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불안해서 나도 모르게
수안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도훈과 나미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면 나는 어쩌라고요?”
어쩔 수 없이 원망의 말이 툭 튀어나왔다.
[어쩌긴 뭘 어째. 그 선약에 나도 좀 끼워주면 되겠네.]
“그건…….”
화난 기색 하나 없는 도훈의 말에 수안은 잠시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결국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내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저기, 미안한데, 아저씨가 저녁을 못 먹었대서, 우리랑 같이 가면…….”
“안 돼.”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이어지던 수안의 말을 툭 잘라냈다.
태경의 즉각적이고 싸늘한 반응에 수안은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워낙 다혈질이라 원래도 사근사근한 맛은 없었지만, 태경은 단 한 번도 수안에게 이런 식으로 위협적이고 단호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수안은 조금 멍한 눈으로 상당히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는 태경을 올려다봤다.
그런 수안의 표정이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던가 보다. 눈치를 살피던 나미가 얼른 수습을 하고 나섰다.
“한태경, 그렇게까지 딱 잘라낼 건 없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주 비싼 거 얻어먹으면…….”
“그 정도 돈은 나도 있어.”
“내가 뭘 먹을 줄 알고? 돈은 사장님이 더 많잖아.”
“네가 뭘 먹든, 네 그 조그만 덩치를 꽉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사줄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
태경과 나미의 유치한 말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더욱 난감해진 수안이 그들을 막고 나섰다.
“그만, 그만해. 안 되는 건 줄 알았어.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아저씨는 그냥 가라고…….”
“그건 곤란하겠는데.”
수안의 머리 위로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꼭 움켜쥐고 있던 휴대폰이 손에서 쑥 빠져나갔다.
동그래진 눈으로 돌아보니 저만치 떨어져 있던 도훈이 어느새 훌쩍 다가와 있었다.
“구해주기만 기다리다간 아무래도 날 새지 싶어서. 우선 여기부터 벗어날까?”
수안의 휴대폰을 자신의 재킷주머니에 집어넣은 도훈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거머쥐고 주차되어 있는 차로 이끌었다.
아직까지 도훈을 주시하고 있던 선배들이 입을 틀어막으며 거친 숨을 삼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해달라 할 땐 언제고, 그런 시선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성큼성큼 걸어가던 도훈이 멀뚱히 선 태경과 나미를 돌아보며 어서 안 따라오고 뭐 하느냐 고갯짓을 했다.
“네, 가요. 가야죠.”
하루 종일 뚱해 있었던 애가 맞나 싶게 경쾌한 목소리로 답한 나미가 태경을 잡아끌었다.
작게 욕설을 뱉어낸 태경이 마지못해 따라왔다.
수안 일행을 모두 차에 태운 도훈은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차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도훈이야 어느 자리에서건 눈치 보는 사람이 아니니 묵직하게 내려앉은 침묵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수안이나 나미는 앉은 자리가 편치 않았다.
조수석에 앉은 수안이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바짝 날을 세운 태경을 힐끔 돌아봤다.
태경의 옆에 앉은 나미도 곧 폭발할 것 같은 그를 힐끔거리며 얕은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나 다를까, 침묵은 불퉁대는 태경의 목소리로 깨어졌다.
“수안이 입장도 있는데 학교로 찾아오는 건 좀 자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수안이 입장? 그게 무슨 소리지?”
살짝 날이 선 도훈의 물음에 수안이 태경을 돌아봤다.
오전에 있었던 일을 듣지 못한 수안은 의문이 담긴 멀뚱한 눈으로 태경을 쳐다봤다.
수안의 시선을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마주하고 있던 태경이 나직한 욕설을 토해내며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옆자리에 앉은 나미가 알만하다는 눈으로 태경을 바라봤다.
태경은 선배들 사이에서 오갔던 얘기를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얕은 한숨을 뱉어낸 나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수안인 주목받는 거 싫어하니까 걱정하는 거예요. 사장님이 좀 유명하잖아요.”
최대한 가볍게 들리도록 꾸며낸 말에 도훈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솟았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수안아, 그래?”
아, 이 아저씨 참, ‘그래’를 다양하게도 써먹는다.
그 생각부터 퍼뜩 들어서 걱정이 담긴 물음에도 웃음이 비어져 나올 뻔했다.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느라 대답도 바로 하지 못했다.
그 잠깐의 틈이 걱정을 키웠나 보다. 능숙한 솜씨로 운전에 열중하던 도훈의 시선이 자꾸 정면을 벗어나 수안을 힐끔거렸다.
쏘아보는 태경의 눈빛에는 뒤통수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차가 엉뚱한 데에 처박힐지도 몰랐다.
“아니, 괜찮아요.”
사실 수안은 주목받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낯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강하다 보니 대인관계에 서툰 것뿐이었다.
