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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데이트하자 (38/88)

38. 데이트하자

도훈이 지나치게 묵직해 보이는 회장실의 문을 열려다 말고, 미처 못다 한 말이 생각난 듯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리고 우리 수안이,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밤톨만 한 게 어찌나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는지 한시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구만, 고분고분은 무슨.

“아! 한 가지 더. 부지런히 단계 밟아서 올라올 거니까 긴장하고 있으라더군요. 애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낙하산 같은 건 생각도 못 하는지라.”

도훈의 눈길이 잠시 인희를 훑었다. 무감한 눈길이었지만, 어쩐지 비웃음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네까짓 게 감히,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눈빛.

“그때까지 저는 도둑이나 열심히 지켜볼 참입니다. 그러니 제 앞날에 대한 걱정은 접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흥분한 덕규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한 발 한 발 큼직하게 내딛다가 회장실을 완전히 벗어나서는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사장실로 들어서자마자 지희가 태블릿 화면을 체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Drop it! 바로 퇴근할 거야.”

“네? 지금 당장 처리해야 될…….”

“하루 정도 일찍 퇴근한다고 태성이 어떻게 되진 않는다더군.”

“누, 누가요?”

“회장님이.”

“허! 농담이시죠?”

지희가 사장실까지 종종거리며 따라 들어와 따지듯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훈은 재킷과 차키를 챙겨 그녀를 그대로 지나쳤다.

“오늘 안 한다고 끝장나는 일 없잖아. 내일 하자고, 내일. 다들 정리하고 퇴근들 해.”

“아니, 왜 갑자기……. 일까지 팽개치고 대체 어딜 가시는데요?”

“데이트.”

도훈은 돌아보지도 않고 답하며 그대로 문을 나섰다.

문까지 따라붙었던 지희가 태블릿 든 손을 축 늘어뜨리며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

“진짜 차도훈 맞지?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와! 오지다, 오져. 실물 장난 아니네. 꺄아, 차도훈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봐.”

“야, 나 좀 봐봐. 화장 번지지 않았니? 아이 참, 머리 풀고 오는 건데 괜히 묶고 와서는, 쯧.”

옹기종기 모여선 선배들이 분주하게 서로의 외모를 점검하며, 저만치 그림처럼 버티고 선 도훈을 힐끔거렸다.

도훈을 힐끔거리고 있는 건 비단 그녀들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도훈을 쳐다봤다.

개중에는 아예 가던 걸음을 멈추고 넋 놓고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차도훈임을 알아본 사람도 있었지만, 누군지도 모르고 멈춰 선 사람들도 꽤 있었다.

“무슨 촬영하나?”

“신인인가? 얼굴이며 몸매며 아주 예술이네. 완전 취저.”

“야, 이럴 게 아니라, 뭐 찍으러 왔는지 가서 물어보자.”

자기네들끼리의 소곤거림이었지만 결코 작은 소리는 아니었던지라 수안을 비롯한 일행들에게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도훈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길까 봐 겁난 선배들이 수행원처럼 나서서 주변을 정리한 뒤 그에게로 몰려갔다.

하지만 정작 잽싸게 도훈에게로 다가갔어야 할 수안은 그와 주변 사람들을 살피며 미적거리고 있었다.

“수안아, 너 데리러 오셨나 본데 어서 가봐.”

재촉하는 나미의 옆에서 태경의 얼굴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하지만 수안은 미처 태경의 기분까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냉큼 다가오지 않는 그녀로 인해 그의 미소가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었지만, 수안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틀 전, 약간 어색해진 저녁 식사가 끝난 후에 도훈은 처리할 업무가 있다며 서재로 향했다.

열렬했던 키스가 무색하리만치 건조하게 느껴지는 도훈의 처사에 수안은 섭섭함을 넘어서 참담함마저 느껴야 했다.

반지를 주고받을 때까지는 좋았는데, 그 후에 이어진 키스는 아주 환상이었는데, 왜 갑자기 담백한 분위기가 되어버린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식사 도중이라 적당히 끝낸 것이리라 생각했다. 진짜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큰일 날 업무가 있어서 서재로 간 걸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업무를 마치고 나면 자신의 방으로 찾아올 거라 생각하며, 실망스러운 마음을 추슬러 샤워를 하고 개중 가장 그럴듯한 잠옷을 꺼내 입었다.

그렇게 도훈을 기다리는 동안 수안은 얼마나 설레고 초조했는지 모른다.

