 오늘에서야 살짝 훔쳐보는 기분이네요. 하하, 근엄한 수도승처럼 생겨먹어서 외모 같은 건 신경도 안 쓸 줄 알았는데, 이건 뭐, 예쁜 데다 어리기까지…….”
“언제까지 떠들고 있을 거야?”
날카로운 도훈의 음성이 인택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향한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냉랭한 말투에 수안은 괜히 인택의 눈치를 살폈다.
“하하, 나도 무진장 반갑다, 친구.”
하지만 인택은 도훈의 그런 태도가 익숙하기라도 한 듯, 전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호쾌하게 웃어 보였다.
“아, 이런! 내 정신 좀 봐. 우리 아름다운 아가씨 이름도 못 물어봤네요.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역시 너무 너무 느끼했다. 식용유를 통째 기울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떨쳐 낸 수안이 또다시 어정쩡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수안이라고 해요.”
“이야! 이름도 얼굴만큼 예쁘네요. 가만있자, 수안 씨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수안아?”
“조인택.”
조금 전부터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쳐대고 있던 도훈이 나직하고 부드럽게 인택을 불렀다.
“그냥 부르지 마.”
으르렁대듯 흘러나온 말에 수안도 인택도 벙해서 도훈을 쳐다봤다.
“야 씨, 무슨 농담을 그렇게 살벌하게…….”
“농담처럼 들렸나?”
치솟았다가 내려앉는 눈매가 어찌나 매서운지 절대로 농담을 하는 거라곤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원래도 착하게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저렇게 싸늘한 건 또 처음이라, 수안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두 사람을 살폈다.
혹시나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실상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닌가 보다 하는 결론을 굳혀갈 즈음 인택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살짝 겁먹은 수안의 시선이 따라 올라갔다.
“도둑놈.”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인택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뜬금없는 소리에 수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소유 차도훈 선생 어디 갔어? 와아!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이름까지 독점을 하려고 들어?”
어이없다는 듯 흘러나온 인택의 투덜거림에 도훈의 입가가 설핏 치솟았다가 내려오면서 순식간에 분위기가 전환됐다.
금세 주먹다짐이라도 오갈 것 같던 팽팽한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인택의 웃음소리와 함께 편안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시끄럽고. 이제 그만 먹을 만한 것 좀 내와. 네놈 그 느글거리는 성격처럼 음식 맛도 변함없는지 보자.”
“차도훈, 그냥 내가 그리웠다고 하지.”
“하아, 그래, 그래.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방해하고 어서 음식이나 내와.”
“좋았어. 이렇게 뜨거운 고백을 받았는데 가만있을 수 없지. 우리 예쁜 아가씨, 기대해요. 내가 금방 맛난 거 만들어줄게.”
끝끝내 느물거리는 멘트를 남기고 돌아서는 인택 때문에 도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런 건 처음이라. 아무래도 첫 데이트 장소를 영 잘못 잡은 것 같지?”
두 사람의 신경전에 가슴 졸였던 건 사실이라 빈말로라도 괜찮다는 소리를 못 하고 조금은 뚱한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보던 수안이 믿지 못할 광경에 눈을 조프렸다.
지극히 평균적인 그녀의 시력에도 훤히 보일 만큼 도훈의 광대 언저리가 붉어져 있었다.
세상 자신만만하고 칼 같은 남자가 쑥스러워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불편했던 마음은 봄날 눈 녹듯 스러져 버렸다. 가슴 한구석에서 몽글몽글 거품이 이는 것 같았다.
자신의 기분이 이렇게 순식간에 변할 수 있다는 데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수안은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걸 참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고 눈썹 끝을 손가락으로 쓸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난 그저 너한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어서…… 젠장.”
수안의 표정을 살피던 도훈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다가 결국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그래서.”
“응?”
“우리 맛있는 거 먹고 난 다음에 뭐 해요?”
“어? 그게, 영화를 볼까 하는데.”
“그러고 나서 차도 마시구요?”
“음, 커피 맛이 아주 기가 막힌 데다 야경도 끝내준다는 집을 알아놨는데…….”
“풋, 그게 뭐예요?”
수안의 입에서 결국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왜? 커피보다는 아무래도 차가 나으려나. 요즘 인기 있는 전통 찻집도 검색해 보긴 했는데…….”
당황한 태가 역력한 도훈이 휴대폰을 꺼내 살피기 시작했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턱을 쓰는 모양새가 늘 자신만만하던 그 차도훈이 아닌 것만 같았다.
도훈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 보이는데, 수안은 자꾸 웃음이 났다.
“영화도, 커피도, 차도 다 좋은데, 그거 그냥 집에서 하면 안 돼요?”
한 손으로 턱을 괸 수안이 꽤나 당돌하게 들릴 법한 말을 건네며 예쁘게도 생글거렸다.
그 웃음에 사로잡힌 도훈은 순간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말도 잃고 움직임도 멈췄다.
“그게 부부의 특권이잖아요. 집에서 뭐든 할 수 있다는 거.”
미간을 살짝 찌푸렸던 도훈이 옆에 놓인 잔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잔을 완전히 비우고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지 손을 들어 물을 더 청하기까지 했다.
“집은 좀 그런대.”
간신히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답답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집이 뭐가 어때…….”
집이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 다 묻기도 전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이 줄줄이 날라져 식탁에 놓였다.
대화는 잠시 끊겼고 다시 이어졌을 땐 식사에 방해가 되지 않는 가벼운 화제들로 채워졌다.
양식과 중식, 한식이 골고루 뒤섞인 인택의 퓨전요리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수안은 달콤한 분위기와 어울리는 향긋한 와인도 한잔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 인택이 다시 나타나 느글느글한 멘트를 날려댔지만, 처음만큼 거북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다시 생각날 것 같은 그의 요리가 한몫을 한 덕일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데이트의 정석 같은 코스를 밟기 위해 영화관을 고집할 줄 알았던 도훈은 침묵을 고수한 채 순순히 집으로 향했다.
도훈의 묵직한 침묵에 짓눌려 수안도 덩달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주차장에 도착하고도 도훈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시동을 끄지 않았다.
수안은 오랜 습관처럼 도훈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기석의 침묵은 격렬한 화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침묵은 단순히 불편한 정도가 아닌 극심한 긴장감과 공포를 안겨주곤 했다.
말수가 많지 않은 도훈의 침묵은 대화만큼이나 일상적인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오랜 시간 그녀를 지배했던 습성은 자신의 잘못부터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워낙 무표정한 얼굴이라 기분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화가 난 건지 아닌 건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 도훈을 살피며, 수안은 그가 정말 자신과 함께 집에 들어가는 게 꺼려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집은 좀 그런대’라고 했던 도훈의 말이 또렷하게 되살아나며, 그는 어쩌면 한 공간에 그녀와 단둘이 남겨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약속이라면 철석같이 지키는 사람이니, 불과 3일 전에 한 뭐든 다 해보자는 말을 번복할 수 없어 고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훈에게 자신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데이트하자는 한마디에 잠시 잊고 있었던 상념들이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뭐든 다 해보자 했지만 그녀와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찐 부부의 일. 도훈은 그것에 대해 고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영화도 차도 집에서 하자고 했던 상당히 노골적인 그녀의 제안이 그를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
그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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