다가오는 사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은 보통 피곤한 게 아니라, 애초에 관심을 끌지 않도록 몸을 사리는 쪽이 편했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 건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도훈이 학교로 그녀를 찾아온 게 싫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나쁜 쪽으로건 좋은 쪽으로건 지나친 관심을 받게 된다고 해도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괜찮고 싶었다.
“젠장,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런 같잖지도 않은…… 휴우.”
태경이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수안은 태경의 격한 반응에 놀라 어리둥절한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말을 쏟아낼 듯 입을 벙끗거리던 태경이 결국 수안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 앞에서 세워주세요. 이만 내리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우리 저녁…….”
“그럴래?”
갑자기 내리겠다는 태경의 말에 놀라 뒷좌석으로 튀어나갈 듯 몸을 기울인 수안의 머리 위로 지나치게 태연한 도훈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차가 도로 한쪽으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정차했다.
격한 감정을 품은 태경의 싸늘한 시선이 도훈의 뒤통수에 날아와 꽂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수안이 말을 하려다 머뭇거리는 사이, 차에서 휙 하니 내린 태경은 ‘쾅’ 소리가 나도록 차 문을 닫아버렸다.
무지막지한 소리에 놀라 움츠러들었던 수안이 차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가는 태경을 좇다가 조급하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아저씨, 잠깐만요. 태경이 화났나 봐요. 내가 가서…….”
차에서 내리려고 허둥대는 수안의 손목이 묵직한 손길에 꽉 틀어 잡혔다.
수안의 황망한 눈길이 자신의 손목을 거머쥔 큼직하고 날렵한 손에 머물렀다가, 이내 날 선 도훈의 얼굴로 옮겨졌다.
“그냥 있어.”
너무 나직하고 부드러워서 절대로 명령처럼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한 명령이었다. 수안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왜 화가 났는지는…….”
“알아도 달라질 거 없으니까, 그냥 있으라고.”
태경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꼭 아는 것 같은 말투였다.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야. 달라질 거 없어.”
고요하게 가라앉은 도훈의 시선과 의아함이 담긴 수안의 시선이 첨예하게 맞닿았다.
조용한 차 안에 뭉근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긴장감을 뚫고 야트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수안아, 내가 가볼게.”
“아니, 나한테 화난 것 같은데 내가…….”
“태경이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오늘은 그냥 여기서 헤어지자. 사장님, 다음에 만나면 맛있는 거 사주셔야 해요.”
“그러지.”
기어코 묵직한 도훈의 답을 받아낸 나미가 차 문을 열고는 잠시 머뭇댔다.
“오늘은 미안. 내일 보자, 수안아.”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나미가 콘솔박스 위에 놓인 수안의 왼손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입에 문 채 차에서 내렸다.
순식간에 둘만 남겨진 차 안에서 수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다 손목에 가해지는 압박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 아파요.”
도훈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 흠칫하며 손을 떼어냈다가, 붉어져 버린 손목 위를 엄지로 쓸었다.
“불안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네?”
“뭘 먹는 게 싫을 정도로 화난 게 아니라면, 밥부터 먹으러 갈까?”
도훈이 아주 대놓고 말을 돌렸다.
대체 뭐가 불안하다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고 말았다.
나미에다 태경까지, 오늘은 정신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너무 과했다. 더 이상의 신경전은 절대 사절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태경과 나미는 이미 가물거릴 정도로 멀어져 버렸고, 달리 뭔가를 할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얕은 한숨을 토해내며 좌석에 머리를 기대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자, 도훈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복잡한 곳을 벗어난 차는 작은 호숫가에 위치한 다담이라는 퓨전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섰다.
호수를 바라볼 수 있게 전면이 창으로 된 레스토랑은 은은한 조명에 감싸여 따스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미리 예약이라도 한 건지, 도훈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마자 종업원은 환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며 그들을 아늑한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혹시 예약했어요?”
“뭐, 첫 데이트니까.”
작게 중얼거리는 도훈의 귓불이 어쩐지 붉어진 것 같았다.
“흠흠, 여기 음식 맛이 제법 그럴듯할 거야.”
“여기, 와봤나 봐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들리도록 애를 썼지만, 수안의 음성에 살짝 날이 섰다.
몇 개 안 되는 테이블을 채운 건 대부분이 연인들이었다. 레스토랑 안 어디를 둘러봐도 러블리한 것들뿐이었다.
비즈니스 미팅을 이런 곳에서 할 리는 없을 거고, 도훈은 대체 누구와 이곳의 음식 맛을 본 걸까 하는 의문에 수안의 신경이 곤두섰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뭐지? 뭔데 얼버무리는 거야?
“맨날 일만 하는 것 같더니, 이런 멋진 데도 알고 있었네요?”
“그러게. 이런 취향인 줄은 미처 몰랐네.”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린 도훈이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봤다.
“아저씨가 데려와 놓고는……. 이런 거 내 취향도 아니거든요.”
“그거 참 안타깝군요.”
“아악! 뭐, 뭐, 뭐예요?”
뒤쪽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수안이 얕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획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