1분에 한 번 꼴로 시간을 확인하며, 침대에 앉았다가 소파로 자리를 옮기고, 머리를 틀어 올렸다가 다시 늘어뜨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책으로 바꿔 들기도 했다.

한시도 가만히 못 있고 분주하게 서성대다가, 방 정리까지 끝냈을 때는 밤 1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바보같이 그때서야 도훈이 자신을 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첫날밤(?)에 소박맞는 신세가 될 줄도 모르고, 방을 합치려면 어느 방이 적당할지 생각했던 머릿속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속상하고 허탈한 마음에 기운이 몽땅 빠져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저녁 식사 시간을 되짚고 키스했던 순간을 되짚고 그의 표정 변화 하나하나를 되짚고, 하여튼 되짚을 수 있는 건 죄다 되짚어보았다.

남들 안 하는 것도 다 해보자며 달콤한 말을 했던 사람이 왜 다른 부부들은 다 하는 걸 안 하려고 피하는 건지, 이유를 생각하느라 머리에서 불이 날 것만 같았다.

결국 얻어낼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도훈은 자신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키스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도훈에게 수안은 여전히 어린애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랐다.

비참한 밤이었다. 당장이라도 도훈에게 쫓아가 따져 묻고 싶었지만,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느냐 묻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고 나니, 도훈이 꼴도 보기 싫어졌다. 그래서 일요일 내내 방에서 두문불출하다가 느지막이 주방에서 홀로 한 끼를 챙겨 먹었다.

일요일엔 경원 아줌마도 오지 않는 날이라 집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도훈은 집에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인기척조차 없었다.

밉기도 하고 오기도 생겨서 찾아볼 생각도 안 했다. 도훈도 물론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땐 도훈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그렇게 한집에 있으면서도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던 사람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맘고생하며 이틀을 보낸 뒤라 도훈이 막 꼴도 보기 싫은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선뜻 다가가기 망설여질 정도로는 서먹했다.

나미의 재촉에도 쭈뼛거리고 있자니, 점점 다가서는 선배들에 인상을 굳힌 도훈이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껏 미소를 머금고 몰려들었던 선배들이 어정쩡하게 멈춰 선 가운데, 수안의 가방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도훈과 수안의 가방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미가 팔꿈치로 그녀를 툭 쳤다.

“수안아, 전화.”

“어? 어.”

도훈에게 못 박혀 있던 시선을 떼어낸 수안이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불을 밝힌 화면 속에서 차도훈 이름 세 글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던 수안이 고개를 들자, 도훈이 귓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그녀를 향해 까딱댔다.

아무래도 어서 받으라는 소리 같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다 대자, 도훈도 다시 휴대폰을 귓가에 붙였다.

[데이트하자.]

나지막이 스며들 듯 들려온 첫마디였다.

[그전에 우선 나 좀 구해주면 좋겠는데.]

그가 한쪽 눈을 찡끗거리며 휴대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곤란한 듯 눈썹 위를 쓸었다.

별스러울 것 없는 제스처에도 여기저기서 급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빨리 정리해야 될 것 같기는 한데…….

“저기, 선약이 있는데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나미와 태경의 눈치를 살폈다.

미처 예상 못 한 말이었는지 도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선약, 친구들?]

“네. 지금 막 나미랑 태경이랑 저녁 같이 먹기로…….”

[그럼 나는?]

“네?”

떼쓰는 듯한 도훈의 말에 수안은 당황하고 말았다.

[데이트하려고 7시에 잡힌 회의도 취소한 데다, 산더미처럼 쌓인 결재서류도 내팽개치고 왔다고.]

믿을 수 없게도 도훈은 어린애가 투정 부리는 것처럼 불퉁댔다.

말수도 적고 웃음도 박한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까 도대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갔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도훈에게 화가 나 있었는데, 의외의 모습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군살 없는 몸매라 거구라고까진 할 수 없어도 180㎝가 넘는 장신에 어깨가 떡 벌어져서 그녀에 비해 한참이나 큰 남자가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면, 뭐가 씌어도 단단히 쓰인 게 분명했다.

솔직히 냉큼 그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주인의 손길이 그리웠던 강아지마냥 쪼르르 다가가 엉겨 붙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우선, 하루 종일 답지 않게 까칠하다가 이제야 겨우 살짝 기분이 풀린 나미와의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다 너무 많은 시선이 그에게로 몰려 있었다. 더구나 과 선배들까지 저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수안은 저 많은 시선들을 무시하고 그에게로 다가갈 만큼 낯이 두껍지 못했다.

어째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나미가 그녀를 툭 치며 입모양만으로 어서 가보라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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